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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맛의 인문학 ⑫김과 김밥
안치용의 맛의 인문학 ⑫김과 김밥
  • 안치용 ESG연구소장
  • 승인 2016.06.2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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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맛이 언제나 더 맛있는 이유”

김밥을 불교식으로 설명하면 불일불이(不一不異)와 부단불상(不斷不常)의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가 되거나 각기 다른 것이 되어버리면 김밥이 아니다. 속재료와 밥, 김이 융합되지 않고 끊어져서는 안 되지만 그 반대여도 김밥이 아니다.
불일불이의 논리는 김밥의 기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 전통 음식이냐, 일본에서 넘어온 음식이냐 하는 논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이런저런 근거를 대며 “(김밥에 대해) 일본 유래설보다 고유음식설이 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유사에 정월 대보름 풍습 가운데 밥을 김에 싸서 먹는 ‘복쌈(福裏)’이라는 풍습이 전한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고유음식설은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현재의 김밥이 1950년대에 보이기 시작한 상황을 감안할 때, 일본의 노리마키[海苔券]에서 출발하여 해방 후 한국 식문화에 맞춰 빠른 속도로 진화하여 지금의 김밥이 되었다는 설명이 조금 더 타당해 보인다. 딱 봐도 김밥과 노리마키는 너무 닮았다. 일본 간토[関東] 지방에서는 하나에서 셋 정도의 속재료를 집어넣어 길쭉하게 썰어내는 호소마키[(細巻)]가 노리마키를 뜻한다. 우리 김밥처럼 굵게 말아낸 노리마키를 간토 지방에서 후토마키[太巻き]라고 부르며 간사이[関西] 지방에서는 노리마키 하면 후토마키를 의미한다.
요즘과 달리 과거 김밥을 만들 때 밥에다 초를 섞은 데서도 일본 노리마키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식초는 맛으로 기능하는 것 외에 음식이 상하는 걸 막아주는 보존제 역할까지 맡았다. 한때 한일 네티즌이 김밥의 기원을 두고 격론을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일본에서 유래하였다고 해서 김밥이 우리 음식이 아닌 게 아니다. 짜장면과 마찬가지로 김밥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한국 음식이다. 중국과 일본이란 근원지를 숨기며 부득부득 우리 기원설을 주장하는 태도는 우월감이 아니라 열등감을 입증할 뿐이다. 남의 것을 받아들여 창의적으로 발전시키는 능력이야말로 창의성의 근본에 속한다. 민족 수준이든 개인 수준이든 사실 원래 자기 것이라는 게 인류에게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세상은 불일불이하기에 말이다.

 

해태 고장 딸 시집보내는 심정


김을 해태(海苔)라고도 한다. 바다에서 김은 암초에 이끼처럼 붙어서 자라며 길이 14∼25cm, 나비 5∼12cm로 부스러기가 아닌 번듯한 해초이다. 남해안이 주산지며 전남에서 70%가량이 생산된다. 김은 추운 지방에서 엽상체(葉狀體)로 존재하지만, 따뜻한 지방에서는 겨울에만 엽상체가 되고 수온이 올라가는 봄~여름에는 아주 작고 긴 사상체(絲狀體)로 바뀌어 패각(貝殼) 속에서 살아간다. 추운 계절에만 김을 양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남해 바다라 해도 겨울바다다. 김양식장에서는 한겨울 바닷바람을 온통 뒤집어쓴 채로 김발을 만지게 된다. 칼바람은 기본이고 얼음장 같은 바닷물에다 손을 집어넣어야 한다. “해태 고장 딸 보내는 심정”이란 속담의 어버이 심정이 능히 짐작이 간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 없으나 해태 고장 겨울바다의 노동이 땡볕 아래 염전의 노동에 못지않게 고되지 싶다. 김양식이 겨울일이라 하여도 이미 6~7월에 김발짜기에 들어간다. 8월 어장정리 및 분배, 9월 양식장에 김발 투하, 이후 햇볕노출 등을 조절하며 김발을 관리하여 12월 무렵 초사리(첫수확)를 한다. 추운 곳에서는 4월까지, 따뜻한 해역은 좀 일찍 채취를 마감한다.
김양식의 발상지에 대해서는 미국에서 햄버거의 고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듯 다소의 갑론을박이 있다. 그 가운데 김 시식지(始植地) 기념관과 유래비가 세워진 곳은 전남 광양군 태인도이다. 기념관 안내판에는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대에 전남 광양군 태인도에서 김여익이라는 어부가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에 김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지주를 세워 처음으로 김을 양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여익은 병자호란(1636)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조정이 청에 항복하자 인조 18년(1640)에 태인도에 들어와 최초로 바다 김을 양식하였다고 한다. 김의 원래 이름이 ‘해의’였으나 ‘김’으로 고쳐 부르게 된 연유 또한 김양식을 최초로 창안한 김여익의 성씨를 본 딴 것이라는 설이 전한다. 태인동 궁기마을에 있는 김여익의 묘역과 사당이 1987년에 전라남도기념물 제113호로 지정되었고, 1992년에 김 시식 전시관이, 1999년에는 옆마을인 용지마을 입구에 김 시식지 유래비가 건립되었다.

 

김 태운 며느리의 우화


김과 파래는 상극이다. 김양식장 하는 사람들은 김발에 파래가 끼는 걸 싫어한다. “김발에 파래 일면 김 농사는 하나마나”라는 속담은 그래서 나왔다. 파래김은 그냥 김에 비해 더 싸고 맛도 다르다. 하지만 어린 입맛에는 파래김이 더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김이 아직 귀했던 시절 내 친구는 어릴 적에,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파래김을 싸온 걸 보고 엄마에게 “우리도 파래김 먹자”고 졸랐다고 한다. 엄마가 얼마나 웃었을까.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맛있는 김은 한 장 한 장 참기름을 발라 소금을 뿌린 다음 프라이팬에다 구워낸 것이었다. 친척 집에나 가야 먹을 수 있었고, 우리 집에선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 빼고 남자만 5명인 집안에서 음식 하나에 일일이 정성을 쏟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질보다 양으로, 맨 김을 가스렌지 제일 약한 불에다 쓱 구워서 간장이나 김치를 적당히 활용하여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 어쩌다 기름에 제대로 구은 김이 밥상에 오르면 바삭하게 쌀밥 위에 올려 젓가락으로 밑 부분을 잡아 쌈처럼 떠올려 먹는 게 제격이다. 밥과 김만으로 충분히 맛있었다.
언제부터 가스렌지를 썼는지는 기억이 희미하고, 그 전에는 연탄불에다 김을 구워먹었다. 아마도 나는 어렸을 것이기에 직접 연탄불에 손을 대기보다 어머니, 지금과 다른 젊은 어머니가 연탄아궁이에서 김을 솜씨 좋게 구워내는 걸 감탄하며 지켜보지 않았을까.
연탄불과 관련된 나의 추억은, 정확한 나이는 기억이 나지 않고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인 것이 확실한 아주 어린 날, 집이 빈틈에 달고나를 만들어 먹겠다는 일념에 사기 접시를 연탄난로 또는 연탄아궁이에다 올리고 거기에 설탕을 부어서 녹이다가 까맣게 그릇과 함께 태운 적이 있다.
김 태운 어리석은 며느리의 우화를 그 즈음에 듣지 않았을까.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는 시어머니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어리석은 며느리는 석쇠 위에 김을 올려놓고 우물에 물을 뜨러 갔다. “불 위에 뭘 올려놓으면 익을 때까지 쳐다만 보지 말고 그 사이에 딴 일을 하라”는 시어머니 말씀을 실천하려고 한 것. 결과는 어린 내가 사기그릇을 태워먹은 것보다는 나앗지만, 우화의 주인공이라 이야기 속에서 크게 망신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억 속의 맛은 언제나 더 맛있다


어린 나에게 당시 우화의 교훈은 뻔하고 미련퉁이 며느리가 밉상으로 느껴졌지만 지금에서야 그 며느리가 측은하게 여겨진다. 어린 나처럼 개인적 욕심에 의한 일탈이 아니라, 가르침에 순종하며 열심히 살려고 노오력하였다가 빚어진 실수이었기에 말이다. 김같이 금세 타는 걸 석쇠에다 구을 땐 예외적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걸 모르는 며느리. 그 상태에서 우직하게 시킨 대로 했다가 일을 망쳐버리고 만 며느리의 모습이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쳇말로 인생이란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네 삶이 며느리의 분투와 닮았다.
세상이란 변한다. 연탄아궁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그 미련한 며느리처럼 아궁이에서 잔불을 꺼내 그 위에다 석쇠를 올려 김을 구웠다. 향이 빠지지 않게 두 장씩 겹쳐서 구웠다고 한다. 요즘엔 많은 가정에서 김을 직접 굽기보다 진공 포장된 구운 김을 사다가 그때그때 뜯어서 먹게 되었으니 미련퉁이 며느리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시어머니에게서 사랑받을지 모를 일이다.
맛도 바뀐다. 붓으로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정성껏 구워낸 김이 요즘엔 별로 맛이 없다. 나트륨을 기피하는 세태 때문일 수도, 입맛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냥 맨 김을 고소하게 구워서 적당한 크기로 찢어서 먹는 게 요즘 내 입맛에 맞는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구워준 그 김의 맛이 부인되지 않는다. 넉넉하지 못한 시절의 그 김이나 김을 올린 그 밥, 김밥천국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저 평범한 모양의 소풍 날 그 김밥은 사는 동안 가장 맛있는 김과 김밥으로 기억될 것이다. 기억 속의 맛은 항상 현실의 맛을 능가한다. 기억이란 겨울바다 김발에 해태가 배듯 세월의 천고만난, 혹은 기쁨과 행복마저 차곡차곡 엉기어 펼쳐내기 때문이다.

글ㆍ안치용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많다.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생/청소년과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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