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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지제크, 그리고 <르 디플로>
촘스키와 지제크, 그리고 <르 디플로>
  • 이인우
  • 승인 2013.08.14 12: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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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 디플로>) 한국판이 5년째 발행을 이어가고 있다. 그사이 몇백 명의 정기독자가 몇천 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몇만 명대 정기독자를 자랑하는 잡지들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한국의 협소한 지적 풍토를 감안하면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수이기도 하다. 비록 속도는 더디더라도 <르 디플로>의 애독자는 앞으로도 꾸준히 늘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신자유주의 담론이 미디어 생태계를 장악한 상황에서 영미 중심의 신자유주의와 패권적 국제질서를 이만큼 정확하고 밀도 있게- 또한 매우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매체를 찾아보기 힘들고, <르 디플로>가 제공하는 정보와 담론을 지적으로 소화해낼 독자층이 최소한 <르 디플로>가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독자 증가에 걸림돌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벽이 독해의 어려움이다. 필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불만이 ‘너무 어렵다’이다. <르 디플로>가 난해하고 생소한 유럽식 글쓰기로 가득 차 있다는 데 동의한다. 번역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본질적인 벽이 그 안에 존재한다. 이 본질적인 벽은 최근 벌어진 언어학자 촘스키와 철학자 지제크 간의 논쟁에서도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노엄 촘스키는 세계적인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명성이 높고, 슬라보이 지제크는 철학에서 대중문화까지 전방위적인 활약을 펼치는 포스트모던 계열의 철학자로, 두 사람 모두 세계 좌파 지성계의 스타다. 영국의 진보적인 신문 <가디언>에 따르면, 논쟁의 초점은 표현 방식의 문제였다. 촘스키는 지제크가 “쉽게 말할 수 있는 걸 어렵게 말한다”는 게 불만이고, 지제크는 촘스키가 “실증을 강조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숱한 실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촘스키가 “지식인으로서 대중 앞에 젠체하지 말자”는 것이라면, 지제크는 지나친 실증주의적 접근은 본질을 간과하거나 왜곡한다고 본다.

<가디언>은 두 사람의 논쟁이 사소한 말다툼이 아니라, 영미권의 경험론과 대륙권의 합리론, 실증주의 대 존재론적 사유 등 지적 전통의 차이에서 오는 대립이며, “이론과 이데올로기, 현실의 관계라는 중요한 주제에 관한 논쟁”이라고 평가했다. 논쟁의 내용보다는 분석이 더 사태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미국이란 우산 속에 영미권의 지적 세례를 압도적으로 받고 있는 한국에서 (유럽) 대륙 계통의 <르 디플로> 읽기의 어려움은 촘스키와 지제크의 논쟁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과연 모든 독자에게 꼭 그렇기만 할까? 필자의 권유로 정기구독을 한 30대 후반의 후배는 “우리 집에서는 칠순의 아버지가 가장 열렬한 애독자”라고 말한다. 그분은 미국 유학파로서 은퇴한 경제 분야 전문가였다.

관점의 차이, 글쓰기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은 다른 문화권에서는 확실히 하나의 장벽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넘지 못할 벽은 아니다. 지적 훈련과 지식의 축적이 더해지면 오히려 본질적인 성찰이 가능해지고 대상을 보는 시야가 확장된다. 벽이 지렛대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르 디플로>를 ‘세계를 보는 창’이라고 격찬한 사람은 대륙 계통의 철학자 지제크가 아니라 영미 계통의 언어학자 촘스키였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키고 싶다.

<르 디플로>가 최근 판매부수 인증기관인 ABC협회에 가입했다. 참고로 지난 6월호 정기 독자 수는 4477명이다(서점에서 구입하는 분들을 포함하면 6000명에 가깝지만). 비록 5천만 인구 중 극히 일부분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지적 열정이 가장 뜨거운 독자들과 함께하고 있음은 우리 제작진 모두의 기쁨이며 긍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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