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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영원한 ‘갑을’ 관계는 없다.
[기자수첩] 영원한 ‘갑을’ 관계는 없다.
  • 황현주 기자
  • 승인 2015.01.23 1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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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곳적부터 무리가 결성되면서 자연스럽게 계급이라는 것이 생성됐다. 계급은 ‘무질서’를 ‘질서’로 바꿔주었고, ‘공경’과 ‘존경’하는 마음을 심어주었다. 질서가 정립되면서 무리는 결속력을 다졌고, 부락을 나라로 탈바꿈시켜주었다.

고대 국가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공통된 사실이 있다. 바로 갑과 을이라는 위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월나라 구천과 오나라 부차는 역사 속에서 갑을관계였다. 월나라가 오나라에 무너지면서 월나라 구천은 오나라 부차의 마차지기를 자처하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을의 신분이었다. 그는 월나라의 영광을 다시 되찾고 말겠다는 일념 하에 책사 범려와 모의해 중국 4대 미녀로 추앙받은 서시를 부차의 후궁으로 천거했다. 그 결과, 주색으로 망가진 부차는 구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을의 처지로 전락했고, 구천은 을에서 갑으로 재탄생하며 지난 날 치욕을 씻어 내리는데 성공했다.

신라 말기 탄생된 후고구려의 궁예는 일개 승려에 불과했다. 궁예는 신라 경문왕의 서자로, 원래는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어머니가 해상왕으로 불린 장보고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중앙귀족들에게 배척당했다. 태어나자마자 승려로써 삶을 살다가 유모에게 자신이 신라의 왕자라는 사실을 접하고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면서 세력을 모았다.

그는 고려 창건왕 왕건을 수하로 둘 만큼 명망이 높은 갑의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갑의 위치는 오래가지 못 했다. 수하장수 왕건의 인물됨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애초부터 느껴왔던 왕건은 그를 비롯한 무리들을 심하게 의심했고, 급기야 왕건의 목숨까지 노렸다. 갑인 궁예로부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을 왕건은 갑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반란을 꾀했고, 그의 반란이 성공함에 따라 왕건은 을의 신분에서 벗어나 마침내 슈퍼갑으로 탈바꿈했다. 한 때 슈퍼갑이었던 궁예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따라온 왕건에게 목숨을 구걸할 만큼 슈퍼을로 전락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조선통신사를 제안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한 때 ‘슈퍼을’에 위치해 있었던 인물들이다. 도요토미는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자 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그는 아침이면 화장실 청소를 했고, 오다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신발을 체온으로 데워주는 미천한 일을 했다. 오다가 전시에 살해당하자 도요토미는 전국 시대를 평정하면서 권세를 잡았다. 그러나 그 역시 말년은 슈퍼갑으로써 최후를 마치지 못했다. 가신이었던 도쿠가와에게 자신의 아들 히데요리의 목숨을 구걸해야 할 처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7여년 동안 계속되면서 전쟁의 불만을 토로하는 반전(反戰)세력들이 늘어났고, 그 반전 세력 속에는 도쿠가와가 포함돼 있었다.

도요토미가 아들 히데요리의 안위를 보장하는 혈서를 써달라 도쿠가와에게 부탁하는 순간 슈퍼갑이었던 도요토미는 도쿠가와의 슈퍼을로 전락했다. 그리고 도쿠가와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했고, 도쿠가와는 마침내 숙원하던 슈퍼갑의 위치에 섰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갑질이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여파는 상당하다. 현재까지도 국민들은 조 전 부사장의 행동 하나하나 면밀히 예의주시하고 있다. 심지어 재판 과정에서 턱을 괴고 앉아 있다는 사실이 전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조 전 부사장과 대한항공을 비난하고 나섰다.

개인적으로 조 전 부사장이 안타깝다. 처음에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분노하고, 그를 힐난했지만, 차차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가 자기 자신만을 알고 모든 것들이 본인 위주로 돌아간다는 오만과 자만이 뒤를 돌아보지 못 하게 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가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보고 그것에 대한 성찰을 했다면 ‘땅콩회항’같은 단어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는 “언젠가 나도 ‘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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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주 기자
황현주 기자 journalist7@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