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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루를 쥔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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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세화 | 한국판 편집인
  • 승인 2009.10.06 11:36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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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르 디플로’ 한국판 창간 1주년에 붙여

▲ 홍세화 ‘르 디플로’ 한국판 편집인
 “많은 사상들이 현실 세계에 조금씩 흠집을 내지만 벽을 넘어뜨리지는 못하고 있다.” <르 디플로> 프랑스판 발행인 세르주 알리미가 이번 호에서 독자에게 적극적으로 구독 확장에 동참해주기를 호소하면서 쓴 글에 담긴 말이다. 전세계 73개 나라에서 200만 부 이상 발행된다는 점을 말하지 않더라도 프랑스 국내에서만 20만 부 가까이 판매되는 <르 디플로>의 발행인이 자못 비장하게 구독 참여를 호소할 때, 한국판 편집인으로서 그 ‘10분의 1’이라는, 소박하기보다는 거대한 꿈을 가진 나는 세르주 알리미의 말을 뒤집은 격언을 말하고 싶다.

“잡초를 없앨 수는 없으나 뽑을 수는 있다.”

이 오래된 격언은 자본주의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순치시켜 조금이라도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만들 수는 있다고. 알리미의 호소와 내 꿈 사이, 거기에 프랑스와 한국의 자본주의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단순화의 잘못일까?

“유럽 ‘Go! Right’” 최근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우파가 승리해 메르켈 총리의 보수연정이 결정된 날, <조선일보>가 1면 머리기사로 뽑은 제목이다. 그들의 우파와 한국의 우파를 동일시하는 암묵적 시도가 담긴 제목 뽑기일 테지만 유럽의 우파와 한국의 우파가 다른 점은, 유럽과 한국의 자본주의의 관철 형태가 다르다는 점에서나 또는 최근 대학생 여론조사에서 다시금 확인되었듯이 가장 신뢰하지 않는 신문 ‘조·중·동’이 가장 신뢰받은 <한겨레> <경향신문>을 제치고 한국 사회에서 누리는 영향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거친 구분이지만 20 대 80으로 양극화된 사회.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사회에서 ‘20’이 ‘80’을 지배하는 모순을 낳는 것을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80’에 속하는 사람의 자기배반, ‘80’의 분열(가령 노-노 갈등, 비정규직제도는 부수적으로 이 효과를 얻는다), 적극적인 ‘20’에 비해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한 ‘80’(가령 “난 정치에 관심 없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88만원 세대’), 그리고 특히 오늘의 나의 처지가 아닌, 장래에 되리라고 기대하는 모습에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가령 오늘은 세입자이지만 미래엔 집주인이 될 것이므로 용산 참사는 나랑 상관없다) 등이다. 모두 의식의 문제인 것이다. 지배세력이 피지배 대중에게도 투표권을 준 것은 대중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일 수 있다. 제도 교육과 미디어가 그 강력한 수단이라는 점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 의식투쟁과 사상전쟁은 오래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20 대 80의 양극화 해소가 정치인의 손에 달린 게 아니라 성숙된 시민의식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진전에 달려 있듯이, 자본주의에 인간의 얼굴을 갖도록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아무리 그악스런 자본도 노동자가 생산을 멈추면 멈출 수밖에 없으며, 설령 생산된다 하더라도 소비자가 소비를 멈추면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20 대 80의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의 진전에 있다는 점에서나, 노동자와 소비자의 힘으로 자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나, 원론적으로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발적 복종과 참된 자유의 사이 어디쯤에 있을까? 그래도 유럽 사회가 자유 쪽에 조금이라도 다가서 있다면, 우리는 복종 쪽에 너무 가까이 있는 게 아닐까? <르 디플로> 한국판 재창간 1주년을 맞아 우리에게 남겨진 의식투쟁, 사상전쟁의 영역과 범위가 방대하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한다.

선배나 책을 ‘잘못’ 만난 사람들, 그래서 동창생을 만나도 나눌 말이 별로 없는 사람들, 남들이 돈 벌어 편함을 사려고 할 때 돈 내고 불편함을 사는 소수의 사람들, <르 디플로>의 독자분께 가슴에서 우러나는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한다.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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