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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들의 신탁(神託) 사용방식
지구인들의 신탁(神託) 사용방식
  • 에블린 피에예
  • 승인 2014.12.0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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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들의 신탁(神託) 사용방식

 

근대 사회로 접어든 이후 사람들은 미래의 존재를 발견한다. 예전에만 해도 숙명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의 사고를 가둬두고 있었으나, 오늘날 소설가와 전문가들은 서로 미래에 대한 시각을 앞다퉈 내놓으며 이를 공론화시키고 있다.

 

에블린 피에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그렇게 계속하다가는 언젠가 멈춰버릴 것이다.” 1968년 5월 혁명 때 나온 이 농담조의 격언은 굳이 점쟁이가 아니라도 누구든 할 수 있는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멈추느냐를 아는 것이 아닐까? 점괘를 해석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미래에 관한 글들도 부지기수로 쏟아지는데, 소설가들이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전문가들의 미래 예측은 현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일련의 가치 체계와 각자가 원하는 세계의 표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자가 보는 미래의 세상은 끔찍한 악몽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으며, 설령 악몽 같은 상황이라도 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행히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 상황에 대한 예측은 현실을 가로막는 난관이나 모순, 그리고 자신의 이상향 등에 비추어 본 현실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정확히 꿰뚫어보지는 못하더라도 이 여러 가지 예언들은 미래 사회의 관건이 되는 몇 가지 놀라운 부분들을 짚어준다. 긍정적인 덕목의 포괄적인 확대로만 나아가면 그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로 분쟁이 해결될 것이라는 점이다.

포괄적 의미에서 이러한 사고의 틀은 비단 대물림되는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믿는 가치와 스스로 추구하는 목표를 ‘당연한’ 진리로 탈바꿈하려는 이런 저런 말들에 의해 끊임없이 그러한 사고의 틀이 구축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미래와 관련한 영역도 포함된다. 국제 관계 전문가인 아리엘 콜로노모스가 강조한 바와 같이,(1) 미래는 이제 “지식 사회의 국경 없는 거대한 아이디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교환재의 일종”이다. 오늘날 싱크탱크나 금융 평가사의 전문가들은 과거 무녀들이 했던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들을 간파해내는 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국제적인 차원에서 예언을 감행하는데, 예전처럼 자연 현상이나 동물을 통해 점술을 행하는 게 아니라 다소 불투명한 지표와 기준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한다.

앞으로의 전반적인 추이를 예측하는 ‘주요 사안’ 가운데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리스크’ 부문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산하의 미 국가정보위원회(NIC)는 대략 향후 15년을 대상으로 한 시나리오를 구축한다. 특히 그 기반이 되는 것은 ‘아이디어 연구소’라고도 불리는 싱크탱크의 분석이다. 2025년에 대한 보고서(2)에서는 각각 세 페이지마다 리스크의 개념이 등장한다.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들은 안보와 평화, 국방, 테러리즘, 과학 기술 분야, 그리고 특히 이들 각 분야와 미국과의 상관관계에 연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이와 더불어 중국과 인도, 이란의 미래에 대해서도 점괘를 내놓는다. 우려할 만한 주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반면 브라질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교통 분야의 미래라든가 국제법의 미래 같은 건 한결 같이 무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요 사안’들을 다루고 그에 대한 처치법을 제안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꼼꼼한 조사나 순수한 계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싱크탱크 15곳은 미국 워싱턴DC에 있는데, 여기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이다. 그리고 대부분 국가 기관에서 일했거나 현재 근무 중에 있는 사람들이다.(3) 또한 이들 모두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내놓는데, 이 사고의 틀 속에 들어가길 거부하면 보조금을 대주는 재단 측으로부터의 지원이 끊기고 만다. 다양한 길로의 모험을 시도하는 전문가라면 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래는 과거의 재구성에 지나지 않으며, 생각의 합의가 만들어낸 결과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조금도 예측되지 않았으며, ‘아랍의 봄’도 예상 밖의 사태였다. “양쪽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써 초래되는 불확실한 상황의 파생 결과”로 정의될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한 진단과 평가는 ‘비서구권’ 사회가 중단기적으로는 오직 민주주의와 그 이점, 문화 정치적 장애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시장의 활성화밖에 바랄 수 없다는 확신과 은밀히 맞닿아있다. 평화와 번영의 빛나는 내일이 서서히 열릴 것이라는 바람을 바탕으로 이 같은 미래 예측은 미국의 정책을 정당화해주고 이에 수반되는 개념들을 제시한다. 정책 입안자나 언론 기관 등 공적 분야에서 예언을 남발하는 또 다른 주체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미래 진단서는 결국 현재에 대한 집단적 해석과 미래의 의미를 ‘성형’해낸다. 이러한 ‘리스크 시장’은 신용평가사의 지배적인 역할로 극대화된다. 건장한 이들에게는 상을 주고 불성실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려야 한다는 일념 하에 신용 평가를 단행하는 이들 기관이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는 건 바로 ‘안정성’이다. 이에 따라 정치 사회적 갈등은 곧 주요 ‘리스크 요인’으로만 인식되고 만다.

피에르 로장발롱이 이끄는 ‘라 비 데 지데(La Vie des Idées, 사상적 삶)’의 경우는 미국식 싱크탱크와 다르며,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전문가 네트워크’를 표방한다. 이 곳은 웹사이트상에서도 활동하고 잡지도 발간하며 단행본 시리즈도 출간한다. 이 ‘지식인 조합’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공학자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권유했다. 그렇게 해서 제작된 에세이집 <22세기의 세계>(4)는 ‘선(善)’에 대한 저마다의 시각을 보여준다. 그런데 대부분 사회 혁명의 모든 가능성을 외면한다. 갈등도 없고 서로 등을 돌리는 일도 없으며, 모두가 공동선을 위해 같이 손을 잡는다. 이보다 더 민주적일 수 있을까? 마티유 칼람은 길드 같은 과거 조직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다만 농식품 분야에서의 올바른 관행이 정착돼있던 시기로 함께 돌아갈 것을 전제한다. 선과 미덕의 길을 따라가자면 몇 가지 변화가 요구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틀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소설 한 편을 기고한 알렉시 제니는 미래 사회의 노동자를 대략적으로 묘사하고, 경제학자 장 가드레는 소득 격차 상한선의 수립을 제안하며 앞으로는 불평등 문제가 미래 사회의 주요 쟁점으로 자리할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는 “근미래의 유토피아”에서 이러한 상한선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니 이 세상을 구하게 될 것은 바로 ‘(올바른) 미덕’의 가치라는 것이다. 시류를 수정 구슬 삼아 미래를 점치는 SF 작가들도 물론 이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에 따라 초래될 결과와 그로 인해 은닉된 그 모든 것을 파헤친다.

70대라는 게 믿기지 않는 캐나다 여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2013년 <매더덤>을 펴냈다.(5) 2003년 출간된 <인간종말 리포트(Oryx and Crake)>와, 이어 2009년에 나온 <홍수의 해(The Year of the flood)>의 뒤를 이은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그리는 미래상은 종말 이후의 세계이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세상에 종말이 초래된 이유가 바로 “세상을 ‘리셋’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이렇게 리셋된 세계는 성공작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전문 엘리트를 보유한 막강한 업체와 이들의 경찰 조직이 쥐고 있었고, 가장 힘 있는 업체들은 생명과학 분야를 장악하여 “고기를 컴퓨터로 변신시킬 줄 아는” 회사들이었다. 이들은 비실비실한 새끼가 태어나면 주인이 원하는 대로 ‘커스터마이징’ 서비스를 제공하고, 강인한 ‘금속 멘탈’을 공급하며 성적 쾌감을 보장하는 신비의 알약을 만들어낸다. 피임은 물론 젊음의 시간도 지속시켜주고, 유전자 이식으로 동물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거대 기업에 맞서 유전자 변형 바이러스로 무장한 생화학 테러리스트가 들고 일어난다. 반면 화학분야와도 무관하고 소프트웨어 쪽으로도 문외한인 사람들은 성 밖의 ‘평민 구역’에서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날그날 버티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것이다. 생화학 테러리스트와 생명과학자들은 서로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서로 동의한다. 즉, 지구상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전염병을 이용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그리고 새로운 ‘품종’의 인조인간을 만들어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를 대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는 결함이 너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생명체 ‘크래커(Cracker)’는 놀라울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갖고 있다. 시종일관 노래를 부르고 거의 멈추는 법이 없기 때문에 ‘약간’ 피곤한 존재이긴 하나, 탐욕이나 질투심 따위는 애초에 프로그래밍되지 않았고, 동물성 단백질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정신적 측면에 있어서도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그 모든 갈등 자체가 불가능하고, 긍정의 덕목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이들은 ‘자연’ 상태의 인류 대표와 만나게 되는데, 바로 생태주의 집단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다. 과거 ‘재활용’에 집착하던 이 사람들은 ‘신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신께서는 하찮은 미물들도 사랑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던 단계에서 곧바로 ‘살아남기 위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단계로 빠르게 옮겨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덕’이라고 믿던 가치 체계도 약간 손상을 입게 된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자극적이고 대담하다. 애트우드가 그리는 미래상은 기술 자본 권력과 종을 교화시키겠다는 의지가 결합함으로써 초래된 재앙과 더불어 그에 뒤이은 사태 해결 방식을 같이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 해결은 ‘포스트’ 인류의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했는데, 포스트 인류는 성가신 한편 꽤 흥미로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의 작가 윌 맥킨토시는 이보다 더 암울한 소설을 내놓는다.(6) 부분적으로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극심한 실업 문제로 위기에 처하고 범죄가 극에 달한 나라의 모습이 그려진다. 언제 어디에서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일상이 펼쳐지고, 허무감에 빠진 집단이 기승을 부리며, 생태 테러주의자들이 조직되기도 한다. 인류의 상당 부분이 죽어야 하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쁜 본능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생각한 이 테러리스트들은 이를 위해 두 가지 무기를 만들어낸다. 그 모든 유통과 거래를 방해할 유전자주입 대나무와 ‘행복’이라는 분자를 발명해내는 것이다. 이 행복 분자는 모든 인격을 말소시켜 버리는데, 놀랍게도 공격적인 사고는 아예 그 뿌리를 뽑아내 버린다. 좋든 싫든 이 행복 분자는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이로써 ‘이상적인’ 도시가 만들어진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즐겁게 모두의 행복에 기여하는 ‘거대한 사랑의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화학적’ 친절함과 ‘유쾌한’ 순종적 태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세상이 구축된다.

미래 사회에 대한 이 모든 시나리오들은 소프트웨어의 변화를 강하게 부추길 수밖에 없다. 귀찮은 일이라면 딱 질색인 천문물리학자와 고고학자, 고생물학자가 오늘날 심도 있게 추진하고 있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이들은 또 다른 지구를 상상한다.(7) 완전히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완전히 다르지도 않은 지구를 구상한 이들은 생명이 출현하여 지능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을 발전시키며 우리가 하지 않았던 선택에 목소리를 높인다. 즉, 목가적 삶을 추앙하는 것이다. 이는 깊이 생각하고 사랑하며 전쟁 없이 살아가기에 더 없이 적절한 삶의 형태이다. 엉뚱한 가설이 제기되고, 알코올성 박테리아는 에탄올을 소화시켜 엄청난 양의 전자를 만들어내며 이로부터 나노섬유 전기 네트워크를 매개로 또 다른 박테리아를 탄생시킨다. 그리하여 극도의 압력과 극한의 온도, 방사선에 견딜 수 있는 ‘완보류’(초소형 무척추동물로, 극한 환경에 처하면 휴면 상태에 들어감-역주)를 창조해낸다. 이렇게 화려한 연구 영역이 열리고 나면 이들이 장차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이 과학 판타지를 써내려간 건 소설가 피에르 보르다주이다. 알베르 아인슈타인의 말마따나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쓸데없는 예언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 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등이 있다.

 

(1) 아리엘 콜로노모스, <신탁의 정치: 미래에 대한 현재의 논란>, Albin Michel, ‘생각의 도서관’ 컬렉션, Paris, 2014년

(2) N.I.C – C.I.A., Global Trends 2025: 인터넷에서 검색 가능

(3) 아리엘 콜로모노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작성한 ‘워싱턴의 전문가 및 권력 관계도’ 참고

(4) 알렉시 제니 외, <22세기의 세계(Le Monde au XXIIe siècle): 근미래의 유토피아>, PUF - ‘사상적 삶’ 컬렉션, Paris, 2014년

(5) 마거릿 애트우드, <매더덤(MaddAdam)>, Robert Laffont, Paris, 2014년

(6) 윌 맥킨토시, <달콤한 최후>, Fleuve Editions, Paris, 2014년

(7) 피에르 보르다주, 장폴 드물, 롤랑 르우크, 장세바스티앙 스테예 등, <우아한 지구>, Odile Jacob, Paris,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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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 피에예
에블린 피에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