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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살아남은 자의 슬픔, <드라이브 마이 카>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살아남은 자의 슬픔, <드라이브 마이 카>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1.18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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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가 연출한 <드라이브 마이 카>(2021)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원작을 근간으로 해서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내용으로 구성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오토(키리시마 레이카)가 남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에게 자신이 창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토와 가후쿠는 행복한 부부였으나, 딸이 4살 때 폐렴으로 죽은 다음 둘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오토는 배우를 그만두고 몇 년간 공허하게 지내다 어느 날부터 가후쿠와 섹스한 후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해 작가가 되었다. 남편과 합의해 더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오토는 섹스를 통해 아이 대신 이야기를 잉태하고 그것을 통해 아이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해간다. 여기에 더해 오토는 가후쿠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 것으로 아이의 상실에 대처한다.

가후쿠는 오토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지만 모른 척하고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오토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오늘 집에 오면 얘기 좀 나누자”고 하자 가후쿠는 아내와의 관계가 끝날 게 두려워 최대한 늦게 귀가한다. 그 사이, 어두운 거실에서 쓰러진 오토는 지주막하출혈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로부터 2년 후, 가후쿠가 히로시마의 예술 문화극장으로 향할 때, 영화가 시작한 지 40분 만에 타이틀 씬이 나타난다. 원작에는 없지만, 오토가 들려주는 이야기(전생에 고귀한 칠성장어였던 소녀가 짝사랑하는 소년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미스터리 드라마)까지 더해, 영화의 프롤로그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몽환적인 분위기로 흘러간다.

 

가후쿠 또는 바냐 아저씨

오토가 죽은 다음, 가후쿠는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를 연기한다. 47살의 바냐는 자신의 늙은 매제 세레브랴코프가 27살의 젊고 아름다운 엘레나와 재혼하자 격렬한 질투에 사로잡힌다. 미혼인 그는 10년 전, 여동생이 살아있을 때 엘레나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왜 그때 그녀를 사랑하고 청혼하지 않았는지 자책하고 후회한다. 또한 바냐는 세레브랴코프를 천재라고 믿고 자신의 모든 걸 바쳐 후원했으나 뒤늦게 망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낭비한 모든 책임을 세레브랴코프에게 돌리며 격분해서 총을 쏘지만 빗나간다.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에 직면하지 않고 현실을 회피해 온 바냐는 마침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섰으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바냐를 연기하던 가후쿠는 문득 자신이 바냐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가후쿠가 오토의 외도를 알고도 침묵한 이유는 그녀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에 이어 그녀마저 잃어버리는 게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문제를 회피하던 그는 배신한 아내에 대해 해소하지 못한 ‘분노’와 자신이 의도적으로 늦게 집에 가는 바람에 아내가 죽었다는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린다. 가후쿠는 다시는 바냐 연기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젊은 배우 다카스키는 가후쿠의 그림자 같은 인물이다
젊은 배우 다카스키는 가후쿠의 그림자 같은 인물이다

바냐가 가후쿠의 분신 같은 인물이라면, 오토의 섹스파트너였던 젊은 배우 다카스키(오카다 마사키)는 가후쿠의 그림자 같은 인물이다. 다카스키는 오토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통해 분출하다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가후쿠의 자동차와 운전사 미사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 가후쿠의 빨간색 사브900(원작에서는 노란색) 자동차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후쿠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시간에 바냐의 대사를 연습한다. 오토가 바냐의 대사를 제외한 나머지 대사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주었기에, 가후쿠는 오토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에게 사브900은 아내의 죽음을 망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히로시마의 예술 문화극장 담당자가 <바냐 아저씨>의 공연을 위해 계약한 두 달 동안 반드시 운전사를 고용해야 한다는 조건에 가후쿠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 아내와의 내밀한 공간에 타인이 침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살아간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살아간다

23살의 젊은 여성 미사키(미우라 토코)가 가후쿠의 자동차 운전사로 채용된다. 가후쿠가 여느 때처럼 자동차에서 오토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냐의 대사를 할 때, 미사키는 그 소리를 계속 듣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가후쿠가 다카스키와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가후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딸의 죽음과 아내의 외도 등을 털어놓는다. 미사키는 운전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거나 백미러를 통해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기도 한다. 가후쿠와 다카스키가 펼치는 일종의 연극 무대에서 미사키는 관객이 되는 셈이다. 시종일관 쇼트와 역 쇼트로 나뉘어 편집된 이 장면의 결론, “진심으로 타인을 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보아야 한다.”

가후쿠의 딸이 살아있다면 동갑이 되는 미사키는 열악한 환경에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어머니와 불행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홋카이도의 외딴 지역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미사키는 고향을 떠났다. 무작정 서쪽으로 향하던 미사키는 히로시마에서 차가 고장 나자 머물게 되었다. 이유나와 재니스 창이 <바냐 아저씨>의 한 장면을 완전히 몰입해서 리허설 했을 때 가후쿠는 “뭔가가 일어났다”고 했는데, 가후쿠와 다카스키의 대화 가운데 그 뭔가가 미사키에게 전달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므로,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은 13분 동안이나 길게 지속되어야 한다. 미사키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가후쿠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삶으로 돌아오는 여정

다카스키를 호텔 앞에 내려주고 자동차가 출발할 때, 카메라는 점점 멀어져가는 다카스키의 모습을 보여 준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가후쿠는 아내의 죽음으로 정리하지 못했던 것을 그렇게 떠나보내게 된다. 그리고 자동차에서 가후쿠는 처음으로 미사키의 옆자리에 앉는다. 그들은 자동차의 선루프 위로 담배 피우는 손을 동시에 내미는데, 서로에게서 느끼는 공감 또는 구원을 갈구하는 손짓처럼 보인다.

 

히로시마의 바닷가에서, 가후쿠와 미사키는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히로시마의 바닷가에서, 가후쿠와 미사키는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히로시마를 떠나 미사키의 집을 찾아 홋카이도로 향한다. 미사키는 산사태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방치했다고 고백한다. 자동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카메라는 멀어져가는 터널을 반복해서 보여 준다. 아내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삶을 감옥으로 만든 가후쿠와 미사키가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야 할 시간이라는 의미다.

때는 겨울이고 사방은 눈으로 덮여 있다. 가후쿠와 다카스키의 대화에 이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펼쳐진다. 잔해만 남은 옛날 집 앞에서, 미사키는 꽃을 던지며 어머니의 명복을 빈다.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죄책감을 마주할 때, 그녀는 어머니의 잔인하고 기이한 행태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이해한다. 가후쿠는 진실을 회피하고 상처를 받지 않으려다가 오토를 잃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오토의 죽음에 대한 가후쿠의 애도가 시작된 것이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길게 대화하며 깊은 공감을 형성해가는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쇼트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제 두 사람을 지켜보는 관객에게 뭔가가 전달될 시간이다.

이 장면의 마지막에서 가후쿠는 다짐하듯 미사키에게 말한다.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 그래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이 대사는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가 바냐를 위로하는 대사와 연결된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나가요. 길고 긴 낮과 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리는 고통받았다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때 우리는 지금의 불행을 돌아보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편히 쉬게 될 거예요!”

영화에서 소냐의 이 대사는 두 번 반복된다. 오토가 얘기를 나누자고 했던 날, 가후쿠는 자동차에서 오토가 녹음한 목소리를 통해 이 대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오토의 죽음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가후쿠는 그녀와의 관계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 가후쿠에게 소냐의 이 대사는 바냐(그리고 자신)의 공허한 삶을 위로하는 말로 다가왔다. 미사키와의 홋카이도 여행에서 가후쿠가 했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후쿠는 바냐의 비극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따라서 다시 바냐 역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냐 아저씨>의 연극 무대에서 소냐의 대사가 반복될 때, 소냐 역의 배우 이유나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목소리가 아니라 수어(手語)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여러 나라에서 온 배우들이 각자 자신의 언어로 <바냐 아저씨>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언어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바냐와 소냐만 보이는 무대 위에서, 소냐의 대사가 수어로 진행될 때, 영화의 공간에는 침묵이 자리한다. 그런 다음 무대의 조명이 꺼지면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올 때, 연극을 보러 온 미사키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또다시 뭔가가 전달된다.

 

에필로그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를 거쳐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홋카이도의 산사태 현장까지 갔던 미사키는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자신의 죄책감을 끊임없이 일깨우기 위해 산사태로 생긴 뺨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그 상처마저 지워버렸다. 그녀가 ‘가후쿠의 빨간색 사브900’을 타고 이유나의 ‘반려견’을 태우고 새로운 도시(부산?)의 거리를 신나게 달려갈 때,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던 인물들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짐작하게 된다.

아울러 이 영화에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방점은 가후쿠가 아니라 미사키에게 놓여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후쿠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사키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게 어쩌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앞날이 창창한 23살(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MZ 세대)의 젊은이이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영화사조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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