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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문화톡톡] 공정과 상식, 정의라는 숙제- <오징어 게임>, <지옥> 다시 읽기
[안숭범의 문화톡톡] 공정과 상식, 정의라는 숙제- <오징어 게임>, <지옥> 다시 읽기
  • 안숭범(문화평론가)
  • 승인 2022.01.1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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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상식, 정의라는 숙제- <오징어 게임>, <지옥> 다시 읽기

 

대선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흥미로운 건, 유력 후보들이 내세우고 있는 정치적 슬로건의 유사성이다. 대통령 당선 확률이 가장 높은 두 명 중 한 명은 ‘공정’과 ‘상식’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의 라이벌인 다른 후보는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고 있다. 정치적으로 전혀 대별되는 진영의 목소리가 ‘공정’이란 단어에서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상식’과 ‘정의’라는 말이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다른 표현이라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들 질문은 ‘지금 여기’ 한국의 시대정신을 겨냥한다고 믿는다.

공정, 정의, 상식. 나는 2021년 세계인을 사로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과 <지옥>의 스토리가 그 단어를 경유하고 있다고 본다. OTT 순위 집계 사이트인 플릭스패트롤의 TV쇼 부분에서 <지옥(Hellbound)>은 11월 하반기 차트 진입과 동시에 전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그에 앞서 무려 90여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했던 작품은 <오징어 게임(Squid Game)>이었다. 이들은 ‘K-드라마’가 개성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독립적인 브랜드가 되어가고 있음을 어렵잖게 증명했다. 돌이켜보면, <오징어 게임> 속 의문의 서바이벌 무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극단적으로 재구성한다. 직장을 잃고 아내에게 이혼당한 후 사채로 살아가는 기훈(이정재), 증권사에서 일을 하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상우(박해수),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하는 탈북민 새벽(정호연),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차별을 견뎌온 외국인 노동자 알리(트리파티 아누팜) 등은 생존을 위해 타인을 해치워야 하는 무대에 발을 들여놓는다. 자발적 선택에 의해 참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이미 현실에서 다른 생계의 대안을 찾기 어려운 루저들이다. 냉정한 경쟁사회에서 이미 낙오자들이며, 편법과 불법이 아니고서는 반등의 기회를 갖기 어려운 자들이다.

 

<오징어 게임>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포함해 6개의 게임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한국인들이 허물없이 즐기던 어린 시절의 놀이들이다. 동심의 세계에서 놀이의 규칙은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들이 참가한 서바이벌 세계에서는 죽임과 죽음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이 된다. 장난처럼 사람이 죽어 나가는 현장에서 규칙을 의심한다는 것은 차라리 사치다. 평등한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는 믿음 속에 선재하는 폭력의 구조에 순응해야 한다. 그 세계에서는 이의제기없이 죽음을 맞는 이들조차도 규칙의 공정성을 정당화하는 침묵의 도구들이다. 세계 각국에서 초대된 VIP들은 낙오와 배제의 잔혹 게임을 흥미진진한 스포츠처럼 즐긴다. 그렇게 서바이벌 현장의 규칙, 곧 폭력의 구조는 아무에게도 의심되지 않는다.

한국은 다양한 경제 지표를 종합해 볼 때,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보면 꽤 오랜 시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양극화의 길을 걷고 있다. 팬데믹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해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지만,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커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문재인 대통령의 각오는 애초에 장기 프로젝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차기 대선 후보들의 슬로건은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다. 기훈을 비롯한 인물들이 서바이벌 무대를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그와 관련된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나마 동일한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받고 있다는 믿음 안에서 자기 노력을 믿고 싶은 것이다. 게임의 규칙과 구조 속에 이미 극단적인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망각된다. 아니, 당장은 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결과라도 자기 탓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현실을 단박에 역전할 꿈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이 한국 사회의 공정에 대한 예외적 열망을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라면, <지옥>은 상식과 정의가 휘발되어버린 현실을 비추는 디스토피아다. <지옥>에 등장하는 천사는 누군가에게 죽음의 날짜와 시간을 고지하는 존재다. 죽음의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상 처형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순간 앞에서 개인은 변명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천사의 고지가 신적 권위를 갖듯이 지옥의 사자, 곧 집행자들의 정확무오한 시연(처형)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어선 안 된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신의 ‘고지-시연’에 합당한 죄몫을 개인에게 덧씌우는 일뿐이다. 그 ‘덧씌움’은 맹목적인 믿음을 생산하는 신흥종교집단(새진리회)과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대중여론을 호도하는 인터넷 인플루언서(화살촉)에 의해 시스템화된다.

그런데 그 ‘덧씌움’의 과정은 비록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지만, 인간의 인간에 대한 혐오와 적개심을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이 포착한 것처럼 한국 사회는 치열한 경쟁에서 비롯되는 불안, 낙오되지 않아야 한다는 공포감이 팽배해 있다.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피로사회’의 전형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인은 과잉 활동과 과잉 자극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지옥>에 만연한 타인에 대한 혐오와 적개심은 사회구성원 각자가 겪고 있는 불안과 고통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라르는 공동체 안에 위기가 고조될 때, 죄를 전가할 희생양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희생양을 향한 집단폭력은 공동체에게 잠시의 안녕을 보장하고, 그의 죽음은 정당한 것으로 신화화되어 은폐되기 십상이다.

<지옥>의 서사 진행은 두 파트로 나뉜다. 전반부(1화-3화)는 신의 인간을 향한 일방적이고 불가해한 폭력으로부터 발생한 혼란을 다룬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인간은 점차 ‘무기력한 수용’의 길을 걷게 된다. 후반부(4화-6화)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낙인 과정을 ‘신의 뜻’으로 귀착시키는 습관이 사회적 공기가 되어버린 상황을 보여준다. 맹목적 신앙이 견고한 사회적 질서가 된 후, 더 이상 의심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전반부까지는 신이 인간에게 지옥에 대한 상상을 주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후반부의 서사무대는 불합리한 폭력에 순응하게 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지옥을 안기는 사회다.

<지옥>은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에게 지옥행이 고지되는 순간부터 가장 극적인 긴장이 만들어진다. 스스로 지은 죄가 있을 턱이 없는 아이가 처형당해야 한다는 것은, 신의 의도에 대한 해석권을 틀어쥔 새진리회에 큰 위기가 된다. 결국 갓난아이는 생존한다. 그 아이가 살아남은 건 자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부모의 희생때문만이 아니다. 그 기적의 자리엔 상식을 찾고자 했던 인간, 인간 사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의를 묻고자 했던 소수의 이웃이 함께 있었다. 어쩌면 <지옥> 시즌 2는 희생양 메커니즘, 혹은 폭력적 도그마가 마비시킨 상식과 정의를, 인간 스스로 되찾을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다.

<지옥> 중반에 잠깐 등장한 택시기사는 무심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확실히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죠”. 이 대사를 받아 말하면, <오징어 게임>과 <지옥>은 한국인이 한국인을 위해 알아서 해내야 할 일을 정확히 짚어주고 있다. 그 일들은 결국 공정, 상식, 정의라는 단어로 수렴된다. <오징어 게임>과 <지옥>이 연이어 세계적인 흥행을 한 걸 보니, 그 단어가 필요한 곳이 한국 사회 바깥에도 꽤나 많은 것 같다.

 

사진출처: 넷플릭스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대학부설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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