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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적 아버지를 죽이고 빈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상상적 아버지를 죽이고 빈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 김석
  • 승인 2015.08.3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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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 마지막회: 권력
▲ <생각에 잠긴 남자>, 2010-펠릭스 웨이놀드

 지난 6월 25일 국민들은 한국 정치사에서 두고두고 가십처럼 회자될 한 장면을 보게 된다.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정부 시행령 개정안을 합의로 통과시킨 정치권을 힐난하면서 여당 지도부를 꼭 짚어 자기를 위한 정치를 하지 말라고 비판한 것이다. 덧붙여 그러한 정치는 자신의 정치적 득실만을 따지는 배신의 정치라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은 자신도 합의된 시행령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테니 국민도 선거에서 이런 행동을 심판 해달라고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통령이 집권여당 원내대표를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발언내용보다 대통령의 화난 표정과 싸늘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이른바 ‘대통령의 격노 발언’ 이후 7월 8일 대통령에게 찍힌(?) 당사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1조 1항을 언급하면서 사퇴했다. 의원들이 뽑은 원내대표가 대통령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물러난 후 모처럼 열린 여당‧정부‧청와대 회동에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정-청 일체화와 유기적 협조를 강조하며 바짝 몸을 숙이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폭세계 닮은 권력집단
 
7월 내내 정치권을 달구었던 이른바 ‘유승민 파동’은 우리 사회에서 권력이 어떻게 인식되고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의 심리가 무엇인지 보여준 극적 사건이다. 일부 신문이 분석했듯이 마치 조폭세계에서 보스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구성원을 배신자로 지목하면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를 응징하는 장면이 현실 정치에서도 똑같이 재현된 것이다. 5년마다 대통령을 선거로 바꾸고 삼권분립이 헌법으로 보장된 민주국가에서 행정부 수반이 대의기구인 국회의 정치 행위를 하극상처럼 단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이 국회와 갈등하는 현상은 미국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하지만 이번처럼 법률수정안 발의 자체를 불경한 것처럼 간주하면서 거부권을 행사하고, 정치권은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죄인처럼 엎드려 사죄하는 모습은 봉건시대에나 가능한 다소 초현실적인 모습이다. 실제 국민여론은 대통령의 독선적이고 제왕적인 태도에 비판적이었고 물러난 원내대표를 동정했지만, 정치인들과 행정 관료들은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절대 안 된다는 듯 일사분란하게 대통령을 따랐다. 그리고 대중은 호기심 가득하게 사태를 지켜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복귀했다. 정치가 마치 내 삶과 관계된 일이 아니라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말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한국 정치의 모습이다. 보통 북한 수령제의 권위주의적이고 잔혹한 1인 통치형태를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한심한 독재체제로 비난하지만 우리 국민의 정서에도 합리성보다는 감성에 순응하고 정치지도자를 특권적 존재로 바라보는 권위주의 순응 정서가 가득 깔려있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이나 정치지도자를 자주 욕하지만 그것이 유권자의 비판적 태도이기보다는 관전을 하는 구경꾼의 평인 경우가 많다. 온갖 악재에도 지역구도나 세대 간 투표양태가 깨지지 않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을 법제도의 산물이 아니라 마치 아이를 보호하고 처벌하는 아버지처럼 인격화하면서 기대는 심리를 갖고 있다. 정치권력은 본래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법을 통해 공동체를 보존하는 이중적 모순을(1) 내포하고 있기에 구조적으로 갈등이 내재할 수밖에 없지만 한국인들은 정치적 갈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권력자의 우위를 선뜻 인정하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정신분석 관점에서 분석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권력 분석 준거는 아버지의 자리와 연관
 
권력의 기원‧본질‧기능‧정당성에 대해 사회계약론 같은 분야의 학문적 논의가 적잖게 있었지만 정신분석 관점에서 권력 분석의 준거는 언제나 ‘아버지의 자리’와 연관이 있다. 사회학에서는 논의의 다양함이나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타인에 대해 자기 의지를 강요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힘으로 정의하면서 지배의 양태를 분류하는 데 관심이 많다.(2) 그러나 정신분석은 권력자(아버지)에 대해 아이(국민‧신민‧시민)가 갖는 양가적인 심리에 더 관심을 쏟는다. 아버지 자리는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제시한 원시부족의 원초적 아버지의 힘과 지위를 말한다. 프로이트는 사회가 만들어지기 전의 혈연적 유대에 기초한 원시 상태를 가정하면서 부족의 모든 여자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자식들 위에 일방적으로 군림하는 전제적이고 강력한 ‘원초적 아버지’를 상상한다. 모든 여자를 독점했다는 것은 자신만 절대적인 향유를 누리고 아들들을 철저히 억압했다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의 전제적인 통치와 향유 박탈에 맞서 자식들이 단결해 그를 죽이고 만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가 죽자 아무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게 되고,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는커녕 형제들끼리 여자들을 둘러싸고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수 있어 오히려 불안과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래서 자식들은 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죽은 아버지의 법인 ‘근친상간 금지’를 내면화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비워놓고 토템으로 숭배하면서 비로소 공동체를 출범시킬 수 있었다고 프로이트는 설명한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아들들의 내면에는 토템, 즉 초자아의 형상이 자리를 잡았으며 이것이 사회의 기원이 되고 있다.
토템(totem)과 터부(taboo)는 아버지의 권능과 최초의 금지를 뜻한다. 그것들은 아버지에 대한 살해와 근친상간 금지와 처벌을 내용으로 삼는 오이디푸스 도식과 연관된다. ‘원초적 아버지의 신화’는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사회적으로 적용한 논리적 귀결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로이트는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보편성을 믿었고 이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원시사회에서 문명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탐색하는 사회 분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설명한다. 아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면서 주체가 되듯이 사회는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을 금지하면서, 곧 무의식적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라캉은 아버지의 빈자리에 주목
 
프로이트가 원초적 아버지의 살해와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를 공동체 형성의 원리로 가정한다면 자크 라캉은 아버지의 빈자리의 기능에 더 주목한다. 빈자리는 자식들의 욕망과 관계가 있다. 라캉에 따르면 아들들은 한편으로는 아무도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환상 속에서 그 자리에 혼자 도달하려는 모순되고 금지된 욕망을 꿈꾼다. 이처럼 자식들 마음에 욕망의 대상이 되는 ‘아버지의 자리’는 권력과 법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 자리를 보는 두 가지 관점을 대립시켜 볼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관점은 상보적이면서도 권력에 대한 상이한 태도를 낳는다. 아버지의 자리는 결국 공동체를 통치하고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역할을 하는 법이 기원하는 장소이다. 이 자리를 권력이 배타적으로 향유하는 초월적 공간으로 바라 볼 수도 있고, 끊임없이 권력구조를 재편하면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성적인 빈 공간으로 볼 수도 있다.
 
아버지의 자리: 예외와 초월적 주권
 
원초적 아버지의 신화에서 보듯 아버지의 자리는 먼저 예외적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버지는 절대 향유를 홀로 누리면서 자식들을 지배하는 예외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권력을 어떤 예외적 상태를 결정하는 주권적 힘으로 해석하는 카를 슈미트 법이론(3)과 통한다. 카를 슈미트는 법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법의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서 법질서를 작동하게 만드는 최초의 계기에 주목한다. 법은 법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의회의 합의나 정치가 아니라 예외적인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주권자의 행동에 그 기원을 둘 때만 구조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주권자는 예외적인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자일 뿐 아니라 지금이 예외적인 상태인지 아닌지도 결정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 법은 어떤 상황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에 애초에 법이라는 것 자체를 출발시키는 최초 근거가 필요하고, 이런 독점적 예외성이 주권의 본질이라는 게 슈미트의 요점이다. 이런 면에서 주권은 절대적이고 배타적이며 절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흔히 권위적 독재를 정당화하는 근거처럼 자주 차용되는 슈미트의 예외적 주권이론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의 자리를 인정하면서도 예외적 향유를 갈망하는 아들의 분열적인 환상심리(4)와 맞닿는다. 아버지를 죽이고 향유를 누려보려는 아들의 심리 구조를 라캉은 남근적 향유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남성주체의 전형적 포지션으로 해석하는데, 이런 심리 구조는 보편성의 논리를 수용하면서도 예외를 꿈꾸는 분열된 욕망에 근거한다. 즉 남성주체는 법의 절대적 보편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예외지점을 이렇게 저렇게 특권화하면서 자기만 도달하려고 한다. 예외가 보편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예외성의 자리는 절대적이며 그 자리를 차지한 주권자도 절대적 존재처럼 간주된다. 권력을 베버 식으로 자기 의지를 강요할 가능성으로 보는 입장이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양도받았으며 절대적 힘을 행사하는 홉스식 주권개념이 이것과 통한다.
그런데 절대향유를 금지하면서 자신은 이것에 도달해 보려고 꿈꾸는 입장은 늘 상상적 동일시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원초적 아버지의 자리는 원래 누구도 차지할 수 없는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을 원초적 아버지라고 선언하기보다는 그 권위를 대리하는 계승자처럼 만들면서 예외적 권력을 자신에게 기입하려는 행동을 한다.
권력의 자리를 예외로 규정하는 입장에서는 그 자리를 실체화할 필요가 있으며 인격화된 방식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북한의 권력행사 방식이 이런 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국가주석 자리를 공식적으로 계승하는 중국과 달리 북한은 김일성 사망 후 주석이란 타이틀을 후계자들이 차지하지 않는다. 형식상 그 자리는 비어 있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처럼 후계자들이 그 자리의 후광을 빌어 죽은 김일성의 유훈통치를 실현한다는 면에서 이것은 아버지의 향유를 은밀히 꿈꾸는 초월적 권력관을 잘 재현한다. 김일성 주석이나 아버지 김정일처럼 카리스마와 권력의 정통성을 쉽게 인정받기 힘든 김정은이 김일성의 외모나 행동거지를 자꾸 흉내내면서 마치 수령의 분신처럼 행동하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초월적 입장에서는 지도자가 상상적으로 가시화되면 될수록 절대적으로 이에 복종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보편성의 논리를 실현하려고 한다. 여기서 지도자는 죽은 아버지의 환영을 끊임없이 소환하면서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형제 공동체의 동맹을 자신을 중심으로 구현하려고 한다. 내부 구성원들의 복종은 힘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상상적 동일시에 기초한 무의식적 연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더 절대적이다. 공동체의 통합과 절대적 충성심을 강조하는 권위주의 통치는 과거회귀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실은 아버지를 완전히 죽이는 데 실패한 불완전한 권력의 모습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권력의 권위를 아버지에서 찾기 때문에 권력자가 약화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아버지를 대신하기 위해 권력자에게 도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리: 불가능성의 빈 공간
 
권력의 자리가 이념이나 인격적인 것으로 절대 채워질 수 없는 순수한 빈공간이라는 생각은 특히 서구의 사민주의나 급진 좌파의 민주주의 이론(5)에서 잘 나타난다. 어떻게 보면 근대의 시민혁명은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상상적 아버지를 죽이면서 그 자리를 빈 공간으로 만들어간 지난한 친부살해의 역사이기도 하다. 공화제는 이런 이념을 위한 정치적 대안이었다. 유명한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는 “권력의 장소는 텅 빈 장소이며, 점유될 수도 재현될 수도 없다”(6)라고 말했다. 이들에 따르면 시민의 자유에 근거한 정치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무대화하는 연속적 행동이다. 아버지의 자리를 아무도 차지할 수 없는 빈 공간으로 보는 입장은 권력을 대리적인 통치(reign) 형태와, 상상적 동일시로 보는 논리를 거부하고 본원적 적대와 갈등을 조정하면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실천적 정치(politics)로 이해한다. 전자가 국가권력의 주된 기능을 행정과 치안에 국한시킨다면 후자는 갈등을 정치의 조건으로 전제하면서 개인의 참여와 자유, 그리고 이에 기초한 입법을 중시한다. 그런데 사회계약론자들과 데이비드 흄이 주목한 것처럼 갈등은 법의 부재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갈등이 사회의 내재적 본성이고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면 그것을 없애기보다 합리적으로 조정되도록 놔둘 필요가 있다. 갈등의 정치가 오히려 권력의 끊임없는 역동성과 항구적 재구성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치의 선행조건은 시민사회의 형성이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권력의 빈 장소를 점유하도록 두지 않는 제도적 부정성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의 끊임없는 제도적 장치화를 통해 가능하다. 다시 말해 권력을 인격화하거나 상상적 실체로 만들어서는 안 되며, 권력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라클라우와 무페 식으로 표현하면 적대와 부조화의 원천인 구성적 결핍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성이다. 예외적이고 초월적인 모델이 권위주의 통치방식으로 흐르기 쉽다면 권력의 빈 공간을 지지하는 입장은 급진주의나 다원주의 정치모델로 발전한다. 그리고 급진주의나 다원주의는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데 그것의 선행조건은 주체화에 있다. 다시 말해 정치의 주체를 먼저 세워야 한다.
라캉이 <세미나 20, 앙코르>에서 기호화한 남성주체와 여성주체의 구별 공식에서 여성 위치에 해당하는 결여의 기표 S(A)는 이런 포지션이다. 여성은 상징계를 구성하는 거세논리를 수용하면서도 오히려 결여자체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남근적 질서에서 벗어나 존재의 향유를 누리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여성주체의 입장은 새로운 정치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화의 양상에 더 부합된다. 예외에 도달하려고 욕망하는 남성주체가 철저하게 상징계에 머물면서 ‘보편성’에 종속된 유사 향유(para-jouissance)만을 누린다면, 자신의 자리를 빈 공간과 동일시하는 여성 주체는 ‘보편성’의 논리를 벗어나 무(nothing)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존재의 진리를 발견하는 실천적 우월성을 지닌다. 쉽게 말해 여성주체가 허구적 남근의 ‘보편성’ 논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존재의 실존적 진리에 더 가깝다는 말이다. 물론 남성적, 여성적 권력 주체는 실제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라 젠더 입장으로 젠더적 포지션을 선택하는 윤리적 결단이 아주 중요하다.
일단 권력의 자리를 빈 공간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허무주의나 극단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적 가능성을 여는 조건이 된다. 정치를 특정 이념이나 체제의 실현과 동일하게 바라보지 않고 주체들의 적극적 상호작용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탈중심화된 빈 공간을 매개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선을 실현할 수 있는 열린 권력의 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체의 자리가 상상적 자아에 의해 점유되지 않아야 자기(self)가 여러 모습으로 실현되면서 지속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권력의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권력 분배의 과정이 반복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공공성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 본래의 조절적 기능이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은 절대 권력이 자주 강조하는 통합과 유토피아적 이상을 가로지르면서 스스로의 개체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부조화 속에서 사회를 끊임없이 재창조할 수 있는 주체로 나를 만드는 주체화의 실천 과정이기도 하다.
 
주체화와 정치권력
 
이처럼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사회의 기원으로 가정한 원초적 아버지, 즉 주권자 자리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본질,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두 가지 위치를 나눌 수 있다. 예외적이고 초월적 입장에서 권력을 정의하게 되면 주체는 아버지의 법과 힘에 무한히 복종해야 한다. 그는 영원히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아들로 남으면서 권력을 부정하는 주체인 시민이 될 수 없다. 공동체의 운명과 통치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상상적 주권자에 의해 실현되며,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은 굉장히 불경한 태도처럼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국민은 생업에만 종사하라고 수시로 망발(?)을 일삼는 것이 절대 우연이 아니다. 통치의 구체적 방법은 다르겠지만 이 입장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전제한 지배자-전사-생산자의 철저한 역할 분담과 엘리트 통치(7)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이 입장은 아무리 국가적 선과 행복을 목표로 삼는다 해도 시민을 권력의 주체로 바라보는 근대 이념과는 맞지 않으며 수구적이다.
반면 권력의 자리를 어느 누구도 점유할 수 없는 빈자리로 보는 입장은 완전한 조화와 통합의 현실화를 거부하면서 사회와 정치현실이 끊임없이 재구성되도록 만드는 정치의 역동성을 무대화 한다. 이런 입장은 정치를 특정한 이념이나 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가두면서 선의 실현을 주권자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위임하는 논리에 반대한다. 권력은 누구에게 귀속되는 강제적 힘이 아니라 정치적 상호작용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입장은 역으로 진정으로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 주체화 논리를 전제한다. 이것은 자유의 가능성을 전면에 내걸고 그것을 공동의 선에 연결시키는 정치적 기획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불확실해 보이지만 말이다. 대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기획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제가 생각하는 첫걸음은 근대의 결과로서 우리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좋은 의미에서뿐 아니라 위협적이기도 하다는 뜻에서 극단적입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크 라캉의 ‘대타자는 없다’는 명제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행위 주체는 없습니다.”(8)
자신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권력의 자리를 누구에게 양도하지 않는 태도뿐 아니라, 자신을 텅 빈 주체로 정립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이것은 권력의 본질을 공동체의 선을 달성하는 것 뿐 아니라 개인의 자유의 실현을 위한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가능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권력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비판을 받을 점이 권력과 통치를 동일시하면서 순응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권력의 빈자리를 정치적 장에서 전면화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독점하려는 가짜 아버지들을 죽여야 한다. 이것은 무정부주의적 혁명을 조장하거나 정치적 테러를 하라는 게 아니라 권력의 불가능성을 주체의 가능조건으로 적극 전취하라는 말이다. 마치 부처가 되기 위해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죽이라고 주장하는 선불교의 역설적인 진리와 같다. 권력은 시민의 것이면서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빈 것이다. 그 곳에서 주체화와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이 만난다.
 
 
 
글·김석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를 거쳐 파리8대학 철학과에서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를 주제로 200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건국대 자율전공학부(현 융합인재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사회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과 여러 실천의 문제를 화두삼아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베르트랑 오질비가 쓴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을 번역했고, <프로이트와 라캉: 무의식의 초대> 등의 저서, <남자의 사랑, 여자의 사랑: <색, 계>를 중심으로>, <애도의 부재와 욕망의 좌절> 등 다수 논문을 썼다.
 
(1) 야니 스타브라카키스, <라캉과 정치>, 은행나무, 301쪽.
(2) 권력의 행사방식에 대한 논의로는 막스 베버의 작업이 전형이다.
그는 카리스마를 포함한 세 가지 지배 유형의 구분으로 유명하다. 사회학자들은 보통 복종 또는 통제의 수단이 무엇이냐에 따라 권력의 유형을 나눈다. 이 외에 폭력과 권력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교조적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권력, 힘, 강제력, 권위, 폭력을 구분한 한나 아렌트의 구분도 아주 유용하다.
(3) 카를 슈미트의 <정치신학>에서 특히 1장 ‘주권의 정의’편 참조.
(4) 브르스 핑크는 라캉의 성차공식에서 남성주체 위치가 한편으로
는 완전한 거세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세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두 가지 공식에 의해 정의된다고 설명한다.
남자는 거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특권을 자신에게도 부여하고 싶어 하는 모순된 위치이다. 참조, 브르스 핑크, <성 관계는 없다>, 도서출판b, 56쪽.
(5) 전통적 맑시즘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샹탈 무페의 급진민주주의 이론이 이에 해당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공동선과 자유를 중심에 두고 불가능성을 가능한 것으로 무대화 하는 순수 이념으로서 공산주의를 제시하기도 한다.
(6) Claude Lefort, <Democracy and Political Theory>, p.17.
(7) 맹자가 주장하는 왕도정치는 비록 그것이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눈다는 여민동락의 이상을 지향하지만, 대인과 소인을 나누고, 대인이 소인을 다스리면서 인의 정치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엘리트주의와 통한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정명론 세계관에 입각해 정치적 대의를 실현하려고 한다.
(8)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궁리,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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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김석 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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