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김시아의 문화톡톡] 봄을 기다린 화가 박수근: 나목(裸木)과 고목(古木)
[김시아의 문화톡톡] 봄을 기다린 화가 박수근: 나목(裸木)과 고목(古木)
  • 김시아(문화평론가)
  • 승인 2021.12.06 09: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여성들을 삶의 주체로 그린 ‘국민화가’ 박수근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전시회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 열려 다행이다. 여전히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음적인 시선과 다르게 박수근 화가의 시선은 따뜻하며 유교적이거나 봉건적이지 않다.

나무처럼 언제나 우리 곁을 지켜 주는 남자. 아니 그림 속의 나무가 되어버린 화가 미석(美石) 박수근(1914~1965)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 전쟁을 겪은 화가이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겪었으면서도 그의 그림엔 불안과 분노가 표현되어 있지 않다. 표현주의 회화와 달리 이성적이다.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혼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박완서, 『나목』, 2012:376)

소설 『나목』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이경아는 옥희도씨 유작전에서 <나무와 두 여인>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1970년 <여성동아>에 발표한 박완서의 첫 작품인 『나목』에서 등장인물 옥희도의 모델이 바로 박수근 화가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신문에서 화가 박수근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그의 전기를 쓰려다가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했던 박수근 삶의 일부만 알았기에 소설적 형식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소설의 마지막 배경은 주인공 경아가 남편과 함께 전시회를 보고 나와 은행나무 ‘황금빛 세례’를 받는 덕수궁이다.

 

고목(古木), 1961, 종이에 수채, 색연필, 23×52㎝, 개인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박수근, 고목(古木), 1961, 종이에 수채, 색연필, 23×52㎝, 개인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현재, 덕수궁 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 전시회(2021.11.11.-2022.3.1.)는 개관 이래 첫 개인전이라고 내세울 만큼 “유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 등 총 174점”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나목』의 표지로도 쓰인 <나무와 두 여인>뿐만 아니라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개인 소장품까지 총망라되었다.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구성된 전시회를 보며 유독 나의 눈에 들어 온 작품은 마지막 구역에 전시된 <고목>이다. 유화가 아닌 수채화와 색연필로 그린 작품이다. 김장철이 아닌 봄의 고목(古木)이다. 나란히 자라는 두 그루의 나무는 세 개의 큰 가지가 잘렸지만 꽃을 피운다. 상이군인처럼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린 듯 보이지만 봄이 되니 생명력을 보여준다. 누군가 가지치기한 것처럼 뒤편의 나무는 오른쪽으로 가지를 향해가고, 높게 자라는 자유를 빼앗긴 나무는 옆으로 길게 누워 자란다. 죽은 나무(枯木)가 아니라 늙은 나무(古木)는 하얀 꽃과 푸른 잎사귀를 피워 내고 있다. 화가의 유화 작품처럼 반복적인 붓 자국이 봄의 기운과 리듬을 만들어 낸다. 흰색과 초록과 땅의 색은 겹치고 겹쳐서 때론 잔잔한 초록 물결로 보이고 때론 바람의 운율을 만든다.

이번 전시회 도록에 있는 서성록 교수의 글 「박수근의 애린 정신: 주요 전람회와 출품작」을 읽어 보면, 『고목』이 그려진 같은 해 1961년, 박수근은 <꽃 피는 시절>이란 작품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번 전시회에 그 작품은 전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유채화 그림들과 다르게 <고목>은 ‘꽃피는 봄’을 이야기한다. 박수근은 4.19 혁명과 5. 16 쿠데타를 거치는 역사적으로 혼란한 시기에도 <노상의 소녀들>, <노인>, <사생>을 출품하고 전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특히 자기만의 화법을 완성해 가던 때였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물감을 두껍게 바르고 덧바르며 입체적인 질감을 표현한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사용하여 꿈틀거리는 붓 자국으로 색의 강렬한 리듬을 만든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드는 것과 다르게 박수근은 유채화로 ’화강암‘ 표면 같은 질감을 만들어 표현한다. ‘열 번 이상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하며 평면적인 그림에 깊이감을 주는 동시에 겹겹이 납작하게 눌러 바르며 감정을 누르고 눌러 절제와 인내심의 미덕을 보여준다. 어릴 적 책에서 장 프랑소와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동해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는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첫 바탕의 칠이 마지막 효과를 결정 짓는다”는 믿음처럼 한 층, 한 층, 꿈의 계단을 밝으며 독학으로 공부했다. 열여덟에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로 첫 번째 입선한 후, 끊임없이 작품을 그리며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으로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그리고 싶지 않은 초상화를 그리고, 가장의 어깨가 무거워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리며, 백내장이 심해져 왼쪽 눈을 실명한 1963년 이후도 계속 그림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열두 살에 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한 박수근 어린이는 사십 년 후, 중년이 된 1965년, 51세의 삶을 마감한다.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사는 “박수근의 시대를 읽기 위해 ‘독학’, ‘전후(戰後) 화단’, ‘서민’, ‘한국미’”라는 네 가지 핵심어를 제안한다. 또한 박수근과 동시대에 살았던 한영수(1933-1999)의 사진 작품을 통해 1950~1960년대 서울 거리와 사람들을 살펴보게 한다. 전쟁의 참상과 정치적 비극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다. <서울 금호동>엔 '몽실언니'처럼 아기를 업은 여자아이가 있고, <서울>이라는 제목의 각기 다른 사진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지나가는 여인들, 도로에 앉아있는 노인들, 비닐우산을 파라솔 삼아 좌판을 벌인 행상들 모두 박수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삶의 주체들이다. 정치적 선동이나 파토스(pathos)가 사라진 자리에 삶의 경험과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가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전시회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을 보고 나오면 덕수궁의 나무들이 새롭게 보인다. 일하는 여인, 아기를 업은 아이, 앉아있는 여인들과 노인들을 바라보기 위해 나무처럼 다정하게 지키고 있는 화가 박수근의 선한 눈으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자세하게 보게 된다. 11월 28일에 끝난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 전시회에서 권혜원 작가의 ‘나무를 상상하는 방법’을 통해, 금강소나무와 ‘향나무와 쥐똥나무 간의 대화’를 한참 동안 엿들은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소리 없는 대화에 귀 기울이게 된다.

이 짧은 글을 고심하며 쓴 주말 내내 세상은 시끄럽다. 조동연 교수에게 가해지는 모든 언어적 폭력을 보며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강국이 되었을지언정 정치문화는 아직도 전 근대적이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인간적이고 정치적 탐욕만 있는 일부의 정치인들은 아이들이 받을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박수근이 국민화가로 사랑을 받는 건 이웃을 향한 공감력 있는 그의 시선이 따스하기 때문이다. 봄을 기다리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상황이 지속되어도, 큰 가지가 잘리듯 삶의 고통으로 휘청거려도, 봄은 다시 오고 희망도 찾아온다. 겨울엔 소리 없는 신음과 ‘봄 꽃’을 피울 아우성을 듣자.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자.

 

 

글 · 김시아 KIM Sun nyeo

문학·문화평론가. 대학에서 문학과 그림책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기계일까 동물일까』 『아델라이드』 『에밀리와 괴물이빨』 『세상에서 가장 귀한 화물』 등을 번역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