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혼탁함과 불화 <드라이브 마이 카>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혼탁함과 불화 <드라이브 마이 카>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1.10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먼저 보았던 입장에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상상하며 짐작했던 사브900의 이미지가 있다.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의 유령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생과 죽음 사이의 공간이자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과거와 현재 가운데서 끊임없이 내달리는 회상의 공간으로 작동하는 사브900이다.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자동차와 같이 픽션과 리얼리티의 경계에 있는 특권적 장소처럼 말이다. 과도한 반복의 모티브를 통해 삶을 뒤흔드는 비일상적 재난, 환영적 사랑과 더럽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일상의 관계를 모색하는 걸작 <아사코>를 연출했으며, 분명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참혹한 전쟁의 현실과 환영이지만 현실을 모사한 기록필름을 통해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탁월하게 활용한 <스파이의 아내>의 시나리오 작가라면 분명히 내가 상상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영화, 소설, 연극과 같은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를 경유하여 불가해한 삶에 대해 말하는 그 무언가 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뒤늦게 떠오르는 오프닝 크레딧 끝에 느꼈던 기묘한 감흥이 동의하기 힘든 파토스의 결말로 변하는 동안 내가 짐작했던 것들이 반은 맞았고 반은 맞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먼저 반은 맞았다는 것은, 이 영화가 다양한 이야기 속 이야기들, 연극 <바냐 아저씨>, 오토의 목소리가 녹음 된 테이프, 가상의 인격을 만든 미사키(미우라 토코)의 엄마와 같은 여러 메타포로 겹겹이 레이어드를 만들며 픽션과 리얼리티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반은 틀렸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그것이 영화 전체와 이상하게 불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영화가 픽션과 리얼리티의 관계를 담은 알레고리를 지녔다는 것 자체는 미학적 장, 단점으로 판단할 것이 아닌 그저 하나의 특성일 뿐이다. 그것을 몇몇 모던 시네마들처럼 과감한 형식으로 탁월하게 담거나, 혹은 하마구치가 그래왔듯 <해피 아워>, <아사코>에서처럼 도식적이지만 심플하게 배치하여 중심 서사라는 물줄기로 자연스레 모여들어 다양한 결의 의미를 발산하는 장치로 자연스럽게 놓았을 때 장점으로 발화하는 것이다. 반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이러한 특성은 매우 산만하고 과시적인 형태로 과도하게 배치된 다른 설정들, 의미들과 부딪히며 혼탁함 속으로 가라앉아 있다.

 

과잉의 혼탁함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일단 소설과의 차이점에서 시작해보자. 하마구치 류스케는 원작의 핵심이 되는 회상 장면을 모두 제거했다. 그러기 위해 많은 부분을 변경했는데, 원작에서 회상과 대사로만 등장하는 오토와 가후쿠의 결혼생활을 오프닝으로 활용하고 마찬가지로 회상으로만 등장했던 다카쓰키(오카다 마사키)를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의 배우로 등장시켰다. 그리고 원작의 중심이 멀리 과거가 되어버린 기억을 담고 빠른 속도로 특정한 장소를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의 부유하는 이미지였다고 한다면 하마구치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중심은 연극단 공동체가 되어 회상도 움직임도 아닌 연극이라는 고정점을 두고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으며 여러 층의 의미들을 쌓아가는 구조가 되었다.

오토가 사망하고 <바냐 아저씨> 연극을 위해 캐스팅이 진행되는 지점까지는 이러한 변경점이 매우 적절한 선택처럼 느껴진다. 섹스라는 나와 타자의 경계가 흐트러지는 무아의 순간에서 탄생한 오토의 이야기는 아내의 외도를 발견하는 가후쿠의 모습과 명확히 겹치며, 눈물이 아니지만 눈물처럼 떨어지는 안약의 모습은 가후쿠의 상황과 감정을 거울처럼 비추며 삶과 허구의 존재론적 유사성을 원작에서보다 확장시켜 영화의 확실한 동력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프닝 크레딧으로 마치 영화가 다시 시작하듯, 다국적의 인물들이 등장하며 서로 다른 언어로 말을 하는 연극을 영화의 구심점으로 놓으면서 각기 다른 지향점의 알레고리가 뒤섞이게 된다. 이 뒤섞임은 서로가 시너지를 발생시키는 형태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다카쓰키 캐릭터의 쓰임새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가 지닌 폭력성과 살인이라는 범죄의 결과는 가후쿠의 상처나 오토의 도덕적 과오와 명확히 대구를 이루지 않으며 오히려 영화에서는 서브 가지 중 하나인 히로시마의 역사성과 공명하는 장치로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그 결과 다카쓰키 저지른 폭력과 살인이라는 과오의 의미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핵심 주제와 그렇게 딱 떨어지지도 틀리지도 않은 어정쩡함을 유지하는 것에 비해 과도한 존재감으로 영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이도 저도 아닌 듯한 다른 설정들과 어정쩡한 연결고리로 얽히며 과도하게 증식하며 부풀어 오른다. 이것을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긍정적인 과감성으로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으며 <아사코>나 <해피 아워>의 장점이었던 구조적 도식성과 단순함을 잃어버린 과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과욕의 더 큰 문제는 영화의 여러 결의 의미들이 뒤섞이며 만드는 혼탁함 뿐 아니라 핵심 동력이 되는 픽션과 리얼리티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불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에 있다.

 

픽션과 리얼리티 그리고 불화

하마구치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하루키의 원작의 분명한 장점은 몇 개의 아이디어를 단순하지만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일관된 조화로움으로 감흥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죽은 아내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자동차는 집과 일터라는 일상의 틈에서 부단히 움직이며 가후쿠를 과거와 미래, 죽음과 삶 사이의 시간 안에 놓고 있다. 이 부유하는 경계의 공간에서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라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인간의 단면에 대해 회상하고 고백하면서, 자신과 다르지만 비슷한 고통을 공유한 미사키와의 대화를 통해 아내를, 미사키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자라는 자신의 직업을 오롯이 마주하여 여러 가면을 쓰고 살아가다 최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나 자신을 이해하며 결국 인간이라는, 생이라는 존재에 대해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 미사키가 오래전에 사망한 자신의 딸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사실과 그녀의 과거를 온전히 가후쿠의 과거, 이야기와 겹치며 기이한 감흥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에 상처의 봉합이나 회복은 없다. 그저 불가해한 이 세계의 모호함, 이해할 수 없음에 관한 일관된 받아들임만이 있다.

반면 하마구치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중반부까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의 불가해성에 대해 말하다 급격한 방향 전환을 한다. 그 전환이란 갑작스러운 홋카이도행에서 보듯 상처의 회복이라는 명확한 도착점을 향하고 있다. 당연히 이 도착점 자체에 나쁘거나 좋은 것은 없다. 다만 이 영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평자들 사이에서도 일부분 홋카이도 시퀀스의 갑작스러움, 어색함을 언급했던 것처럼 이것이 픽션과 리얼리티를 향한 영화의 시선과 모순적으로 부딪히며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 일단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픽션과 리얼리티의 관계를 은유하는 시선은 명확하다. 오토의 이야기, 미사키 엄마의 다른 인격, 이유나(박유림)의 연기를 선택한 이유와 같이 픽션은 현실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 고통을 마주하게 도움을 주는 모순적인 대상으로 존재한다. 가후쿠가 너무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는 이유로 바냐역을 거부했지만 결국 그 역할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방해하면서 도움을 주는 것, 환영에 이입하게 하면서 반추하게 하는 것은 픽션이 지니는 거울적 특성이다.

하지만 영화가 집중해온 모순적이고 불가해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동시에 마주하게 해주는 픽션의 모던한 양가성과, 도착점이 향한, 한 인물의 상처가 비일상적인, 비현실적인 사건(픽션)을 경유하며 회복하게 되는 픽션의 환영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 고전적 결말과는 불화한다. 물론 그 불화 자체가 목적이거나 불화를 넘어선 영화적 감흥을 만들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는 두 경우 모두 해당하지 않는다.

 

결말과 봉합

그 결과 하마구치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원작의 사브900과 같은 픽션과 리얼리티의 양가성을 체화하고 있는 특권적 장소와 일관성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중심이 되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준비 공간은 양가적인 장소가 아닌 산만하게 의미들이 부딪히는 과잉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과거의 상처를 연극을 통해 회복하려는 인물, 소통 불가능한 인간관계를 직접적으로 은유하는 다국적 설정과 그 다국적이 아시아에 국한되어 있어 히로시마라는 공간의 폭력의 역사와 공명한다는 것, 그리고 그 역사성과 비스듬히 마주하는 다카쓰키의 범죄가 그것이다. 앞서 다카쓰키의 범죄가 겹겹의 레이어드로 쌓인 영화의 의미망 안에 어정쩡하면서 과도한 존재감을 지녔다고 언급했던 것처럼, <바냐 아저씨>라는 무대 뒤편에는 이러한 설정, 은유, 알레고리가 어지러이 뒤섞이며 야심과 과잉으로 꽉꽉 들어차 있어 다국어가 은유하는 것이 인간들 간의 소통 불가능성이 아닌 이 설정 간의 소통 불가능성처럼 느껴진다.

하마구치는 이렇게 야심차지만 어정쩡하게 서로가 맞물려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봉합할 수 있는 결론이자 출구전략으로, 비슷한 상처를 지닌 두 인물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감정의 공명을 통한 회복의 서사를 선택했다. 개인 간의 소통과 다국적의 인물이 만드는 연극의 완성을 엮어 개별자의 상처와 폭력, 역사성, 픽션에 대해 말하는 모더니티까지 통합하겠다는 야심인 것이다. 그래서 원작에서는 중심이었지만 영화에서는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못했던 다카시와 사브900를 뒤늦게 활용한다. 영화의 제목이 되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이동이라는 특성은 그저 이 결말을 위해 마지막에서야 의미 있는 행위로 작동되며, 더럽기도 아름답기도 했던 <아사코>의 강물과는 다른 흰 백색의 홋카이도로 향하는 것으로 소재가 부여받은 역할을 다한다. 그리고 그 흰 백의 감상적 배경 위에 갑자기 이것은 사실 고전적 드라마였다고 고백하듯 파토스를 토해낸다.

이러한 봉합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앞 서 언급한 픽션과 리얼리티를 향한 시선과 결말의 불화이다. 둘째는 첫 번째에 언급한 불화와는 별개로 영화가 건드리고 있는 여러 결의 알레고리들의 과잉과 산만함으로 인해, 회복의 결말에 핵심적 역할이자 가후쿠의 거울이 되는 미사키와의 관계와 감정적 축적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회복의 장소로 이동시켜줄 사브900 또한 특별한 존재감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소설에서는 핵심적인 장치로 활용되는 가후쿠와 미사키의 상처, 가후쿠의 딸과 미사키의 유사성이 다카쓰키나 이유나와 같은 캐릭터들이 지닌 강렬한 존재감에 묻혀 효과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또한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되는 장면들이 모두 이유나, 다카쓰키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장면들 끝에 따라오기에 온전히 가후쿠와 미사키 간의 관계 진전이 아닌 미사키보다 더 중요해져 버린 두 조연이 만든 감흥을 발판삼아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 특히 후쿠시마로 향하는 여정 또한 분명 뜬금없이 느껴지면서도 그나마 따라가게 만드는 것은 다카쓰키의 살인이라는 커다란 사건의 여파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눈밭에서 가후쿠와 미사키가 거울처럼 마주보며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토해내는 장면의 그 과도한 파토스는 두 인물 사이에서 쌓아온 감정과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에필로그에서 마치 <그랜 토리노>(2008)나 <업>(2009)에서처럼 가후쿠가 준 것으로 보이는 사브900을 타고 있는 미사키를 보여주는 부분은 과거와 상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가후쿠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의미는 이해가 가지만 월트의 그랜토리노와 칼의 집과 비교하면 사브900이라는 메타포가 지닌 앙상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결국 상처와 폭력, 역사성, 픽션 모든 것들을 통합하겠다는 야심은 그 야심에서 오는 혼탁함과 불화로 인해 앙상함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야심 차지만 아쉬운

길게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이는 봉합이 아니라 벌어진 상처를 직시하며 끝났던 <아사코>나 <해피 아워>와 다르다고 불평하거나 <드라이브 마이 카>가 아무런 장점 없는 졸작이라 과장하는 투정은 아니다. 하마구치의 앞 선 두 영화 달리 <드라이브 마이 카>는 감독의 영화적 야심으로 가득한 영화이고 그 야심만큼이나 장점도 확실하다는 것은 잘 안다. 오프닝은 서늘하고 기묘한 기운으로 보는 사람을 달아오르게 하며 중반까지는 안정적인 연출 안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과감성이 빛을 발한다. 특히 이유나가 등장하여 수화로 무대 연기를 하는 장면들은 이상하게 감동적이다. 다만 그 야심 때문에 과잉된 에너지는 산만하게 흐트러지며 장점이 될 수 있는 지점들은 영화 전체와 공명하지 못하고 홀로 고립되어 있고 영화 전체의 흐름을 관장하는 핸들링은 아쉽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심 차지만 아쉬운 <드라이브 마이 카>와 달리 소수의 스텝과 독립영화 만들 듯 촬영했다는 <우연과 상상>을 기다리고 있다. 과잉과 산만함보다 단순하고 안정적인 드라이빙을 기대하며 말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