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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상처 없는 삶?, <해피 아워>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상처 없는 삶?, <해피 아워>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1.12.13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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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1999)는 우연이 겹치면서 만들어낸 기막힌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시작한다. 그 가운데 세 번째 사례를 보면, 1958년 3월 23일, 17살 소년 시드니 베린저는 자살하려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그런데 시드니가 아파트 옥상 끝에 서 있던 그 순간, 6층에 살고 있던 소년의 부모는 크게 부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총을 들고 남편을 위협하다 방아쇠를 당긴다. 남편을 지나 창문 밖으로 날아간 총알은 바로 그때 옥상에서 떨어지고 있던 소년에게 명중된다. 그날 아파트 바닥에는 유리창 청소를 위해 안전그물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드니가 총에 맞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어머니는 “늘 총으로 위협했지만 장전해 놓은 적은 없었다”고 소리친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시드니는 부모의 잦은 싸움과 폭력적인 환경으로 크게 고통을 받았다. 그는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하는 부모를 자신이 돕겠다고 결심하고 총을 장전해 두었는데, 그 총에 자신이 죽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내레이터는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단순한 우연일 수가 없다. 이런 이상한 일들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연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걸까? 우리가 겪게 되는 일들은 필연 인 걸까? “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라는, 이 영화의 주제에 따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 아워>(2015)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이 모든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영화의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케이블카를 따라 터널로 들어간다. 어두운 가운데 소실점의 위치에는 터널의 끝을 알리는 구멍이 밝게 보인다. 네 명의 주인공인 아카리(다나카 유키에), 사쿠라코(키쿠치 하즈키), 후미(미하라 마이코), 준(카와무라 리라)은 케이블카를 타고 롯코산의 정상에 올라간다. 아래쪽에서는 날씨가 맑았는데 정상에 올라가 보니 그사이 날씨가 나빠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풍경을 가리키며 준이 “꼭 우리의 미래 같다”고 비관적으로 말하자, 아카리는 “여자 나이 37살이면 엄청 미래가 밝다”고 응수한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일 것이다. 네 명의 주인공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간다. 이제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밝은 공간이 나타나고, 오르막길을 지나면 내리막길이 나타나고, 좋았다 나빠졌다 하는 날씨 같은 그들의 인생 이야기가 장장 5시간 17분에 걸쳐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우연이 겹치면서 만들어낸 파장이 어떻게 인생의 굴곡과 아이러니를 만들어내는지 음미하게 된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에서

아카리, 사쿠라코, 후미, 준은 자주 모여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절친한 친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문제를 서로에게 털어놓지 않은 채 잘 살아가고 있는 척한다. 따라서 그들의 관계가 피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측면이 인간관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준이 1년 동안 이혼소송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카리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며 크게 화를 내는데, 그녀 역시 자신이 간호사로 일하며 겪는 사건이라든지 데이트한 남자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는다. 사쿠라코는 워커홀릭인 공무원 남편과 큰 사고를 친 사춘기 아들로 인해 고통에 빠져 있고, 후미는 남편에게서 점점 거리감을 느낀다.

 

네 명의 주인공은 절친이지만 각자의 문제를 털어놓지는 못한다
네 명의 주인공은 절친이지만 각자의 문제를 털어놓지는 못한다

첫 장면에서 서로의 남편을 칭찬하며 행복해 보였던 그들이었는데, 사실 그들의 삶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침식되어 가는 중이다. 하지만 각자가 처한 문제를 말을 통해 표현하기 전까지, 사건이 구체적으로 눈앞에 드러나기 전까지, 그들은 남편이나 친구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의 원인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 사이의 대화이다.

‘중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신체 워크숍이 끝난 다음, 진행자 우카이와 참가자들이 뒤풀이 장소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자. 참가자들은 워크숍에서 서로의 몸이 맞닿는 체험을 했던 게 어땠는지 서로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가자마가 아내의 외도로 이혼 재판을 했던 경험을 털어놓자, 준은 자신의 외도로 현재 이혼 재판 중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그렇게 마음속에 있던 말이 밖으로 나오게 되자, 다른 참가자들은 각자의 경험과 입장에 따라 각각 다른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인물들의 대화가 오고 가면서 점점 감정의 파도에 휩싸여 간다.

준의 이혼 법정 장면에서, 준은 태연하게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거짓말을 꾸며가며 진술한다. 이때 준의 말을 듣는 방청석의 세 친구는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이질감을 느낀다. 세 친구가 준에게서 받는 감정과 준과 준의 남편의 갈등은 다음과 같은 연출로 표현된다. 준을 중심으로 전경의 준과 후경의 세 친구가 배치된 미장센에서, 준에게 화면의 초점이 주어질 때 후경의 친구들은 아웃 포커스 된다. 또 전경에는 준이, 후경에는 그녀의 남편과 변호사가 배치된 미장센에서도, 준에게 화면의 초점이 주어질 때 후경의 두 사람은 아웃 포커스 되거나 그 반대로 연출된다.

 

온천에 놀러가서 찍은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준은 친구들을 떠난다
온천에 놀러가서 찍은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준은 친구들을 떠난다

관객이 5시간 17분이란 긴 상영 시간을 즐겁게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관객이 제3의 인물처럼 인물들 사이에서 계속 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듣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주변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거나 자신의 경우에 대입해 생각해보면서 그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관객이 이러한 관람 경험을 할 수 있는 까닭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독특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배우를 ‘픽션의 캐릭터가 아니라 그 자신의 매력을 가진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으로 보고, ‘극영화는 배우의 신체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배우들이 대사를 발화하는 가운데서 저절로 또는 우연히 만들어지는 감정과 신체의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연기인데 연기가 아닌 것 같은 매직의 순간’(이 영화 전에 연기 경험이 없었던 네 명의 여배우가 제68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한 원동력이 되었다)을 연출해내게 된다.

소설가 노세가 자신의 작품 『수증기』를 낭독하는 장면이 매우 길게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세를 연기하는 배우가 낭독하면서 내용에 따라 계속 감정이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듣고 있는 인물들의 감정을 포착하고 관객이 그러한 경험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카이는 사물의 중심을 기막히게 포착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삶에서는 중심을 잃고 헤맨다
우카이는 사물의 중심을 기막히게 포착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삶에서는 중심을 잃고 헤맨다

네 명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달리 아카리의 눈앞에 고베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도시의 풍경이 선명하게 펼쳐져 있다. 그들 각자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사쿠라코의 시어머니의 말(“결혼은 앞으로 나아가도 지옥, 뒤로 물러나도 지옥이야. 똑같이 지옥이라면 앞으로 나아가는 게 낫지 않겠니?”)처럼,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우카이는 모든 사물의 중심을 기가 막히게 포착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삶에서는 중심을 잃고 타인과 관계에서 균형을 찾지 못해 헤맨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중심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가 또다시 잃었다가 하면서 계속 견디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사진출처: 영화사조아

 

글 · 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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