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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레프트를 기다리며
뉴레프트를 기다리며
  • 이인우
  • 승인 2013.03.11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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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르 디플로’ 읽기

이번호에도 좋은 글이 많다. 그중에서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의 글을 관심 있게 읽고 이 글을 쓴다.

1960년생인 필자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유엔 구호물자로 점심을 때운 경험이 있다. 월남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보내온 TV 수상기를 난생처음 보고 발전된 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서울 달동네에서 살며 육영수 여사가 죽었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고교 시절 반미 시위에 가담했다가 그게 관제데모였다는 걸 알고부터 비판적인 정치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내심 '이제 우리나라도 민주주의 나라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이후 정신적 '성장 또는 굴절'의 과정은 그 시절 대학을 다니며 돌깨나 던진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을 테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확실히 달라지는 것이 있다. 보수화라면 보수화일까? 어떤 점은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식의 아집이 늘고, 어떤 부분은 아주 많이 겸손해진다. 예를 들면 삶 또는 역사에 대한 태도이다.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역사는 강물 같은 거야. 고작 작은 여울 몇 개 건너봤다고 강을 다 아는 체하면 곤란해. 친구야, 우리 겸손해지자.

서구인들은 하느님(God)을 입에 달고 산다. '오 마이 갓! 신께서 너희를 심판하리라!' 우리 동아시아 사람들은 신 대신 하늘(천명)이나 역사를 부르짖는다. 하늘이 보고 있다, 역사가 너희를 심판하리라….

최종 판정자로서 신과 역사는 같은 의미이지만, 신이 초월적 존재인 데 비해 역사는 바로 인간 자신들의 삶의 총화이다. 역사는 시행착오의 집적물이기에 초월자가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그 거울을 자기 또는 자기 시대에 대한 최종 심판자로 삼는다. 언젠가 역사가 판정할 거야라고.

역사 속의 현실은 대체로 정의의 방향으로만 대세가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긴 역사 속의 역사로 보면 인간의 삶은, 진보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것이 역사에서 우리가 얻는 불변의 교훈이다. 때로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가 하면, 사랑으로 가꾼 화원이 번개를 맞아 불타듯이 역사라는 거대한 강물은 전혀 의외의 시간과 공간에서 전혀 의외의 방식으로 새로운 땅을 만들거나 작은 물줄기들로 갈래가 진다. 쓰레기통에 던져진 작은 씨앗 하나가 강의 저 끝에서 더없이 무성한 숲을 이룰 때 우리는 역사 앞에 숙연해진다. 주대환 선생의 표현대로 그것을 우린 '역사의 간지(奸智)'라 불러야 할까, 천명(天命)이라고 해야 할까. 대한민국씨의 출생지가 쓰레기들의 무덤일 수 있고, 출생 또한 정당한 증명서를 요구할 만한 처지가 못 된다고 해서 그것이 그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근거는 되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그 삶의 한 축에 나 자신의 삶도 포함돼 있다면.

솔직히 궤변이란 생각도 한다. 하지만 말하고자 한 취지는, 해석을 바꿀 수 없다면, 변화가 버거워 새로운 비전으로 전환하기 어렵다면, 변화의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세대가 새로운 해석을 이끌게 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주체를 연령·세대와 관계없이 '뉴레프트'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미국이 인디언을 학살했다고 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건국 정신마저 부정했다면 '미국의 진보'는 그 비전을 잃었을 것이다. '평등'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에 역사적 자부심을 공유하면서, 조국 대한민국을 인류 보편의 세계로 이끌 새로운 진보의 등장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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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 editor@ilemonde.com /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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