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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10) 무관심] 절멸의 방향성을 극복하는 법, 또는 대양적 감성을 회복하는 길
[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10) 무관심] 절멸의 방향성을 극복하는 법, 또는 대양적 감성을 회복하는 길
  • 김서영 l 광운대 교수, 정신분석학
  • 승인 2015.07.0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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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더 비워야 할까>, 2009 - 안미경

프로이트는 <문명과 그 불만>에서 나와 남의 경계가 없고 내부와 외부의 갈림이 존재하지 않는 신화적 상태를 ‘대양적 감성’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이가 아직 어머니의 몸과 자신의 몸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 또는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몸과 마음의 연장으로서 거대한 연합체를 이루는 걸 뜻한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가 외부와 내부라는 공간으로 나누어질 때 발생한다. 세포막이 터지면 생명이 사그라지는 단세포 생물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세포 생물에서도 내부를 보호하는 일은 생명을 사수하는 사명과 동일한 과제로 인식된다. 난제는 그러한 구분과 방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외부의 대상들, 또는 남이라고 부르는 이질적 얼룩을 지워내기만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구분과 분리는 오히려 생명을 절멸로 이끄는 고립을 초래할 뿐이며, 이로부터 벗어나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남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두었던 타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사실 우리는 평생 내부를 내부로 만드는 외연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며 살게 되는데, 예를 들어 내 몸은 내 가족, 내 새끼로 연장되어 서로 다른 개체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내부를 이루게 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도 역시 개인은 다시 내 가족, 내 자식까지 넓혀진 외연으로 나와 남을 분리한 후 내부에 해당되는 요소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인다.

 

타자라는 얼룩을 아우르는 대양적 감성

그러나 우리는 최근의 메르스 사태를 통해 그렇게 정의된 삶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남이라는 얼룩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구분과 분리가 중심이 된 예전의 방식으로는 온전히 내부를 보호할 수 없었다. 이웃의 아픔은 그들 자신의 몫만이 아니었으며, 아무 상관없던 남의 일이 내 일로 다가왔다. 내부만 온전히 지속된다면 그까짓 것 대충 덮고 지나갔던 일들, 겉만 번지르르하게 치장하여 적당히 넘어간 외부의 세부들이 어느 틈엔가 내부의 중심에서 진한 얼룩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식과 기만으로 감추고 속이며 오늘도 또 대충 수습하고 넘어가던 일들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내부를 향해 그 화살을 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부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정부, 치밀한 분석과 계획이 부재하는 구조, 사전 준비 없는 사태에 직면하여 골든타임을 또다시 놓치고 잘못된 세부와 판단을 쏟아내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손 치며 대충 넘어갔던 일들은 그렇게 다시 현재의 중심으로 되돌아 왔다.

칼 구스타프 융은 ‘우리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콤플렉스가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콤플렉스를 잊을 수 있지만, 우리의 콤플렉스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적인 언어로 변용해 보면, 우리는 무의식을 잊을 수 있지만, 무의식은 우리를 잊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대충 넘어갔던 일들과 모든 허술한 세부들을 잊고 살아가지만, 그렇게 외부에 허술히 던져진 세부들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순간 우리의 현실 중심으로 파고들어 거짓 평화를 산산조각내고야 만다. 슬라보예 지젝은 상징계로부터 배제되었던 실재의 얼룩들이 현실로 되돌아오는 다양한 사례들을 신자유주의 시대의 파국적 재난들을 사례로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사실 정신분석학이란 주먹구구식 계산들과 눈가림에 의해 초래된 개인적 파국의 역사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배려 없이 넘어 갔던 과거의 세부와 관심을 받지 못한 현재의 서사들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잊고 있는 남겨진 이야기는 어떻게든 그 못 다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간의 길을 타고 우리에게 되돌아와 그 얼룩을 드러내고야 만다. 여기서 얼룩을 감싸 안는 유일한 방법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남이라는 불편한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며 대양적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부정>에서 우리가 내부에서 어떻게 외부의 대상을 재발견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외부를 내부로 이끄는 마술 주문은 ‘연상’이다. 그것은 외부로 정의된 대상이 내부로 돌아오는 길이며 남과 연결된 몸을 기억해내는 방법으로서, 정신분석 치료의 기본 기법이기도 하다. 아무리 내부에 속하지 않는 외적 대상이라 우겨도, 결국 증상이라는 몸의 언어는 그것이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기억되어 있었던 한 부분임을 증명해 낸다. 관심 밖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남이 도려낼 수 없는 ‘내 마음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순간, 프로이트의 말 대로 ‘행동의 길이 열린다.’ 증상에 발이 묶여 있던 사람이 그 족쇄를 풀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부정은 타자가 내 안으로 되돌아오는 방식이자 이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한 마디로 자아가 그 외연을 넓혀가는 발걸음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사실 무의식은 부정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말로써 외부에 대한 진정한 부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개진한다. 즉 ‘나는 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인간 정신의 전개 과정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억지주장이라는 뜻이다.

 

나 자신으로 돌아온 타자, 그 부정의 미학을 위하여

자크 라캉의 <에크리>의 부록에는 장 이폴리트가 프로이트의 <부정>에 대해 언급한 짧은 글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폴리트는 헤겔의 철학을 차용하여 부정 개념을 재해석한다. 그는 부정 개념이 그 자체에서 논의가 종결되어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 지양과 연결되어야만 한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그는 프로이트가 <부정>에서 부정을 “억압의 지양(Aufhebung)”으로 정의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억압이란 내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표상이 마치 외부와 같이 간주되어 내적 요소로부터 배제되는 상황을 뜻하는데, 이 상태에서 부정은 외적 이물질이 내부의 요소로서 드러날 때 도래하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폴리트는 이를 ‘부정의 부정’이라는 헤겔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프로이트가 비록 헤겔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정>이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운동, 즉 하나의 대극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의 대극 내부에서 찾아져야만 한다는 헤겔적 통찰을 제시하게 된다고 확신한다. 내부와 외부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의는 타자가 외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기자체 내에 간직된 내부의 대상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폴리트는 긍정이 단순한 수용을 의미하는 반면 부정에는 파괴에 대한 소원 이상의 의미가 연동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삶 충동과 대립된 죽음 충동이 단순히 파괴로의 절멸성만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듯, 부정 역시 긍정을 아우르는 더욱 심오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폴리트에 의하면 <부정>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심 주제는 자아에 이질적인 것으로 인지된 부분이 애초에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이며, 부정에는 이와 같이 대상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 즉 반성의 긍정적 과정이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프로이트 역시 자아가 무의식적 요소를 인식할 때 그것은 언제나 부정적 형태로 표현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부정이란 내면과 외면의 소통을 통해 고양된 차원으로 성장해 나아가기 위한 정신분석의 기본적 반성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자아심리학을 구분한다. 그는 자아의 통제와 조절을 강조하는 자아심리학이 결코 현실의 모순과 변수에 용기 있게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진정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만이 기존의 태도, 관습, 일상의 반복을 무너뜨리고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 정신분석학에서 현실의 모순은 개인을 한 차원 높은 경지로 고양시키는 요소이며, 그런 면에서 부정은 곧 긍정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외부와 내부가 연결되는 뫼비우스의 띠, 상징계의 외부이자 내부로 정의되는 실재, 존재하지 않으나 동시에 존재하는 욕망의 원인대상에 대한 모호한 말들은 모두 부정을 통한 자기로의 복귀를 요청하는 정신분석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자관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조언과 다름없다.

정신분석은 모든 고정된 것들에 반대한다. 프로이트를 처음 찾았던 환자들은 자신에 대한 고정된 정의에 의해 결국 외부의 대상을 내부에서 재발견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미지로 포장된 현재를 무너뜨리고 또 다른 서사를 창조하며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치유의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했다. 의식의 거짓말을 통해 괜찮은 척, 아무 일 없는 척, 진정 행복한 척하며 견디는 시간은 결국 더욱 피폐한 정신과 몸이 증상을 통해 울부짖는 파국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되는데, 이는 비단 한 사람의 서사뿐 아니라 사회 일반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쉬쉬하며 은밀히 덮으려는 모든 시도들은 반드시 그 썩은 내를 드러내게 된다. 메르스 사태에서 대중을 분노하게 만든 여러 사건들 역시 이자관계적인 폐쇄적 구조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잘못으로 볼 수 있다. 이자관계란 이미지에 포획된 상상계적 구조로서 개인은 그 속에서 자아와 이상적 자아를 이어주는 허상 속에 살게 된다. 이자관계 속 이미지는 정신분석적 주체의 반대개념이다. 물론 그것은 반성의 결과로 다시 외연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이를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상상계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순간 그 자체를 뜻하는 필수적 단계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체가 포획되는 이자관계란 아직 반성의 차원으로 진입하지 않은 지극히 저차원적인 단계이며 이 상태에서 개인은 자신의 진리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획득하지 못하게 된다.

 

이미지에 살고 이미지에 죽는 사람들, 그들의 이자관계를 찢어발기며

라캉은 이폴리트의 <부정>에 대한 주석을 소개하며, 자아의 건강한 부분을 강화한다는 자아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설명한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를 분석하고 대면하기보다는 그러한 문제를 외면하고 가려 덮는다는 면에서 마음이 병든 사람을 돕는 길이 아니다. 익숙한 습관과 일상의 반복을 포기하며 현재의 모순을 대면하고 이에 대처하는 용기는 자아의 허상을 깨뜨릴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라캉은 언어가 포기되는 지점에서 폭력이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말해야 하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상황, 치밀히 대비해야 하는 것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상황,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망각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대충 때우고 넘어가는 모든 일들은 반드시 폭력적으로 우리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세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언제나 구차하고 번거롭다. 그러나 그 구차함을 포기하는 순간 현실은 그렇게 놓친 세부들의 얼룩으로 채워지게 된다. 이자관계는 구차함이나 번거로움이 없는 차원으로서 번지르르한 표면 하나면 충분한 영역이다.

프로이트는 더욱 극적인 기법인 최면과 암시 대신 자유연상이라는 구차한 기법으로 돌아섰는데, 바로 그 구차함이 정신분석의 치유적 방향성을 구성하는 기반이다. 극적이지 않은 구차함, 우리는 그것을 ‘관심’과 ‘배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요소들은 이자관계가 찢어지며 개인이 삼자관계로 진입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데, 정신분석에서 이 과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이라고도 설명된다. 라캉의 언어 속에서는 상징계의 축에 의해 상상계가 깨지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치유되는 과정은 매우 구차하고 번거롭고 피곤한 배려들로 가득 차 있다. 내면에 대한 관찰과 분석, 외적 요소에 대한 내적 포용, 반성을 통한 내부로의 복귀 모두 별 것 아닌 세부들의 분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세부들을 간과한다면, 잊힌 채 상징계 밖으로 밀려난 세부들은 언젠가 우리가 사수해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얼룩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환자들은 이러한 히스테리적 비참의 상태에서 정신분석을 찾았던 이들이다. 증상으로 드러난 현실의 얼룩에 직면하여 프로이트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정신분석의 목표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히스테리적 비참을 ‘일상의 불행’ 정도로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일상의 불행이란,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상태로서, 그것은 감당할 만한 불운을 뜻하며, 하나의 사건을 히스테리적 비참에서 일상의 불행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절멸의 방향성으로부터 삶의 방향성으로 인생의 축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3년 라캉은 자신들이 하녀로 일하던 주인 모녀를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한 파팽 자매의 사례를 분석하며, 이 사건에서 자매는 그들이 갇힌 폐쇄적 공간을 벗어나기 위한 분리의 시술을 감행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프로이트 또한 슈레버의 정신병 사례를 분석할 때, 그의 편집증은 폐허가 되어 버린 정신 속에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환자의 절박한 시도였다고 말한다. 즉 증상은 정신적 재난에 직면하여 환자가 다급히 조달한 미흡한 대책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증상이라는 대책에서 결과적으로 절멸의 방향성과 삶의 방향성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방향성을 관찰할 수 있다. 전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 자신 모두를 파국으로 이끄는 방향성인 반면, 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타자를 내부로 동화하는 긍정적 방향성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의 분석에서부터 절멸의 방향성을 면밀히 관찰해 왔다. 여기에는 죄책감에 의한 자해나 성공에 대한 무의식적 방해 등과 관련된 사례들도 포함된다. 어떻게든 나 자신을 파괴하겠다는 의지, 모든 삶의 요소들을 해체하고 분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에로스는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하게 된다. 정신병이라는 대재난에 이르러서조차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가 있다면 신경증의 구조 속에서도 정신병에서 나타나는 파국과 유사한 방식으로 절멸과 소멸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한 지점에서 절멸의 방향성을 경험한다. 뭐가 바뀌겠냐는 생각, 뭐 그리 대단히 새로운 일이 생기겠냐는 회의, 뜯어내고, 분리하고, 가르고, 편 나누는 모든 행위들, 즉 에로스에서 비롯된 연대와 배려에 반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절멸의 방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외연이 넓어지는 것에 반대하는 모든 판단들, 다른 사람에게 초래될 부정적 결과를 살피지 않는 모든 행위들, 미래를 현재에 당겨 그 세부를 고민하지 않는 모든 무심함이 포함된다. 절멸의 방향성에는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용기와, 꿈과 목표를 위해 현재를 견뎌내는 인내와, 미래를 예견하는 전문가적 치밀함이 결여되어 있다. 뒷걸음질 치는 방향성 속에서, 막막함을 견디며 미지의 순간을 향해 진일보할 힘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멸의 방향성을 선택하는 이들은 재난 속에서 아무 일이 없는 듯 연기하며 그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그들은 움직임에 느리고, 새로운 정보에 관심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변화하는 것으로서,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과 피해가 돌아가는 명백한 근접 미래의 광경 앞에서도 온 힘을 다해 두 눈을 감아 버린다. 그들은 치밀한 분석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심지어 아주 쉬운 받아쓰기에서조차 만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절멸의 방향성 대 삶의 방향성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이를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이라는 두 개의 기본 축으로 설명하고 있다. 삶 충동이 사물과 사람의 연대를 기획한다면, 죽음 충동은 기존의 연대를 끊어내고 무로 돌아가고자 한다. 프로이트 자신이 훗날 죽음 충동을 공격 충동이나 파괴성과 동일하게 언급하기도 했으며 분명 일반적으로 죽음 충동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석되는 경향도 있지만,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다시 읽어보면 우리는 죽음 충동에 대한 또 다른 서술들을 관찰하게 된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불멸을 꿈꾸는 세포, 즉 영원히 죽지 않으려는 삶의 결정체가 결국 암세포이듯, 죽음 충동 역시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한 충동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는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을 사랑과 증오라는 짝패로 설명하기도 했으며, 죽음 충동이 반복강박과 쾌락원칙에 관련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책에서 프로이트는 결국 쾌락원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에 대한 헤겔적 해석 방식으로 이를 다시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즉, 모든 것을 분해하고 해체하는 죽음 충동과 그 반대 특성을 지닌 삶 충동에 대해 그 상반된 계기들을 통일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라캉이 재해석하는 죽음 충동이다. 그는 모든 충동은 죽음 충동이며, 인간의 시작점에서부터 몸에 새겨진 반복 강박은 그 집요한 고집과 지속으로써 삶을 지탱한다고 말한다. 즉 에로스가 삶을 위해 전진하며 죽음을 향하는 요소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죽음 충동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걸고’, ‘죽음을 불사하고’라는 표현은 잘 알려진, 진정한 삶을 위한 결의가 아니었던가? 구차한 세부를 챙기며, 이길 것 같지 않은 싸움을 싸워 내 기어이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멸의 방향성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욱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절멸의 방향과 삶의 방향의 대립에서 삶이 이길 수 있다. 그런 힘을 가진 이들을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의 세상을 위하여

전문가란 자신의 장단을 찾고 그 장단에 맞추어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이를 뜻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지겨워할 정도로 같은 일 또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모든 구차하고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세부들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이며 느린 걸음으로 기약 없는 외로운 싸움을 끝내 견뎌내는 사람이다. 최근 발표된 미국 식품의약국의 트랜스지방 퇴출 결정 뒤에는 60년간 외로운 싸움을 지속해 온 프레드 커머로우 일리노이대 교수가 존재한다. 장인이나 달인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이웃들 역시 전문가의 대열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미흡한 세부를 가려 덮어 대충 넘어가거나 표면만 그럴 듯하게 꾸며 아무 일 없는 듯 현재의 문제를 밀어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미래에 어떤 결과로 세상 사람들과 만나게 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남의 시선 안에 갇히거나 내 안에 묻혀 있지 않은 이들, 즉 이자관계에서 벗어난 성숙한 개인은 모두 전문가로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이다. 그들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며 세상의 틈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문가로 성장할 것이다. 이들은 무관심이 만들어낸 재난에 임하여 절멸의 방향성을 띈 이들 사이에 나타나 세상에 삶의 방향성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영웅들이다.

우리가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서일 것이다. 부모는 아이가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고 통제와 조절로써 관리하는 경우, 그것은 아이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으로 그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지름길이다. 그러한 교육 체계 속에서 아이의 방향이 정향될 때 그는 결코 자신의 외연을 넓혀 세상과 소통하는 온전한 한 사람의 전문가로 성장할 수 없다. 삶의 모든 요소들이 통제되고 욕망에서조차 개입당한 아이들의 인생은 질투와 콤플렉스, 원망과 후회, 죄책감과 증오심으로 채워질 것이다. 개입하고 통제하고 조절하는 이자관계가 파괴될 때 아이는 비로소 숨 쉴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폐쇄적 구조가 열리고 그간 가려 덮었던 모순들이 투명하게 드러날 때 아이가 마침내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 스스로 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냥 그걸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면 된다. 그렇게 전문가가 되는 길을 걸어 나가도록 지지해주면 된다.

정신분석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연구하는 실천적 학문이다. 물론 그것은 개인의 이야기이고 한 사람의 고통을 살피는 치유 학문이지만, 사실 모든 치유 서사의 결말은 언제나 외부로 밀려난 사물을 다시 내 안으로 통합하여 대양적 감성을 회복해 내는 길로 이어진다. 그것은 세상에 삶의 방향성을 불어넣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이 시작되는 지점은 구차함과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해, 언젠가 남겨진 세상의 세부에 마음과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글·김서영

영국 셰필드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심리치료연구센터에서 정신분석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운대 교양학부에 재직중이다. 저서에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프로이트의 환자들: 정신분석을 낳은 150가지 사례 이야기>, <내 무의식의 방: 프로이트와 융으로 분석한 100가지 꿈 이야기>, <프로이트의「꿈의 해석」: 무의식에 비친 나를 찾아서>가 있으며 역서에 <라캉 읽기>, <에크리 읽기>, <시차적 관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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