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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790리에서 찾은 고려의 ‘흔적들’
중국 3,790리에서 찾은 고려의 ‘흔적들’
  • 윤상민
  • 승인 2016.07.0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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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와,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동쪽으로는 금(金)과 접해 있다. 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가는데 모두 3,790리다. (…)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쪽으로 450리이며 요수 동남쪽으로 480리에 있다.”

- 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고려 국경까지 3,790리’.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고대평양위치연구팀을 이끌고 있는 복기대 교수를 사로잡은 구절이다. 고고학자로 20년 넘게 중국 곳곳을 누빈 그지만, <선화봉사고려도경>(1)(이하 <고려도경>)의 이 구절에 끌려 답사팀을 꾸려 이 여정을 되짚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답사팀은 막중한 임무를 띤 서긍의 국신사 일행이 여덟 척 배로 저장성(浙江省) 연안 항구에서 떠났고, 황해를 건너 전남도 근해에 들어와 다시 예성강까지 북상하는 노선을 이용해 고려에 들어간 사실에 주목했다. 요가 고려와 송 사이에 끼어있어, 육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국 영토였던 육로에 대한 서긍의 기록은 간략하다. 송의 수도에서 고려 국경에 이르는 3,790리가 육로라는 것과 지명 정도. 답사팀은 기록된 지명을 좀 더 효과적으로 복기할 방안을 고민해야 했고, <고려도경>이 쓰인 2년 후인 1125년에 기록된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2)(이하 <봉사행정록>)을 대조하기에 이른다.  
답사팀은 카이펑(开封)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이동하며 변화하는 지형과 기후를 국신사 일행이 경험한 대로 체화하기로 했다. 3,159리 중 선양(沈阳)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계획했다. 왜 선양까지인가. <봉사행정록>의 허항종(許亢宗) 일행은 선양까지 와서는 북쪽으로 이동한다. 금의 수도가 지금의 하얼빈 쪽이었기 때문이다. <봉사행정록>에도 선양을 거쳐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통저우(同州) 근처의 큰 산을 신뤄산(新羅山)이라 부르고 이 산이 고려와 경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봉사행정록>의 노선을 따라가며 답사팀은 송나라부터 고려 국경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 고증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사실 고려 국경 문제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검토나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교과서도 고려 국경이 압록강에 미치지 못한다고 못 박은 주류학계 의견을 토대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답사는 새로운 국경 관련 문헌자료가 있어도 검토하지 않던 학계의 풍토에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이의를 제기한 모양새다. 즉 인문지리적·역사문헌학적 고증에 나선 실험적 시도인 셈이다. 복 교수는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의 위치나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지가 만주 어딘가에 있다면 고려시대 국경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고 말한다.
“고려시대 국경을 지금의 압록강에서 원산만이라고 볼 때, 서경은 반드시 지금 평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모든 기록에 서경은 평양에 설치했다고 돼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얘기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고려시대 국경 문제에 대한 가장 적확한 기록이 서긍의 <고려도경>이고, 여기에 3,790리라고 명시돼 있다면, 지금처럼 정확히 계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한 번 검토는 해봐야죠.”
그는 <봉사행정록>에 금나라 ‘상경’으로 가는 노선과 고려로 갈라지는 기점인 ‘신민’까지 따라가다 보면 고려 국경선이 어디인지 잡힌다며, 고려 국경선 안에서 다시 평양 논의를 하면 고구려 평양을 이야기할 때 상당히 유연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출국 전날까지 이어진 회의로 지친 몸을 이끌고 8명의 답사팀이 지난 4월 16일 새벽 인천공항에 모였다. 목적지는 허난성(河南省) 정저우시(郑州市). 3시간 남짓, 짧은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해 대절한 미니버스를 탔다. 복 교수가 카이펑이 아닌 정저우에서 일정을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 정주 상나라 시대 토성벽 (허난성 정주시) ⓒ 전성영 작가
 
 
“현재 중국에서 토성 축성법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은 정저우와 뤄양(洛阳)입니다. 한나라는 이 양식을 고수했는데 토성 벽 두께가 방죽인지 성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두텁죠. 상나라 초기 도읍인 정저우와 말기 도읍인 안양(安陽)에 그 토성 유적이 남아 있는데 토성은 벽돌성이 생기면서 사라졌어요. 반면 북방민족이 활동한 만주 쪽 토성은 벽이 매우 얇은 편입니다. 북쪽으로 이동하면 이런 토성 양식은 보기 힘들어질 거예요. 북방민족이랑은 문화가 다르니까요. 정저우 일대는 사방 어디를 봐도 산이 없고 지평선만 끝없이 이어져 있죠? 기후도 따뜻하니 농사도 잘되고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 예로부터 ‘중원’이라 했습니다. 이런 지형, 이런 기후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과 산이 많은 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은 분명 달랐을 겁니다. 오늘부터 선양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북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몸으로 그 감각을 익혀보길 바랍니다.”
 
 
▲ 은허박물관 왕비 부호묘 (허난성 안양시) ⓒ 전성영 작가

한족의 물 숭상과 북방민족의 하늘 숭배

정저우에서 <고려도경>의 출발점 카이펑까지 이틀간의 여정은 이렇게 몸으로 익히는 지리, 지형, 기후 감각 훈련에 박물관 학습이 더해졌다. 현재 중국 고고학 편년의 기준점이 되는 허난성 박물관부터 은허시대 유물이 방대한 3개 구역으로 나뉜 은허박물관, 문자박물관을 들렀다. 한 곳이라도 며칠 여유를 두고 보고 싶은데 두세 시간 밖에 머물지 못하는 제약이 연구자들의 마음을 못내 무겁게 했다. 허난성 본 박물관이 내부수리 중이어서 임시박물관에 전시한 청동기시대 유물을 들여다보고 있던 연구자들을 복 교수가 불러 모았다.
“여기 진묘수(鎭墓獸) 모습이 특이하죠? 당삼채라고도 하죠. 정수리에 외뿔이 있어요. 2,000년 전부터 이런 조형물들이 나옵니다. 홍산문화에서는 보편적으로 나왔어요. 고구려에도 많고, 일본에서 영물이라고 하는 고마이누도 외뿔이죠. 그런데 인도 불상은 머리에 상투가 없습니다. 당나라(북방)에서 상투가 생기기 시작했죠. 불교가 북쪽으로 넘어가면서 신적 상징인 상투가 도입되기 시작한 겁니다. 결국 외뿔은 북방민족의 특징이라는 것이죠. 조선의 해태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중원의 한족과 북방민족의 상이한 문화를 유물 하나로 쉽게 설명하는 복 교수의 모습에 연구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서 은허박물관에서는 상나라 왕 무정(武丁)의 왕비 부호(婦好)의 거대한 묘로 향했다. 지하 깊숙이 파내려가 비스듬히 경사진 길을 따라가면 정중앙에 묘실이 있다. 주변에 순장된 사람 뼈와 개 뼈가 있다. 복 교수가 흩어져 있던 답사팀을 호출했다.
“지금 보는 대로 한족 계통 무덤은 땅속 깊이 파내려갑니다. 반면 북방민족은 묘실이 하늘로 올라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표면에 가깝습니다. 신라 왕릉도 깊지 않아요. 지표에서 조금 내려가고 봉토를 씌우는 형태죠. 여기서 우리는 신화 속 상상의 동물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한족이 숭상하는 용은 물의 신입니다. 북방은 새를 숭배해요. 하늘과 소통하려 하고, 한족은 땅과 소통하는 겁니다.”
답사 사흘차.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던 지평선을 보다가 허베이성(河北省)에 들어서면서 지형이 바뀌는 것이 눈으로 확인된다. 차창 너머로 산들이 줄지어 늘어선 타이항(太行)산맥이 나타난다. 송나라 사신도 이 길을 통해 고려에 갔을 터. 고속도로가 없던 옛날에는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갔으니 직선거리 100km는 300km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 답사팀은 국도로 이동했다. 허베이성 성도 스자좡(石家庄)(3)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스자좡에서 웅주 바이거우(白沟), 가오베이디엔(高碑店), 주어저우(涿州)로 가는 코스를 밟아야 했지만 전국시대 후기 연나라 토성 형태를 확인하느라 연하도로 알려진 이시엔(易县)으로 갔다가 주어저우로 들어갔다. 
주어저우에서 량샹(良乡), 다싱(大兴), 통저우(通州)를 거치면서 베이징을 통과하는 길로 들어섰다. 구불구불 산길의 연속이다. 사신들은 수레를 타고 금나라 황제에게 바칠 진귀한 물품들을 가득 실은 채 이 길을 걸었으리라. 예전에 길을 낼 때는 하천을 따라 길을 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구불구불 오르는 산길 옆에도 하천이 흐르고 있다.
 
▲ 위양 옛거리 (고구려 모본왕 진출지,허베이성)
   

 

 
 
 
 
 
 
 
 
 
 
 
 
 
 
 
 
 
 
 
 
 
문헌자료보다도 더 중요한 유적의 흔적

답사 일정의 반환점을 돈 나흘차 일정 역시 새벽 6시 출발이다. 답사팀 모두가 피곤에 찌든 상황이지만 혹시 고대 지명이 나오지 않을까 전방을 주시한다. 차가 출발하고 10여 분쯤 흘렀을까. 갑자기 차 안이 술렁인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청나라 때 위양(漁陽)군이 있었던 광장에 도착한 것이다. 급하게 주차를 하고 모두 내린다. 바로 이 길이다. 송의 사신들이 사행길을 떠나며 지났던 길이. 종을 치던 망루가 보존돼 있고, 그 앞으로 광장도 잘 재건돼 있다. 망루 좌우로 저잣거리도 있다. 벌써 문을 연 가게들도 보였다. 아침 광장에는 태극권으로 심신을 수련하는 사람들, 바쁘게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그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노점상들까지 활기가 넘친다. 답사를 떠나고 사신들이 건넜던 강을 건너고 그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북행하고 있지만, 보존된 옛 유적이 주는 느낌은 또 새롭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위양을 산해관 근처로 추정하고 있는데 오늘 잘 보존된 위양 고루를 발견함으로써 이 지역을 중점으로 그 시절의 지명을 고증할 필요성이 생긴 셈이다. 북쪽 지명 고증을 위해 내몽골 지역까지 고증해야 할 수고를 던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위양 북쪽을 얘기하며 북방민족을 언급했는데, 지금 위양 고루는 산해관에서 남쪽으로 한참 내려온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 연구, 역사지리 연구에 유연성이 기대되는 순간을 연구자들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요기를 하고 오늘의 목적지 노룡새로 향했다. 희봉구 일대는 난하가 연산을 통과하며 만든 하곡인데, 노룡새였다고 추정되는 2개 지역 중 하나다. 새는 아주 험한 연산이 지나가는 데 가장 낮은 부분에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를 의미한다. 꽤 높은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 마주한 노룡새를 보고 복 교수가 답사팀을 불러 모은다.
“노룡새는 후한부터 당나라 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고 있는 이 성벽은 명나라 때 유적입니다. 희봉구는 명·청대 명칭이죠. 벽돌로 쌓은 장성 벽은 명·청대 양식이지만 맨 아랫부분이 어느 때에 쌓은 것인지 흔적을 찾지 못하니 희봉구에 노룡새라고 이름을 붙인 거죠. 당나라 때는 흙과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명나라 때는 벽돌로 성벽을 쌓았어요. 이건 명장성이고 노룡새가 될 수 없는 겁니다. 후한 말 조조가 노룡새를 나가 오환을 토벌하고 갈석산에 올랐다고 하는데, 갈석산은 여기서부터 150km나 떨어져 있으니 이곳이 노룡새가 아닌 게 확실한 거죠.”
첫 번째 노룡새를 눈으로 확인한 답사팀의 얼굴에 일정을 시작한 지 나흘 만에 처음으로 미소가 만연했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50대 현지 주민은 물에 잠긴 이곳이 마을이었으며, 댐을 만들면서 마을이 수몰됐다고 설명한다. 명·청대 성벽이 이어지는 라인이 명확하고 관문 자리도 확인했다. 두 번째 노룡새 후보지는 여기에서 150km 떨어진 곳이다. 과연 답사팀은 그곳에서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 영평부성 서문 - 성문 내부의 수레 출입 통제장치 (명나라 성곽, 고려도경. 봉사행정록) ⓒ 전성영 작가

 

답사 닷새째, 비교적 성벽이 잘 보존된 옛 영평부 터에 도착했다. 옌지(燕薊)부터 사행길을 따라오며 위양 고루 같은 유적이 남아 있다면 금상첨화지만, 역사적 표지물은 몇 개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평부 성(城)이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여기가 역사적인 기점이 된다는 의미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 사신들이 반드시 들렀다던 고죽신사가 있다. 복 교수의 설명이 시작된다.
“고고학에서는 세 가지 명제를 명심해야죠. 첫째, 산골 부자보다 바닷가 거지가 낫다. 둘째, 모든 상업은 저잣거리에서 이뤄진다. 셋째, 상업이 발달한 곳에서 부강한 나라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중국 사료를 보면 보통 40만 호가 한 주(州)를 이룹니다. 인구 100만 정도가 한 행정구역이라는 건데, 역사책에 나오는 행정구역이 보존돼 있다면 꼭 체크해봐야 합니다. 건축은 시비 거리가 많기에 왜 이곳에 건물을 짓는지 정당성 확보를 위한 기록을 남기기 때문이에요. 영평부는 베이징에서 나오든 카이펑에서 나오든 반드시 경유하는 지역입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뚫려서 잘 안 오게 되는 지역이죠. 그렇기에 더욱 유심히 봐야 합니다.” 복 교수가 성벽을 뒤로 하고 생생한 강의를 이어갔다.
“고고학 기준의 첫 번째는 산과 강 같은 자연지물, 두 번째는 성과 같은 대형 축조 건물, 세 번째가 무덤, 네 번째는 갖고 움직일 수 있는 유물입니다. 처음 세 가지 유적에 따라서 네 번째 유물은 교역에 의한 걸로 판단해야지 네 번째 유물이 처음 세 가지 유적을 거역할 수는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만리장성이 갈석산에서 시작했다고 문헌에 나오면 우선 갈석산을 찾고 만리장성의 흔적을 찾은 후 근처 유적을 찾는 것이 순서입니다. 전 세계 고고학에서 같은 원칙을 적용해요. 또 하나, 문헌 기록이 충분히 나왔으면 거기에 준하고 반복되면 의거해야 하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문헌, 자연 지형지물, 거기 버금가는 유적군이 있는데도 그게 무시되고 앞서 기록된 문헌자료를 우선시하죠. 전 세계에서 일본과 한국에서만 취하는 방식입니다.” 복 교수는 지난해 국회에서 고고학 원칙을 발표했지만 주류사학계는 역시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 만리장성 (명장성) - 허베이성

북방 민족의 어렴풋한 흔적들 

영평부 성벽에서 멀리 내다보면 낮은 둔턱이 쭉 이어져 있다. 구불구불한 산길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사신 일행이 조금이라도 일정을 줄이려면 저 정도 둔턱은 넘었을 것 같은데, 과연 답사팀이 사신들의 발자국을 옳게 따라가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복 교수가 답을 내놓는다.
“행장은 수레를 기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낮은 둔턱이지만 수레로는 무리죠. 직선거리가 100km라도 실제 사행길은 2~3배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 사이 임찬경 연구교수와 이인숙 연구원이 맨질맨질 닳아버린 성문의 바위들을 보며 수레의 좌우 폭을 추정했다. 영평부를 한창 관찰하는데 동네 주민이 다가온다. 몇 해 전 이 근처에 전국시대 돌성이 발견됐는데, 성 모양이 특이하다고 얘기한다. 돌발 상황에 거리를 보고 잠깐 들러 확인하기로 한다. 이동해 차를 세우고 30여 분 가파른 산을 오르니 과연 돌성이 나타난다. 축성방식이 한족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검색을 해보니 2009년 전국지인 <중궈신원왕>에 ‘허베이성 친황다오(秦皇岛)시 푸닝(抚宁)현에서 전국시대 성체가 발견됐다’는 기사와 지방지 <친황다오신원왕>에서 ‘양자옌산춘(杨家燕山村)에서 산성, 소나무, 고인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모두 산성의 건축 시기를 전국시대로 보고 있다. 하지만 복 교수의 눈썰미가 매섭다. 여기저기에서 토기편들을 찾아내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돌의 깎인 모양새, 사방위를 한참 체크한다. 드디어 복 교수가 답사팀을 모으고 설명을 시작했다.
 
 
▲ 양자옌산춘 고성 정상에서 출토된 홍산문화 토기편 (홍산문화 후기 제사유적 추정,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푸닝현 ⓒ 전성영 작가

  
▲ 양자옌산춘 고성 정상부 유구 수습 토기편-홍산문화,소하연문화,
하가점문화(홍산문화 후기 제사유적 추정,허베이성 친황다오도시 푸닝현) 
“여기 토기편이 보이죠? 한 꺼풀을 입혔습니다. 전형적인 홍산문화 후기 토기편입니다. 소하연문화에서도 비슷한 토기가 출토됩니다. 여기에 찰진 회도들이 보이죠? 이건 전국시대 것이 맞아요. 비교적 가볍죠. 그런데 여기 띠무늬가 있는 토기편들은 반드시 하가점 하층문화부터 나옵니다. 그 전에는 민자 무늬죠. 토기 분류를 해보면 전국시대 회도가 가볍고 얇은 특징이 있는데, 여기 토기편을 보면 홍산문화 후기부터 소하연문화, 하가점 하층문화까지 두루 나옵니다. 산성의 돌 쌓는 방식은 고구려까지는 못 갑니다. 고구려는 돌을 다듬어서 쓰죠. 여기는 돌을 툭툭 쳐서 떼내어 쌓았는데 이런 형식은 하가점 하층문화권인 츠펑(赤峰) 쪽에 가면 수십 채가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이게 북방문화권 사람들이 쌓은 거란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가 설명을 이어간다. “여기 성벽 안에 돌로 터를 쌓은 게 보이죠? 이건 절대 군사시설이 아닙니다. 여기서 보면 동서남북이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북두칠성이 저 뒤로 걸리면 계절을 판단하고 때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돌 터를 보면 이 유적은 적어도 방향을 고려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죠. 제 답사 경험상 통상적으로 북쪽으로 보이는 저 산과 건너편 산에도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지금 토기편을 보면 거의 기원전 3,000년 가까이 올라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방 사람들의 전통과도 일치하니까 이 유적이 어느 시기에 속하는지 추정할 수 있는 거죠. 최근 이 부근이 소하연문화권에 들어간다는 발표가 학계에서 있었어요. 다만 홍산문화 토기편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토기편들은 여러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무늬가 있는 토기들은 기원전 2,500~2,000년의 하가점 하층문화 토기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큰 토기편은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홍산문화 토기에 속한다. 홍산문화 토기로 추정되는 토기편은 줄무늬가 거의 보이지 않고 하가점하층문화 토기편부터 띠무늬가 보인다. 전국시대 것들은 얇은 회색 토기편으로 기원전 500~400년으로 보는 것이 학계 중론이다. 돌을 쌓아 성벽을 만든 방식 또한 복 교수 설명대로 홍산문화와 축조 방식과 유사하다. 더 세련되게 돌을 다듬은 하가점 하층문화와는 다르다. 어쩌면 새로 역사를 써야 할지도 모르는 발견 앞에 답사팀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답사 엿새째와 마지막 날은 지금도 남아 있는 102번 국도를 타고 사행길을 따라갔다. 이동하며 표지판에서 고대 지명을 찾아 지도에 표시하느라 바쁘다. 한 가지 더 신경을 쓴 부분이 있다면, 작은 강들을 확인한 것이다. 강 근처에서 성벽을 발견하기도 했고, <봉사행정록>에 등장하는 지명과 비슷한 지명을 찾기도 했다. 지나가는 십여 개 다리의 정보를 모두 사진에 담았다. 강을 체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예전에는 물길에서 도시가 형성되고 군사작전을 할 때 물을 건너는 일이 많았다. 부교를 놓을 수 없는 곳은 상류로 군사를 돌린다. 물길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면 지리고증에서 비교적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복 교수는 우리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강을 언급했다.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난하, 대능하, 요하 이 세 강을 연구합니다. 소릉하나 구하 같은 지류들은 연구하지 않아요. 이걸 다 찾아서 거칠게라도 수계 조사를 해 두면 고대사 연구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어요. 강 근처에는 꼭 유적지가 있고, 특히 강과 산이 어우러지는 곳에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장풍득수(藏風得水)라는 풍수지리사상은 북방에서 일어난 거지 중원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요. 우리 고대사 논쟁이 지리를 기반으로 했다면 불필요한 논쟁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학계에서도 지리가 두어 번 변화했다고 인정하지만 거기까지에요. 더 깊이 연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번 답사에서 본 구하가 굉장히 넓은데 대릉하와 비교해 어느 강이 더 큰 강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실제로 와본 연구자들만이 답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인 조선 후기 선비들의 논쟁으로부터 한사군이 지금 평양에 있다는 주장들과 낙랑군 논쟁까지 300년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거죠. 저는 제 주장이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에 근거해서 논의를 해보자는 거죠. 문헌 기록에 산해관 근처에 한사군 있었다면 그 과정을 설명해야지 왜 덜컥 한반도 평양으로 가버린 것인지도 설명해야 하고요.”
복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9개째 다리를 건넜다. 대릉하에서 요하 사이에 소양하가 있다. 이 강은 길이는 굉장히 짧은데 하구 폭은 꽤 넓다. 연이은 가뭄으로 강은 말라 있다. 이어 유하를 지나면서 복 교수가 이 근처에 장성이 있다고 설명하자 박시현 연구교수가 문헌에서 장성을 본 구절을 외운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 답사 내내 구글맵을 실시간으로 띄워 답사팀 위치 확인에 톡톡히 한 몫을 한 복식 전공자 염정하 연구교수도 버스에서 내려 강 하구를 사진에 담는다. 요하의 여러 명칭 중의 하나인 거류하 대교에 내려 또 정보를 사진기에 담았다. 마지막 날은 이 지류들이 합류하는 지점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답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드러난 역사의 퍼즐 조각… 
과연 고려 국계는 어디?
  
다시 <고려도경>의 기록을 들췄다. 송 수도로부터 3,790리라 했다. <봉사행정록>은 카이펑에서 금 상경까지 4,300리,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국계가 3,790리였다. 그런데 금국으로 가는 사신은 약 3,700리 지점에서 고려 국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90리쯤 차이가 난다. 아마도 신뤄산은 금나라로 가는 사람들이 볼 때 아득히 멀리 보였을 것이다. 카이펑을 출발해 29일 만에 멀리 보이는 큰 산을 본 것이다. 그러니 금나라 영토에서 멀리 고려를 봤을 것을 고려한다면 90리가 큰 차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복 교수는 토론하는 답사팀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고려의 국경선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답사를 시작할 무렵 윤한택 연구교수가 차분한 어조로 고려 국계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것이 생각났다. 서긍이 말한 고려 국계가 짐작이 갔다. 지린 하다링을 신뤄산으로 불렀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하지만 이제 작은 역사의 퍼즐 조각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호텔로 돌아와 귀국 준비를 하며, 이번 답사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 북한과의 공동연구 필요성이다. 개성공단이 폐쇄될 만큼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을 맞이한 현 시점에서는 요원해 보이지만, 한국학은 북한과 합치지 않으면 반쪽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최근 역사왜곡에 앞장서는 북한을 보면 그 시기가 당겨지길 바랄 뿐이다. 둘째, 유물 중심의 한국고고학계가 문헌고증에 보다 유연해졌으면 한다는 점이다. 유물로 문헌을 고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헌고고학이 약한 한국학계의 현실을 보면, 고조선연구소의 이번 답사는 의미가 있다. 랑케의 실증사학이 일제 식민사관에 영향을 끼쳤다지만, 성서고고학처럼 유물과 지형지물, 텍스트의 대조과정을 통하면 한층 더 역사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다.
마지막 바람은 현재 박사과정에 있는 김영섭 연구원의 말처럼 ‘젊은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이다. 학문의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적절한 경제적 지원이다. 고문헌 연구에서 늘 제기되는 문제인 한글번역본 부재로 인한 시간적·경제적 소모는 두 말할 것도 없다. “현장에 나오면 문헌에서만 본 기록들이 몸으로 체화되는 느낌”이라는 김 연구원의 말을 들으면, 젊은 연구자들에게 좀 더 체계적인 연구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여기까지가 고조선연구소 답사팀과 일주일을 동행한 기자의 거친 기록이다. 벌써부터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과제와 연관해 답사 전 설립한 가설을 현장에서 보고 수집한 자료들로 재검토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각 연구주제가 논문 형태로 학계에 발신될 것이다. 국가예산을 지원받은 답사이기 때문이다. 공개 자료인 이 논문들에 대한 학계의 반응과, 후속 연구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글·윤상민 cinemonde@ilemonde.com
프랑스 프로방스대에서 영화이론으로 석사를 했다. SBS에서 불어통역을 했고 교수신문에서 학술담당기자로 글을 썼다. 현재 본지에서 학술 및 영화관련 글을 쓰고 있다. 공저로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 40>(휴머니스트, 2016)이 있다.
 
 
(1) 1123년, 고려 예종이 흉거했다는 소식이 송 조정에 전해지고 200명이 넘는 대규모 송 사절단이 고려를 한 달간 방문했다(이동 기간을 포함하면 석 달이다). 국신사 일행의 일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은 사신의 필수 임무가 견문보고서 작성이라고 인식하고 고려의 역사와 제도, 문물과 풍습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수집해 그림을 그리고 글로 지어 1124년, <선화봉사고려도경>(이하 <고려도경>) 40권을 송 휘종에게 바치고 한 부를 더 만들어 집에 보관했다. 하지만 1127년 송 흠종과 상제인 휘종이 금의 포로가 되는 ‘정강의 변’을 당해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북송이 멸망함에 따라 <고려도경>도 소재가 불분명해졌다. 이때 그림은 모두 소실됐고, 서긍 사후 그의 조카 서천이 발견해 판각한 <고려도경> 송본(宋本)은 발견된 지명을 따 ‘징강본(澂江本)’이라고 한다. 징강본 1931년 판본이 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가 이화여대 이화사학연구소에서 1970년 다시 영인하며 국내에 알려지게 됐다.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지만 징강본이 가장 권위가 있다고 인정된다.
(2)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이하 <봉사행정록>)은 금 태종 즉위식에 송 사신으로 파견된 허항종(許亢宗)이 금을 여행하는 동안의 일정을 기록한 기행견문록이다. 전술했듯이 서긍은 육로를 거치지 못했다. 하지만 허항종은 당시 송의 수도 카이펑을 출발해 선양을 거쳐 당시 금나라 수도인 하얼빈 남동쪽 아성(阿城: 당시 지명 금 상경)까지 육로로 이동했다. 답사팀은 여기에 주목했다. <봉사행정록>의 사신들이 간 육로가 고려 국경까지의 거리를 확인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록 시기로 따져보면 불과 2년. 사신단의 육로가 크게 바뀔 리는 없는 시간이라 판단했다. 허항종은 송의 수도 카이펑에서 웅주까지 1,150리를 22일간 걸었다고 <봉사행정록>에 기록했다. 역시 자국 영토이기에 자세한 기록은 없고, 웅주부터 3,159리, 39일간의 기록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3) 스자좡은 전국시대 중산국 영역으로 중국 한족과는 구별되는 문화를 보이기에 최근 각광받는 연구지역이다. 중산국은 섬서성에서 산서성 북단을 거쳐 태항산맥 동록을 따라 허베이성 남부로 내려온 민족이 세운 국가라는 의견도 있다. 묘제를 봐도 산처럼 봉분을 올리는 등 중원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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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민
윤상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