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무진(霧津)을 찾아서
무진(霧津)을 찾아서
  • 윤대녕
  • 승인 2012.05.14 22: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등단 50주년, 다시 읽는 김승옥

김승옥, 한겨레 자료
전남 순천(順天)에 가본 적이 있다. 대학교 입학하던 해(1981년) 여름이었으니,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애초의 목적지는 광주였다.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인 도청 앞과 그 주변 금남로 일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순천행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나는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의 경로를 따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무작정 순천으로 갔다. 왜 그랬던 것일까? 모두가 알다시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무진'(霧津)은 가공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나는 김승옥을 찾아 그곳으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순천은 당연히 서울보다, 그리고 광주보다 더 후텁지근했다. 그 때문에 그 작은 도시는 추상적으로 일그러져 보였다. 시외버스터미널을 빠져나오며 나는 대뜸,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한 대목을 떠올리고 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사람들은 처마 밑의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빨가벗고 기우뚱거리며 그늘 속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읍의 포장된 광장도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햇빛만이 눈부시게 그 광장 위에서 끓고 있었고 그 눈부신 햇살 속에서, 정적 속에서 개 두 마리가 혀를 빼물고 교미를 하고 있었다." -<무진기행> 중에서

곧 주저앉을 듯한 맹렬한 허기를 느끼며 나는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국수로 끼니를 때운 다음 팔마비(八馬碑)가 세워져 있는 거리를 걷다가,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순천만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리고 또 거기까지 햇빛 속을 흐느적거리며 걸어갔다. 순천만은 태고의 풍경처럼 아득히 바다 쪽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그 위를 무성한 갈대가 뒤덮고 있었다. 낡은 나룻배들이 개펄 기슭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방죽에 늘어선 장엇집에선 대낮부터 술에 취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진이 가공의 공간이라고는 하나 나로서는 도무지 순천과 따로 떼어놓기가 어려웠다. <무진기행>의 '안개'와 '바다로 뻗은 긴 방죽'이 그러했고, 중편 <환상수첩>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겨울의 염전 벌판이 또한 그러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폐병 치료를 하러 고향에 내려온 주인공 정우가 그 염전에서 울부짖는 장면을 두고 어찌 다른 지명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순천은 작가 김승옥이 유년기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훗날 '혁명적'이라 불리던 그만의 고유한 감수성을 형성한 고향과 진배없는 곳이 아니던가.

81학번인 나는 선험적인 패배 의식과 부채 의식에 젖어 있었다. 또한 자기 환멸과 환상, 권태와 좌절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하자면 무언가 회복할 극적인 계기나 동기가 필요했다. 순천만에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저녁참에 시내로 돌아온 나는 무턱대고 술집에 들어가 혹시라도 '하인숙' 처럼 <목포의 눈물>을 불러줄 만한 여인을 찾았으나, 그것은 한갓 피골이 상접한 문청(文靑)의 자폐적 객기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청년꼴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를 슬쩍 일별하더니, 늙은 주모는 딴 데로 가보라며 오히려 핀잔했다. 그래도 버티고 앉아 막걸리 몇 되를 받아 마시며, 내가 어쩌자고 이 낯선 도시에 와 있는지 다시 곰곰이 돌아보았다.

문청을 사로잡은 '절대 감성'

고등학교 때 일찌감치 김승옥의 소설에 빠져 있던 나는 1962년(내가 태어난 해)에 그가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올해로 그는 등단 50주년이 되었고, 내 나이도 덩달아 오십이 되었다)했다는 우연한 사실에 주목해 장차 그와 같은 소설가가 되리라는 당치도 않은 꿈을 꾸었다. 그래서 또한 대학에 들어가 김승옥처럼 불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면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겠지만, 나로서는 사실이라고밖에 달리 고백할 도리가 없다. 소설가가 되는 과정에는 이처럼 사소한 동기가 치명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는 그의 문장에 한없이 매료돼 있었고, 또 그같은 문장을 얻기 위해 도마뱀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우리는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 괴롭게 웃었다. 나는 그 여자의 프로필을 훔쳐보았다. 그 여자는 이제 웃음을 그치고 입을 꾹 다물고 그 커다란 눈으로 앞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고 코끝에 땀이 맺혀 있었다. 그 여자는 어린아이처럼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나의 한 손으로 그녀의 한 손을 잡았다. 그 여자는 놀란 듯했다. 나는 얼른 손을 놓았다. 잠시 후에 나는 다시 손을 잡았다. 그 여자는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우리가 잡고 있는 손바닥과 손바닥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무진기행> 중에서

그해 여름 내가 순천에 가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문장들을 실체험하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자정 무렵 술집에서 쫓겨난 나는 여관방에 들어가 곧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녘에 난데없이 누군가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 냉큼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여귀(女鬼)가 내뿜는 안개'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순천은 어쩔 수 없이 내게는 무진(霧津)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1990년 소설가로 등단했다. 그리고 내가 소설가로서 김승옥에게서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몇 년 뒤 저절로 알게 되었다. 첫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에 실린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이 문예지에 발표되고 나서, 어떤 비평가가 사석에서 내게 넌지시 이런 말을 했다. "거듭 읽어봐도 김승옥 선생의 <서울, 1964년 겨울>과 분위기가 너무 흡사하네요. 뭐, 의식적으로 모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그 작품에 빚을 지고 있는 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제풀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뒤늦게나마 '과연 그렇구나'라는 느낌을 나 자신도 지울 수 없었다. <서울, 1964년 겨울>은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4·19혁명의 좌절이 불러온 사회적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의 상실을 그리고 있으며, 동시에 '도시적 삶의 황폐성과 왜곡된 개인주의의 심화' 현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작품을 비교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나,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은 1980년대가 지나고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방향성을 상실한 젊은 세대의 일상을 기록한 소설이다. 이를테면 나는 그때껏 김승옥 문학의 자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음을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1977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인 <서울의 달빛 0章>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신작 소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198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먼지의 방>은 15회 만에 중단(광주사태로 인한 집필 의욕 상실로 자진 중단)되었으며, 이후 그는 돌연 종교에 귀의한다. 그의 절필은 한 시대의 사라짐을 뜻했고, 그만큼 충격적이고 서늘한 여운을 남긴 사건이었다.

최근에 신문 지면을 통해 그의 등단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회가 없어 나는 그 자리에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세례를 받은 후배 작가들이 이 땅에 어찌 나뿐이랴. 모쪼록 속히 건강을 회복해 다시 '무진의 빛나는 세계'로 돌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글•윤대녕 소설가. 1962년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제20회 이상문학상(1996), 제43회 현대문학상(1998) 수상. <은어낚시통신>(1994), <제비를 기르다>(2007) 등 10여 권의 작품집이 있다.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윤대녕
윤대녕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