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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자들이여, 두려움에 떨 준비를 하라’
‘기득권자들이여, 두려움에 떨 준비를 하라’
  • 프레데리크 로르동
  • 승인 2016.01.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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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팽의 ‘직접 행동 영화’ <사장님 고마워요!>
▲ <숲속의 로빈>-무명

 

제작사인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감시할 리도 없고, 대단히 긴박감 넘치는 영화도 아니니 프랑수아 뤼팽이 감독한 <사장님 고마워요!>의 스포일러가 돼보겠다.(1) 이 영화는 세르주와 조슬린 클뤼 부부의 이야기다. 이들은 LVMH 그룹의 자회사인 ECCE의 직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에 겐조 브랜드의 의류를 생산하던 푸아뒤노르 공장의 직원들이다. ‘예전에’ 그랬다는 얘기다.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그룹에서 생산라인을 전부 폴란드로 이전한 탓이다. 덕분에 클뤼 부부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4년 간 ‘고용주’와‘피고용인’의 현격한 차이를 경험해야만 했다. 실업수당 수령은 오래 전에 끝났고, 월 400유로로 생활을 하고 있다. 난방을 할 수 없어 추위를 버티기 위해 한 방에 모여 지냈다. 식생활은, ‘식량배급’이라고 말할 수준에 이르렀다. 크리스마스까지 치즈 바른 빵으로 보냈다. ‘소박한 식탁’을 선호하는 이들이라도 이러한 상황을 즐길 수 있었을까.
결국 2만 5천 유로의 담보대출에 대한 결과로 주택압류 통지서가 날아오는 상황에 이르렀다. 월수입이 3천 유로 이상이면 ‘부자’ 심지어 ‘자본가’라고 믿었던 클뤼 부부는 곧장 블랙홀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덕분에 현실적인 결과들이 이어진다. 클뤼 부부의 유일한 소유물이었던, 그 존재만으로도 그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던 집에 불을 지른다는 현실적인 결론에 이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일이 클뤼 부부에게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보편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다. 클뤼 부부가 이 시스템의 축소판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임금노동자들의 상황을 다룬 수많은 감독들과는 달리, 뤼팽은 이 영화에서 어떠한 분석이나 교육적 효과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이 영화는 특히 장르를 규정짓기 어려운 형태의 영화다. ‘직접 행동 영화’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언제부터인가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을 타깃으로 삼았던 뤼팽은 ECCE의 노동자들을 위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2008년 이미 LVMH의 주주총회에 해고자들을 불시에 등장시켰던 것처럼 말이다.(2) 이번에는 클뤼-뤼팽 대 아르노간의 전면전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우리가 힘을 발휘해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클뤼 부부와 뤼팽도 그런 식으로 요구한다. 클뤼 부부가 직장을 잃고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 대가인 4만 5천 유로의 보상금과 남편 세르주의 그룹 내 정규직 일자리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만일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다면 ‘언론전’이다. <르몽드>도 <프랑스 엥테르>도 <메디아파르>도 아닌 바로 <파키르>, 뤼팽이 아미앙에 세운 신문사를 통한 언론전이다. 기득권자들이여, 두려움에 떨 준비를 하라!
바로 그 순간 영화는 단숨에 4차원으로 넘어간다. 모기의 공격이 코끼리의 전두엽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자는 본격적으로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여기에 영화 속 에피소드들을 모두 나열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스포일러가 된 이상 결론으로 넘어가겠다. 베르나르 아르노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클뤼 부부가 4만 5천 유로와 정규직 일자리를 얻어낸 것이다! 클뤼 부부는 꿈인지 생시인지 볼을 꼬집어본다. 믿을 수가 없다. 혹시 영사기가 이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전파하는 확성기가 된 것은 아닐까 이야기도 해본다. 어쨌든 모든 게 사실이다. 현대 물리학이 반(反)물질의 존재를 밝혀냈듯이 <사장님 고마워요!>의 사회 물리학은 우리로 하여금 반(反)계급 투쟁의 평행선에 있는 세계를 발견하도록 만든다.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대로, 그러나 거꾸로 일어난다. 억압에 신음하던 사람들이 부자들에게 패배를 안겨준다. 틀에 박힌 세계에 거꾸로 된 세상이 갑작스레 등장한 것은 기적같은 일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굳이 이해하려하지 않고 믿어버리면, 곧 나쁜 세상 속 다시 좋은 세상을 세우고 싶다는 누를 수 없는 열망이 솟아난다. 차라리 좋은 세상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도 좋겠다.
의심과 회의를 넘어선 영화, 어느 영화와도 닮지 않은 이 영화의 첫 번째 영향력은 야망을 좀 더 키울 수 있는 안목을 준다는 것이다. 먼저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부터 정확히 파악해보자. 우선, ‘죽지 않은’ 계급투쟁이라는 사회주의 우파의 악몽이 있다. 악몽이 자리하는 이유는,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다양한 이유를 대며 계급투쟁이 죽었다고 사망증명서를 만들어냈기 때문은 아니다. 계급투쟁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계급투쟁의 정세가 복잡해졌다고 말하고, ‘간부’라는 중간층이 (가상의 신분 상으로는) 자본가인 동시에 (사회적 지위 상으로는) 급여 생활자라는 양면성을 지닌 커다란 범주를 만들어 냈다고 말하고, 이 새로운 사회학 때문에 계층의 구분을 없애려는 명백한 시도가 사라졌다고 말이다. 계급투쟁을 통해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계급투쟁이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핵심을 다시 간파하려면, 문제점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누전 작전’들을 계획해야 한다. 착취 자본과 피착취 노동의 순수한 대면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배당금을 논의 중이던 LVMH 주주들 사이로 ECCE의 노동자들이 난입했던 사건이나, 돈으로 그 값을 매겨버린 클뤼 부부의 불행 등이 전형적인 누전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장면들은 사회주의 우파가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하는 상황들이고, 이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거부(拒否)라는 무기를 총동원한다. 2011년, 싱크탱크 테라노바가 서민 계층(‘노동자’라는 표현 대신)이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이로운 계층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했던 적도 있다. 사회주의 우파가 정책을 고민하는 것은 더 이상 이들 서민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힘이 있다,
두려움에 떨게할 힘이

잘 알고 있겠지만, 억울하게 살해당했거나, 제대로 매장되지 않은 망자들은 되돌아온다. 이 영화에서는 죽은 자들이 경제활동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피고용인의 25%를 또 다른 망자들이 차지하면서 명실상부한 좀비 부대를 이룬다. 비현실적인 자신들의 회사를 현실이라고 믿어버릴 모든 이를 위한 혼란스러운 밤의 약속. 유령들은 누군가를 두려움에 떨게 할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바로 그 힘 때문에 베르나르 아르노가 하수인들을 보내 클뤼 부부의 입을 막기 위한 금전적인 협상을 시도한다. 진보주의란 모름지기 배당금의 확대에 그 의의가 있다고 믿고 있는, 사회당의 지도부이기도 한 LVMH그룹의 사무총장은 몸소 소속정당의 모든 이야기를 그 유명한 핸드백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모든 작전들은 결국 베르나르 아르노의 돈과 명성을 모두 잃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서민’ 계급은 - 사람들이 영원히 그들이 헤어나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 보잘 것 없는 처지를 벗어난다. 그것도 때로는 떠들썩하게. 바로 이것이 클뤼 성인이 전하는 두 번째 복음으로, 사회 질서가 우리의 믿음보다 훨씬 더 불안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장면을 보고 진지하게 자문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핸드백 제국의 밀정이 된 옛 정보기관 경찰이 몰래 카메라(의자 밑에 녹음기가 있다) 앞에서 클뤼 부부와 협상을 한다. <파키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그는 극도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인다. <르몽드>나 <메디아파르>, 프랑수아 올랑드에 의한 언론전이었다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파키르라니! 몰리에르의 <상상병 환자>에서 의사인 디아푸아뤼가 “폐!”라고 외쳤던 것처럼, 옛 정보요원은 이성을 잃고 만다. “파키르! 파키르!” 모든 사실을 CNN이나 교황에게 폭로한다고 위협했다면 그는 아마도 미치광이처럼 “파키르!”라고 소리 질렀을 것이다.
여기까지 보고나면 놀라움에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보편적인 생각들을 품으려고 진흙탕이 된 생각의 밑바닥을 더듬는다. 다름 아닌 이 정보요원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경찰의 상식으로 무장한, ‘실리’라는 정치적 철학을 지닌 그가 왜 그토록 작은 언론매체에 불과한 <파키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행동하는 소수가 모든 것을 다 해내기 때문이다.” 뤼팽이라는 동지의 코치를 받은 클뤼 부부가 베르나르 아르노를 무릎 꿇게 할 힘이 있다는 건 정면에서 맞서기가 두렵다는 뜻이다. 장기간 축적된 많은 비열한 행동들이 영원히 처벌받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막연히 인식하며 또 두려워한다. 하지만 또 다른 클뤼-뤼팽 연합군이, 그것도 수십, 수백이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불행에 대한 단순한 보상 외에 다른 것을 얻어내고자 했다면? 희망이 적과 동지를 바꾸고, 전투가 그 핵심 목표를 바꾼다면?
직접 행동 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나온 후 한참 지나 영화의 영향력이 퍼진다는 특징이 있다. 그 특징으로 인해, 우리는 모든 것을 전복하려는 열망을 품고 온몸이 짜릿해져 영화 밖으로 나온다. 이 열망은 처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현실적 열망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 <고마워요 사장님!>은 사회주의 우파의 배신과 긴급 사태, 좌파 상점의 무능함으로 나약해진 우리를 힘으로 연결시켜준다. 이것은 영화가 아닌 나팔, 국민개병의 가능성, 잠재된 현상이다. 이 잠재적 정치 사건을 실제 사건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최근 저서로는 <결함. 유럽통화와 민주주의 주권>(Les Liens qui libèèrent·파리·2014년)이 있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Fakir, Jour2fête, 90 minutes 제작, 2월 24일 개봉
(2) 프랑수아 뤼팽의 다음 기사 참고, ‘노동자와 주주들의 기이한 대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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