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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서로 닮은 두 얼굴 - 쟈코 반 도마엘 감독, <제8요일 Le Huitièm Jour>(1996)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서로 닮은 두 얼굴 - 쟈코 반 도마엘 감독, <제8요일 Le Huitièm Jour>(1996)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12.2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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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감독 쟈코 반 도마엘의 영화 <제8요일 Le Huitièm Jour>(1996)은 아리와 조지 두 남자의 우정을 통해 물질 소비사회에서 중요한 인간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그려낸다. 환상을 표현하는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은 이 영화를 예술영화의 품격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또한 인간이 물질에서 정신적으로 거듭 나게 되는 계기를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에서부터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상인 중심주의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장애인과 자연과의 합일을 느끼게 만드는 걸작이다.

긴 프롤로그에서는 조지의 품성을 보여준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동심을 갖고 있다. 그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불행한 성인이지만 마음은 천사보다도 곱다. 영화는 이원적 상반성을 중심에 놓고 있다. 광고 사진을 찍는 두 커플을 보여준다. 처음엔 광고인 줄 모른다. 사랑하는 두 남녀인 줄 안다. 그런데 서로의 애정을 과시하지 않으니 이상하다. 나중에 보니 광고사진이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거짓 웃음을 지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감독은 질문을 한다.

주요한 인물인 아리를 소개할 차례다. 그는 세일즈맨을 가르치는 강사다. 그는 네 가지 원칙을 말한다. 웃음을 지을 것. 정열을 갖을 것. 갖지는 않았을 지라도 갖은 것 같은 표정을 지을것. 이어 아리의 어둠이 나타난다. 아리는 불행한 상황에 처해있다. 아리의 상황은 모순이다. 그는 불행하면서도 남들에게는 아닌 척 할 뿐만 아니라 정 반대의 것을 강요한다. 논어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영화는 그 지점에서 움직인다. 인간이 스스로 모순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때 멈춰야 한다. 멈춰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가는 길이 과연 맞는가. 영화는 그것을 질문하고 있다. 영화는 인간의 이원적 상반성을 다룬다.

 

환상은 상실감을 채워주는 요소다. 조지는 엄마가 없다는 것에 상실감을 갖고 있다. 그는 주말마다 다른 환자들이 집으로 가는데도 혼자 남아있어야 했다. 그는 엄마를 그리워 하는 노래를 항상 들으며 환상을 갖곤 했다. 노래를 들으면 엄마가 들어와 자신과 얘기를 나누다 가곤 했다. 이 모든 건 환상이다. 그는 환상이 아니면 상실감을 견딜 수 없다. 그에게 세계는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법대로 산다. 그는 세상에 있지만 또한 세상에 있지 않다. 그는 그가 만든 세계속에서만 존재한다. 집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환상을 믿고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프롤로그는 조지의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창조주이다. 자신 맘대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 그가 창조한 것은 결핍된 걸 채워주는 요소들이다. 음악, 바다, 레코드, 텔레비전, , 인간을 차례대로 창조했다. 결핍을 위로해 주는 요소들이다. 음악이 가장 중요한 위안을 준다. 다음엔 바다. 레코드, 텔레비전 등을 지나 풀이다. 풀은 자연을 말한다. 풀과 나무를 친구처럼 느낀다. 그리고 인간이다. 그가 보는 인간은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말한다.

 

아리는 방에서 혼자 말을 한다. 마치 아내 쥴리가 있는 양 말한다. 쥴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건 환청이다. 뒤돌아 보니 쥴리가 있다. 아리는 놀라면서도 쥴리와 계속 말을 이어간다. 그는 쥴리를 만지고 싶어한다. 외로움의 표상이다. 그게 환상이라는 증거가 된다. 환상이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쥴리는 거부한다. 아리는 빈 곳을 더듬는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 장면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환상인지 불분명하게 구성한 것이다. 그만큼 아리가 쥴리를 보고 싶어하며, 변명을 인정받고 싶고,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의 표현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는 마음의 병에 걸린 것이다. 우울증이든 뭐든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는 단계다. 이런 상태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심신이 지쳐 있을수록 더욱 내면을 찾으려 하고 안정을 얻고 싶어한다. 내면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아리는 커피를 마시려다 잘 나오지 않자 컵을 팽개쳐 버린다. 아침 직장에서의 일이다. 그는 강사이고 그 주변엔 많은 교육생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머쓱해 하면서 넥타이를 고쳐매곤 그곳을 빠져나온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마음의 절대평정을 해야할 강사가 분노를 표출했으니 망신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사회적 자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화장실에 가서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 본다. 위선과 가식의 웃는 모습이 더 이상 아니다. 이젠 분노를 넘어서 절망과 광기에 가득찬 그로테스크한 얼굴이다.

이런 일상의 에피소드는 많은 걸 시사해 준다. 어느 날 갑자기 온다. 깨달음의 계기는 그렇게 온다. 내면의 병에 걸리면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낸다. 아리가 경험한 이 사건은 겉으로는 사소한 일이지만 내면으로는 큰 사건이다. 인생 전체를 다 부정할 수 있는 커다란 상처를 입은 상태다. 그는 상실감, 허무함으로 인해 우울증이라는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그 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자살을 기도할 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 충동적으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조지를 만나게 된다.

 

심리학에선 이런 상태를 긍정적인 징후로 보기도 한다. 외적인 사회에서 실패할수록 더욱 내면적으로 후퇴해오면 그때야 말로 내면을 관찰하고 성찰할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많은 명상을 하면서 인생을 정리한다면 다음 단계는 훨씬 희망적인 전경이 펼쳐진다. 그의 영혼은 한 단계 도약한 상태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글·정재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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