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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마저 과분한 당신들의 대한민국
‘전향’마저 과분한 당신들의 대한민국
  • 안영춘 | 한국판 국제편집장
  • 승인 2009.11.05 18:18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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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낯설게 본 변절과 전향]
변절, 적대적 공생 위한 기회주의의 낙인찍기 호명
선민의식 젖은 전향자들 민족주의·애국주의로 귀착

경제학자 정운찬은 변절자인가라는 물음은 논쟁적이다. 정운찬의 이명박 정부 총리 입각을 두고, 적지 않은 이들이 ‘변절’이라 불렀다. 그러나 정운찬의 선택에서 나름의 내적 ‘일관성’을 발견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어느 여성 언론인은 “2007년 한나라당에서 ‘정운찬이야말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손색이 없다’ 했는데 딱 들어맞았다”고 했다.(1) 그는 정운찬이 서울대 총장을 하면서 부자를 위한 삼불제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2007년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할 때도 진흙탕 속에 들어갔다 발에 흙 한 점 안 묻히고 나오려 했다고 평가했다. 사실에 어긋나는 대목을 찾을 수 없다.

그의 말대로 “정운찬은 이명박 정부에 꼭 맞는 안성맞춤 총리”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정운찬의 선택이 자신의 일대기에 느닷없는 단층대를 만든 게 아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의 인사 청문회에서 나온 온갖 말 바꾸기와 추문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파문이 일지 않은 것은 오로지 거대 여당과 보수 언론의 방파제 노릇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많은 이들이 청문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를 변절자로 단죄하고 학습효과를 얻은 것도 파문을 줄이는 데 한몫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단죄는 했으되 오히려 ‘정의 실현’에서 멀어지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소설가 황석영은 정운찬보다 몇 달 앞서 변절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 5월 이명박 대통령을 따라 중앙아시아를 방문하는 자리에서 “현 정권은 중도실용 정권이다”, “용산 참사는 현 정부의 실책이라고 본다. ‘광주 사태’가 우리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70년대 영국 대처 정부 당시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30~40명의 광부가 죽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다”라고 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정운찬의 입각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충격의 강도도 셌다. 그도 많은 이들에게 ‘변절자’가 됐다.(2)

정운찬에게서 발견되는 내적 일관성

그러나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이, 황석영이 고문으로 있는 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 18명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벌여 나온 결과는 일반 대중의 반응과 여러모로 달랐다 (한국작가회의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후신으로, 한국의 진보 문단을 대표한다). ‘변절’이라고 못박은 문인은 2명뿐이고, ‘아니다’라고 답한 문인은 7명이나 됐다. 2명은 ‘지켜봐야 한다’며 유보적 태도를 보였으며, 나머지 7명(기타)은 ‘착잡함’ 말고는 달리 범주화할 수 없을 만큼 반응이 복잡했다.(3) 이처럼 일반 대중과 문인 사이의 반응이 확연히 다른 것은 다른 두 명의 황석영이 동시에 존재해서가 아니다. 황석영에 대한 정보와 인식, 태도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반 대중에게는 황석영의 디테일이 없다. 그의 작품에 매료됐거나, 막연히 그를 진보 문학계의 거목이라고 듣고 믿어왔을 뿐이다. 윤곽이 문드러진 상징은 그 상징을 섬기던 이들의 내면에 환멸을 남겼다. 반면 문인들은 황석영의 디테일에 깊이 다가가 있다. 그의 선후배로서, 몸으로 부대끼거나 가까이 지켜보며, 각자 애증의 화첩을 채워왔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의 발언은 화첩 어느 한 장에 이미 그려져 있었거나, 화첩 전체를 관통하는 구도의 일관된 변주였을 수 있다. 인간적으로는 “작가가 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그럴 자유는 있어야 한다”고 두둔까지는 못해도,(4) 난처하되 쉽게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정운찬과 황석영의 선택을 변절로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 사이에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난센스다. 정운찬을 누구보다 강하게 공격한 민주당은 그를 주저 없이 ‘변절자’로 규정했지만, 정운찬한테서 나름의 일관성을 찾으려 한 여성 언론인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황석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반 대중보다 진보 문학계 문인이 덜 윤리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변절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인식이며(누군가에게 ‘변절’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귀순’이다), 심지어 자의적인 인식일 수도 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때 정운찬을 유력한 대통령 후보감의 하나로 꼽았던 민주당은 그의 총리 입각에 배신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운찬은 공식적으로 민주당과 손을 잡은 적이 없다. 대선 당시에도 정운찬은 기회주의적이었으며, 그의 그런 태도는 예나 이제나 변한 것이 없다. 민주당의 반응은 자의적 동일시의 대상과 결별하려는 감정 기제가 작동한 결과다. 민주당은 기회주의자를 자신과 동일시했고, 그것은 정작 자신들 또한 원칙도 철학도 없었으며, 그래서 그의 기회주의적 일관성을 살피는 눈도 없었던 것뿐이다.

변절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은 가난하다. 변절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넘치지만, 변절이 성찰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즉자적 반응만 격하게 분출되고 만다. 변절자라고 불리는 이에게도 변명만 있을 뿐 성찰은 없다. 사실 변절이라는 표현에는 봉건적 낌새가 짙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 앞에서 읊었다는 ‘단심가’의 절개와 지조는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것과 다름없다. 조지훈은 1960년에 발표한 ‘지조론-변절자를 위하여’라는 글에서 변절의 반대 개념인 ‘지조’를 여성의 ‘정조’와 동일시하기도 했다(제목과 달리, 그의 글은 변절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변절은 행위자의 선택에서 시작되지만 관찰자의 규정으로 완성된다. 변절은 행위자의 동태(動態)를 관찰자의 정태(靜態)가 포착한 것이다. 이 움직이려는 것과 머물려는 것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도덕 감정’이라는 모호하고 유동적인 장치뿐이어서, 변절의 기표와 기의는 언제나 긴장 속에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이는 변절이라는 기호의 숙명이다. 덕분에, 이른바 변절한 자 스스로 면죄부를 발급하거나 자기합리화할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커진다. 정몽주의 꼿꼿한 ‘단심가’는 이방원의 드렁칡 같은 ‘하여가’의 숙주였다.

배반, 변절, 그리고 전향


변절이라는 표현의 위치를 보면, 앞쪽에는 ‘배반’이 있고, 뒤쪽에는 ‘전향’이 있다. 배반은 보편적 도덕 감정보다 집단의 이해가 우선하는 가치다. 당연히 변절보다 사적이다. “배반은 어떤 사람이 동지였던 사람을 밀고하거나 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일본인 학자 쓰루미 슌스케는 말한다. 그는 “1931년에서 45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전향 현상 전체에 배반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악으로 간주해버린다면, 우리들은 오류 속에 있는 진리를 떠올릴 기회를 잃고 말 것”이라고 덧붙인다.(5) 반대로 전향이라는 명명에는 성찰 기제가 작동한다. 그의 글에서 ‘변절’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지만, 변절 역시 전향 안에 있는 오류 속 진리를 묻어버릴 수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전향은 배반이나 변절에 견줘 이념·사상에 깊숙이 닿아 있다. 한국에서 ‘전향’이라는 표현은 일본에서보다 용례가 제한적이고 특수하다. 전향 자체보다는 ‘비전향 장기수’나 ‘국가 폭력에 의한 강제 전향’ 등 특정한 관형어와 동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향이라는 표현이 애초 일본에서 나온 만큼 일본에서 더 자주 쓰이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전향의 용례가 빈곤하고 변절이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오랫동안 이데올로기 자체가 극도로 백안시되고 억압받아온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성찰도 빈곤하기만 했다.

전향이라는 표현의 기원은 1922년 야마카와 히토시가 잡지 <전위>에 발표한 ‘무산계급운동의 방향 전환’이라는 논문이다. 이 논문의 골자는 ‘전위분자는 무산계급과 대중 속으로 돌아가 그들의 일상생활 속의 부분적인 요구나, 특수한 요구를 내건 투쟁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방향 전환 주장에 대해 그 자체가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비판이 일었고, 이후 방향 전환은 ‘전향’이라는 축약어로 널리 쓰이게 됐다.(6) 이때만 해도 ‘전향’에는 ‘변절’ 또는 ‘배반’의 뉘앙스가 없었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참된 방향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변증법적 전화의 원리를 능동적 주체가 적극적으로 적응해가는 ‘자기지양’의 의미가 강했다.(7)

전향이 부정적 의미를 띠기 시작한 건 1930년대 들어서다. 전향이 학생들 사이에 유행어가 되자, 사상경찰은 거꾸로 급진파 대학생들의 생각을 바꾸는 기술을 고안해 책자까지 발행했고, 이 기술을 체포·구금된 학생들에게 적용했다. ‘자기지양’으로서 전향이 국가에 의해 강제된 투항으로서 전향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사상경찰의 공작으로 많은 학생 사상범들이 전향을 선택했음은 물론이다.(8) 이 기술은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 있던 조선에서도 그대로 적용됐고, 해방 이후 남한 독재정권들은 한층 가혹한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일제 사상경찰은 조기 석방을 조건으로 전향을 유도한 반면, 남한 독재정권 아래서는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석방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행형법상의 모든 권리가 박탈됐다. ‘자유대한’의 감옥 안에서 죽을 때까지 사느냐 아니면 그냥 맞아 죽느냐의, 매우 ‘햄릿스러운’ 선택지였다.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형기를 마쳐도 ‘사회안전법’으로 다시 수감됐으니 살아도 감옥 안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사상전향은 폭력적으로 강요됐으며, 그 과정에서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고, 실제 죽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9)

유다는 왜 예수를 밀고했을까?

한편, 일본에서 일어난 부정적 의미의 전향은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 전향보다 국가권력에 대한 자발적 전향이 더 많았다. 1933년 일본공산당 위원장 사노 마나부와 중앙위원회 위원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감옥에서 자발적 전향을 선언했다. 이 선언 이후 한 달 안에 공산당 관계자 가운데 미결수의 30%(1370명 중 415명), 기결수의 34%(393명 중 133명)가 전향을 선택했다. 3년 뒤에는 기결수 중 74%(438명 중 324명)가 전향을 발표했고, 비전향을 고수한 사람은 26%(전체 수형자 438명 중 114명)에 지나지 않았다.(10)

그러나 전향은 이처럼 폭력으로 강요되지 않는 자발적 전향이라야 1920년대 원형의 필요조건을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자발적으로 바꾼 사도 바울은 (기독교 처지에서 바람직한) 전향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인지도 모른다. 이에 비해,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의 경우 전향이 얼마나 실존적 고뇌와 대면해야 하는 문제인지를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지난 2006년 4월 <유다복음>이 공개된 뒤(11) 발표한 글에서 유다의 배신에는 전향과 관련한 함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배신이란 내면적인 것이고, 그런 점에서 ‘사탄’이나 ‘돈’의 타자성을 뛰어넘는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와의 투쟁과 갈등을 요구한다. 사상 측면에서 보면, 그 배신은 ‘전향’과도 유사하고, 모든 전향이 그러하듯 거기에는 그것을 결심하고 감행하게 한 주체 쪽에서의 합리화된 논거가 제시되는 것이 타당하다. 전향이란 헤겔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약’과도 유사하다. 그것은 안정된 자기 스스로 근원적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 것, 그 위기의 가장 낮은 바닥에서 자기를 탐문하는 것, 그와 동시에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논리화해 자기변호의 근거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12)

이명원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해방투쟁 노선에 있던 열심당의 당원이던 유다가 유대민족주의를 초월해 세계종교로서 성격을 취했던 예수의 사상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라고 봤다. 예수 사상에 심원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예수가 더는 유대민족 해방 노선의 지도자로 나설 가능성이 없다는 최종 판단에 따라 배신했을 것이지만, 자신의 신념체계와 예수의 신념체계 모두를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응징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유다에게 자살은 자기 사상체계를 지키고 예수의 사상체계도 내면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런 면에서 그의 자살은 책임과 성찰의 형식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유다가 비전향과 전향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성찰적 죽음을 맞은 것이라면, 그리고 그의 죽음에 일정한 값어치를 매길 수 있다면, 전향이냐 비전향이냐의 문제는 절대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기 어렵다. 그보다는 어떤 전향이냐, 어떤 비전향이냐가 더 중요해진다. 일본의 1920년대 전향과 30~40년대 전향의 차이(어떤 전향이냐)는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가 아니라, 어떤 이념과 가치를 인정했고 부정했느냐에 있다. 일본에서 ‘전향 쓰나미’의 신호탄이 됐던 1933년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전향은 천황 폐지, 식민지화된 여러 민족을 포함한 모든 민족의 자치를 위한 투쟁 노선을 철회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벗어나 일본의 일국사회주의를 지향하겠다는 것이다. 천황과 국가로의 투항이었다.(13)

일본 엘리트들의 집단 전향

그 시대에 전향을 선택한 이들에게는 공통된 사회적 배경이 있다. 대부분 도쿄제국대학교 법학부의 정치 동아리 ‘신인회’ 출신들이었다. 그보다 앞서 이들은 거의 다 도쿄고등학교 출신이기도 했다. 당시 도쿄고는 도쿄제대 예과 성격의 학교였으며, 도쿄제대보다 정원이 적어 졸업만 하면 거의 자동으로 도쿄제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10대 후반에 당대 일본 사회의 최고 엘리트로서 사회주의자가 된 이들은 정작 자신들의 학교와 서책 말고 이렇다 할 사회적 경험이 없었다. 그들은 엘리트 의식으로 충만한 미성숙한 존재였다.

이들의 전향 이후도 전향 이전 못지않은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일본 공산당의 최고 책임자인 사노 마나부는 당적을 이탈한다는 의사표시도 없이 그때까지의 태도를 부정하는 성명을 냈다. 쓰루미 슌스케는 “그것은 신인회의 숨은 논리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갈파했다. “가장 어려운 입학시험을 통과한 직후 민주적이고 공평한 방법으로 인민의 지도자에 뽑혔다고 느끼는 18살 소년의 심성 틀에 딱 들어맞았다. 이런 방법으로 한번 지도자로 뽑힌 사람은 정치상의 의견이 바뀌더라도 계속 지도자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암묵적 전제가 받아들여졌다.”(14)

이것이야말로 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단적으로 전향한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다. 그리고 전향의 방향이 일제히 하나의 지시등을 좇아가는 양태로 나타난 것에도 유력한 설명의 틀을 제공한다. 당시 일본 정부는 내부 개혁 대신 군사력을 동원해 국외로 진출하는 길을 선택했고, 신인회는 자신들의 사상을 군국주의와 초국가주의의 국책 선전에 순치했다.(15) 후지타 쇼조는 이들을 ‘제도 통과형 수재’라고 부른다. 이들은 한순간도 국민적 지도자의 지위에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신이 운동에서 지도성을 확보하기 위해 결코 일본적 공감에 반항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16) 이들은 비록 이념을 바꿨지만, 제도 통과형 수재로서 내적 일관성에서는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셈이다.

이제 한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사상적 전향이라고 부를 만한 사례가 있는가? 좌파 진영의 지도급 인사였다가 이념을 버린 뒤 은둔하지 않고, 여전히 과거 적대 세력이 꾸며놓은 현실 정치 무대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인물로는 누가 떠오르는가? 민중당(17)은 그 수명은 짧았지만, 한국 전향의 역사에서 독보적인 인물들을 잇따라 배출했다. 이우재 상임대표, 이재오 사무총장, 김문수 노동위원장은 1990년대 중반 군부독재의 후신인 보수 여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이 됐고, 이 가운데 이재오와 김문수는 현재 이명박 정부의 최고 실세 또는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의 위상에 도달했다.

그들은 국가권력의 폭력적인 전향 요구를 받지 않았다. 보수 여당에 입당할 때도 슬며시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들이 변했다는 점을 인정했고, (비록 설득력 있는 논거는 없지만) 변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요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재오와 김문수는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누구보다 왕성한 의정 활동을 벌였다. 물질적 타락의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두 사람은 비싼 식사를 하지 않고, 골프를 치지 않으며, 자전거로 출퇴근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 비기를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운동성’에서 찾는다. 그들은 다만 섬기는 대상을 가난한 노동자에서 표현상 국민, 내용상으로는 가진 자들로 바꿨을 뿐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국가를 가장 앞세운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지도자급이다.

일본과 한국 전향 엘리트의 공통점


김문수는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급진적 민중주의자에서 자유민주주의자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우리 시대의 과제는 반파쇼 민주화였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이야기가 주류”라고 말했다. 또 “진보 정당의 실패에 이어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았다”며 “이것은 일종의 좌절이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18) 그는 민주화운동을 할 때도, 전향 뒤 현실 정치를 할 때도 늘 시대적 주류를 좇았다.

도올 김용옥은 이재오를 인터뷰했다. “운동권 그리고 변절? (중략) 그는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청춘을 불살랐다. (중략) 그런데 그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은 장본인들과 같은 당의 의원으로서 어깨를 겨루며 당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변절! 이것은 과연 정당한 명명일까? 그의 행보를 변절로 생각할 수 없다. (중략) 그들의 결단은 (중략) 오히려 시대를 앞지르는 형안일 수도 있다. 변절로 매도된 세월, 그것은 우리 해방 이후 분단사의 굴절일 뿐이다.”(19) 당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한 굴절은 있어도 변절은 없다는 김용옥의 인식론은 ‘변절’의 개념적 아킬레스건을 건드림과 동시에 ‘유사 전향’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김문수와 이재오의 전향에서 가롯 유다의 책임과 성찰을 읽어낼 수는 없지만, 일본 ‘신인회’의 1930~40년대 전향을 연상할 만한 요소는 적지 않다. 심지어 그들의 기치 아래 현 보수 여당 진영에 민중당 출신이 일파를 이루는 것은, 전향 뒤에도 추종자를 달고 다녔던 신인회 지도부의 그것과 닮아 있다. 쓰루미 슌스케의 맥락대로라면,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배반(변절)이라고 매도하기 전에, 그들이 범한 오류 속 진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범한 오류 속 진리를 찾는 것은 결국 우리의 성찰로 환원될 것이다.

김문수·이재오가 범한 오류는 황석영에게서도 다른 양태로 변주돼 고스란히 나타난다. 김문수·이재오의 전향 안에 현실 정치 권력을 향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면, 전향이라고 하기에도, 또 변절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황석영의 갈지자 돌출 언행에는 ‘문화계의 맏형’이라는 지도자 의식, 문화권력에의 욕망이 자글대고 있다. 그의 문화적 상상력이 기껏 몽골에 대운하를 파는 토건적 상상력이자 연고조차 희박한 알타이계가 대연합하는 혈연적 상상력밖에 안 되고, 그 남루한 상상력이 완장의 욕망으로 표출됐다는 건, 그가 깔고 앉은 한국 문단의 풍경을 더욱 황량하게 한다.

황석영의 알타이연합론은 천황을 모시고 일본의 가치를 선양해 대동아공영으로 가자는, 전향한 신인회 논리의 21세기 한반도 남쪽 버전이다. 김문수·이재오, 신인회 그리고 황석영은 각자의 항로를 거쳐 마침내 하나의 정박지에 닻을 내린다. 그 항구의 이름은 민족주의, 국가(애국)주의, 제국주의(또는 인종주의)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황석영과 (그를 두둔한) 김지하 같은 이의 요즘 행태는 민주화 시기 민중·민족주의와 결합했던 애국주의 또는 국가주의가 ‘국민’을 기반으로 한 애국주의·국가주의로 바뀐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격없는 변절과 전향뿐

전향 엘리트들이 개인이나 계급보다는 민족 또는 인종 같은 ‘상상의 공동체’로 기수를 잡는 경향성은 변절·전향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고려 요소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당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을 발표했던 장지연은 이듬해 7월 7일 같은 신문에 “한국과 일본이 함께 독립을 유지하며 서로 지팡이가 되니 일본 또한 영원히 보전된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 지사(志士)가 변절자로 아우팅되는 것은 먼 훗날 대중에게도 두려운 일이다. 장지연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대중이 받아들이는데도 적잖은 통증이 수반됐다.(20)

그러나 박노자가 장지연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여러 지식인의 노선을 정리한 것을 보면 장지연의 이런 선택에서도 내적 일관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중근·장지연·이준·이승만·윤치호 등 인종론 입장에서 일본 승리를 기뻐하면서도 ‘인종적 단결’보다 현실적 ‘국권’을 더 중시하는 지식인들은 을사조약 강제 소식에 충격을 받아 인종론 사고를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하면서도 (중략) 약속을 ‘배신’한 일본과 이토를 혐오하는 반일로 전환한다.” 이 지식인들은 훗날 각자 자신의 길을 걸어갔지만, 황인종의 ‘우생학적 연대’에 대한 믿음과 이를 저버린 일본에 대한 배신감 등이 선택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21)

다시 쓰루미 슌스케의 맥락으로 말하면, 지금 필요한 것은 변절자라는 낙인찍기가 아니라 그들의 오류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정명(正名)이다. 그러려면 변절과 전향에 관한 우리의 가난한 인식론을 발견하는 게 먼저다. 조지훈은 ‘지조론’에서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이념이 없으면 전향도 없다. 전향에는 그에 걸맞은 사유체계의 내적 논리가 함께해야 한다.

대학교수를 자발적으로 때려치우고 생태운동에 매달리고 있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변절이니 전향이니 하는 말을 쓰기에 앞서 지식인이 갖춰야 할 기본적 자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며 “진보적이라고 일컫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이들조차 경륜이 쌓이고 권위가 커질수록 지적 긴장이 느슨해지고 보수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기본적 시각이 예외 없이 위로부터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밑바닥에서 세계와 현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의 비극은 변절자나 전향자 자격을 갖춘 인물조차 드문 현실에 있다. 변절도 전향도 할 수 없거나 할 의지도 없는 이들만 넘치는 한국 지식인 사회의 남루한 지형 말이다. 정운찬은 과연 어떤 자격을 갖췄고, 그의 선택은 어떤 조건을 채웠을까. 그는 커밍아웃한 것인가 아우팅된 것인가. 그리고 그를 변절자라고 비난하고 돌아서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럴 만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기는 한 건가. 그는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결코 유별난 존재가 아니다. 


<각주>

(1) 김선주, ‘정운찬은 안성맞춤 총리다’, <한겨레> 2009년 9월 22일자.

(2) 황석영은 자신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자 자신의 블로그(blog.naver.com/hkilsan)와 언론 인터뷰(<한겨레> 5월 16일자, 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5124.html 등 참조) 등을 통해 발언의 취지를 해명했으나, 그 해명이 다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3) <한겨레21> 제762호, 2009년 5월 29일.

(4) 김지하,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2009년 5월 18일 인터뷰.

(5) 쓰루미 슌스케, 최영호 옮김, <전향> 한국어판, 논형, 서울, 2005년, 35쪽.

(6) 위의 책, 31쪽.

(7) 후지타 쇼조, 최종길 옮김,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 한국어판, 논형, 서울, 2007년, 14쪽.

(8) 쓰루미 슌스케, 위의 책, 30쪽.

(9) 한홍구, ‘빨갱이에게도 인권은 있다’, <한겨레21> 2001년 11월 29일 제385호 참조.

(10) 쓰루미 슌스케, 위의 책, 같은 쪽.

(11)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공개했다. 1700여 년 전인 서기 300년께 이집트의 콥트어로 파피루스에 쓰인 것으로, 지난 1970년대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돼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진본임이 확인됐다. 신약성경의 기존 4대 복음과 달리 예수의 요구에 의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으로 기술돼 있다.

(12) 이명원, ‘유다의 시간과 근대문학의 종언’, <문학수첩> 2006년 여름호.

(13) 쓰루미 슌스케, 위의 책, 같은 쪽.

(14) 쓰루미 슌스케, 위의 책, 30쪽.

(15) 쓰루미 슌스케, 위의 책, 223쪽.

(16) 후지타 쇼조, 위의 책, 33쪽.

(17) 1990년 11월에 창당한 뒤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51명의 후보가 출마해 평균 6.25%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한 명도 당선되지 못해, 정당법에 의거해 해산됐다.

(18) “민중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오마이뉴스> 2007년 1월 15일.

(19) 김용옥, ‘한나라당 대표후보 탐방기’, <문화일보> 2003년 6월 22일자.

(20)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사전편찬위원회는 2008년 4월 <친일인명사전>에 실릴 인물 3090명을 발표하면서 장지연의 이름을 포함했다.

(21) 박노자, <우승 열패의 신화>, 한겨레출판, 서울,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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