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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트 아트의 도발성과 저항정신
스트리트 아트의 도발성과 저항정신
  • 필립 파토 셀레리에
  • 승인 2016.09.0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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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주택가 클레(2010)

오랫동안 조롱당하던 그라피티, 태크, 스텐실은 그 명성을 획득했다. 8월 파리 근교 센생드니 주에서는 ‘93번 주의 가장 아름다운 그라피티’라는 가이드투어를 기획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저항정신을 포기한 거리예술가들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거리예술가들은 돈에 회유 당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벽에 붙은 포스터가 “나쁘지 않은데”라고 외친다. 1950년대 로베르 두아노가 촬영한 사진 <시청 앞에서의 키스>를 재현했다. 태평하고 행복한 젊음을 상징하는 이미지 위에 두 개의 핏자국이 더해졌을 뿐이다. 2015년 11월 13일 테러 사건 이후 파리 11구에 있는 바타클랑 극장 주위로 그라피티, 스텐실, 콜라주, 세라믹, 사진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벽면, 버스정거장, 안내판 등 어디도 예외가 없었다. 현지 그라피티 아티스트 집단인 그림팀은 파리의 역사적 표어, “Fluctuat nec mergitur(흔들릴지라도 가라앉지 않는다)”를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공사장 가림막에 그려 넣었다. 벽은 우리가 더 이상 듣지 않는 목소리를 다시 한 번 전했다. 도심지에서는 흔한 일이다. 제3공화정 시절 경찰청이 불온한 문구나 스케치를 지우려고 쓰던 납작한 페인트 붓은 사라졌으나, 그라피티는 남았다. 아니 더 나아가 오늘날에는 소셜네트워크 내 가상의 담벼락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그라피티의 정체는 그라피티의 용도만큼이나 인식이 좋지 않다. 그라피티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소유자와 피소유자라는 기존 질서에 저항하면서, 파괴적이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도시 공간의 불법점유를 신성화한다. 하지만 돌 위에 분필로 쓰여진 과거의 낙서는 오래 가지 못했고, 이것은 기득권자들의 영광을 기리는 건물과 기념물에 박힌 균일한 글씨와 대비됐다. 그리고 체념 섞인 묘비명을 연상시키는 비실비실한 글씨는 피지배자의 표식이 됐다. 이는 권력이 시민에게 약속한 도시 연대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려는 문자적 충동이다.
그러나 때로는 사상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이 원시적인 낙서가 관심, 그것도 미학적 관심을 일깨운다는 사실이 더 흥분되는 일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미(美)는 여전히 도덕적인 문제였고, 미술관을 벗어나 거리에서 홀로 꽃피울 수 없었다. 제도권은 소수의 사람들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배치하고 진열했다. 미술관은 규정짓고 규제했다. 우리의 시선은 제도권에 의해 이미 보도록 길들여진 교육에 따라 작품을 보았다.
사진작가 브라사이의 서정적 시선과 잡지 <르 미노토르>의 초현실적 상상의 세계가 등장하고서야 도심 그라피티가 처음으로 관심을 끌었다. 1993년, 파리의 그라피티 사진 10여 점이 출간됐다.(1) 그렇지만 그 이후로도 수년이 흐른 뒤에야 거리예술은 다다이즘, 원생미술, 상황주의, 플럭서스를 비롯해 그 영향으로 미국에서 발생한 팝아트, 서정추상, 장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잭슨 폴록 등 위대한 표현적 권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예술적 표현 방식으로 간주됐다. 
거리예술은 도시의 새로운 도전에 적합한 기법(스텐실, 에어로졸 스프레이 캔)이 등장하면서 발전했다. 1968년 5월, 거리에 걸리거나 거리를 배회하던 슬로건이 “벽이 말하다”였던 것은 표현하려는 주장을 담아낼 수 있는 인쇄 기술(스크린 인쇄, 포스터, 콜라주 등)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공간인 거리는 만인이 접근할 수 있고 또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훌륭한 매체였다. 그러나 그라피티는 거리라는 매체가 필요했고 또한 관계도 형성돼야 했다. 거리예술은 보이고 느껴지고 더 나아가 만져질 수 있어야 했고 이는 작품들과 거리를 두게 만드는 전용 공간을 벗어나 거리예술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 베를린 크뢰츠베르그(2007)의 건물들에 그려진 스트리트 아트

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온 최초의 예술

제라르 즐로티카미앙과 함께 ‘어번 아트’의 시초가 된 조형예술가 에른스트 피뇽-에른스트는 “재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재를 재현해야 한다. 상황으로 작품을 만들어야지 상황 속에서 작품을 만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1971년부터 파리코뮌의 사형수들 사진 수백 장을 실물 크기로 스크린 인쇄해 파리의 바닥에 붙였다. 앙드레 벨테르에 의하면, “한 세기 전에는 그들의 피가 말 그대로 몽마르트 거리를 따라 흘렀던 곳”이다.(2) “이토록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단순한 관람객에 머무르지 않고 습관처럼 다니던 길에서 한 걸음씩 내딛으며 예술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자 정치적으로 발견된 곳을 경험하는 행인들도 생겼다.” 예술은 일상생활 속으로 불법 침입했다. 처음으로 예술이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찾아왔다.
수십 년이 흐른 후, 사방이 막힌 공간을 벗어나 야외로 나온 스트리트 아트, “피부 위에 걸쳐진 옷처럼 도시와 한 몸이 돼 도시예술로 불리는 거리예술”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3) 하나의 명칭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존재 방식의 다양성을 반영한다. 재료와 형식, 형태뿐 아니라 목적에 따라 순수하게 자아도취적인 낙서부터, 오랫동안 미술애호가들의 무관심 또는 멸시를 받았지만 그 자체로서 목소리를 내는 예술적 그라피티를 거쳐, 그리고 사회 질서의 전복을 외치는 스텐실까지 다양하다. 1980년대에 행인은 벽 앞에서 낙서, 내 공간의 불법침입자인 초기의 그라피티와 마주치곤 했다. 뉴욕 건물의 벽과 지하철, 기차에 불우한 도심 청년들이 끄적거린 초라한 시그니처 라이팅을 프랑스에 처음 도입한 사람이, 다름 아닌 미국 최대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 설립자의 손자인 필립 리먼, 일명 ‘방도(Bando)’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마스크를 쓴 조로처럼 그들은 포스카(Posca; 마커펜의 일종)로 자신의 이름을 쓴다. 잘 보이지만 읽기는 어려운 시그니처, 따라서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는 ‘무명’으로 읽힐 뿐인 시그니처로 그들은 자신들의 희미한 사회적 존재를 널리 퍼뜨리고 싶어 했다. “구별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는 행위는 반항이다. 또한 권위에의 거부, 소수자들의 지배를 의미한다. 불우한 환경의 소수 청년들이 인생을 걸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냈다. 사회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라고 미국 기록영화 제작자이자 비평가인 ‘포토그라피스트’ 헨리 찰팬트는 전했다.(4) 래퍼 로카는 후에 “나는 내 분노를 스프레이처럼 뿜어내기로 결심했어/(…) 내 모든 상처를 덮기 위해서/(…) 사람들이 나를 잊지 않았으면 해/(…) 그래도 내 자리에 표식을 남기겠어. 마치 그라피티처럼”이라는 가사를 썼다(‘그라피티’, 엘레바시온, 2001년).
낙서는 1980년대 초 프랑스 파리 도심을 습격했다. 센 강변, 1977년에 개장한 조르주 퐁피두 센터, 또는 보수 중인 루브르 박물관의 공사장 가림막은 그라피스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영광의 30년(1950~1980)’에 이어 도시화가 탄력을 받는 가운데, 미개발된 상태로 방치된 곳은 많았다. 하지만 눈에 잘 띄면서도, 도로개발국이나 부동산개발업자의 손길이 늦게 닿아 그라피티가 비교적 오래 유지될 곳은 드물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도시철도 2호선 역에 인접한 파리 북동부의 스탈린그라드 공터는 이러한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라피티스트들은 1982년부터 1993년까지, 10년 이상 이곳에서 개인 또는 집단으로 예술성 도전과 응전인 투쟁을 통해 실력을 겨루고 스타일을 다듬었다. 그 중에는 애시, 스키, 복서는 물론 명성 높은 뉴요커 존원도 있었다. 그라피티는 점점 복잡해졌다. 독창성은 인정의 보증수표였다. 방도가 보여준 정확하고 읽기 쉬운 단순한 글자(올드스쿨 스타일)에 이어 가독성보다는 복잡한 구성을 추구하는 와일드 스타일(야성적 양식)이 등장했다.(5) 선구적인 갤러리스트 마그다 다니즈는 “베를린 장벽이 1989년 붕괴되기 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듯, 스탈린그라드 공터는 유럽 그라피티의 요람이 됐다”고 평가했다.(6) 
 
 
▲ 튀니지의 2011년 학살사건에 항의하는 군중에 관한 그림

1990년대, ‘제로 톨레랑스’ 속에서 길을 찾다

그라피티는 대중화됐다. 음악, 시각, 신체(팝핀댄스, 브레이크댄싱) 등 모든 측면에서 도시 문화를 완성한 그라피티의 세계가 텔레비전에 방송되는 힙합그룹과 랩그룹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다. 1995년 프랑스 랩그룹 슈프림엔티엠의 새 앨범 타이틀은 ‘폭탄 맞은 파리’였다. 그라피티스트들의 예술적 행위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대개 사회적 사건의 영향을 받는다. 그라피티는 독특하다. 물감 폭탄을 훔치고 금지된 장소에 낙서를 남기는 등의 수단, 750볼트의 전차선에서 몇 걸음 떨어진 열차에 낙서하는 등 위험천만한 방식 등 모든 측면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혁신적인 행위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1991년 상징적 의미가 있는 루브르리볼리 전철역을 뒤덮은 낙서와 그라피티 사건처럼 말이다. 당시 지하철 이용자와 국민은 납세자로서 자신의 신분을 뼈저리게 확인하며 충격에 빠졌다. 프랑스 국영철도회사(SNCF)는 반달리즘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그라피티 전문지 <그라프 잇!>, <그라프 봄브>, <믹스 그릴>과 페인트 폭탄 제조업자를 고소하며 반격에 나섰다. 
1990년대에는 도시에 그라피티가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공권력은 수년 전 뉴욕에서 성공을 거뒀던 방법을 도입해 ‘제로 톨레랑스’를 선포했다. 그렇지만 처벌이 한층 강화된 형법에 그들의 방식을 바꾼 그라피티스트들도 있었다. 파괴적인 낙서(그들은 산성용액을 활용한 낙서를 ‘오래 가는 낙서’라는 표현으로 정정했다)를 좋아하는 ‘반달리즘 옹호자’들에게 억압에 대한 반항은 새로운 아드레날린을 분출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반면, 야간 추격전과 ‘에고 트립’과 허겁지겁 남기는 그라피티(그들의 크로키북인 ‘블랙북’을 보면 그라피티에도 사전 작업이 있었다)에 지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합법적인 벽을 배경으로 좀 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드는데 시간을 들였다. 즉 그라피티의 거대한 추상적 작품보다는 구상예술을 선호하는 건물 소유자, 작품 의뢰인의 비호 하에 좀 더 합의된 방식으로 작업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복과 합의 사이에서 중도의 길이 열렸다. 비록 허가받지는 못했지만, 공적 또는 민간 주체의 재량에 따라 부분적으로 작업이 용납된 경우다. 일시적이고 기물을 훼손시키지 않는 방법과 한층 매력적인 작품(예술가)들로 인해서 말이다. 이에 속하는 기법으로는, 콜라주(종이로 된 작품, 인베이더와 같은 모자이크)나 잉크의 독성을 조절할 수 있는 스텐실 등이 있다. 블렉 르 라(유명한 영국 그라피티스트 뱅크시에게 영감을 준 인물), 제프 아에로졸, 미스 틱, 제롬 메나제 등 유명한 스텐실 아티스트들이 1980년대부터 이 방법을 선보였고, 네모, 모스코, C215 등이 보급해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JR 등 차세대 예술가들이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 사회적 참여도가 높은 이 후계자들은 정치적 공백이 생긴 만큼 세계와 사회와 대중의 기대와 좌절을 경청한다. 그들은 최신 기술 혁신을 이용해 “스트리트 아트, 스크린 아트!”라고 응답하려고 한다. 

“가진 자들이 거리의 예술마저 
빼앗고 있다”

 
▲ 2013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작품을 판매중인 유명 거리화가 반크시의 작품들
전자영상으로 탈바꿈한 덧없는 작품들은 페이스북, 스냅챗, 인스타그램(JR은 90만 명의 팔로워 보유) 등 ‘전 세계적 SNS’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가시성과 그로 인한 명성은 SNS에서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라피티스트로서 적통성은 거리에서, 현실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보기 드문 여성 거리예술가로서, 가는 콧수염을 그리고 다니는 카싱크는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이런 관계의 끝은 대개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창작품은 마음을 끈다. 지역주민들이 참여해 건물 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 지역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로 인해 마을은 도심지 재개발과 투기의 온상이 돼버린다.” 
많은 이들이 우범지대와 동의어로 여겼던 그라피티와 낙서를 스텐실이나 프레스크가 대체했기 때문이다. 많은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들이 본래 의미를 거세한 채 벽을 도배해 버리는 비굴한 이미지”라고 비난한다. 그라피티의 근간인 자유지상주의와 해방을 추구하는 행동과 정반대되는 현상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밀집도가 높아지고 인간이 말살되는 도시화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행동의 ‘저항 정신’은 한층 강화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도시는 소비하게 만들고(광고), 안전을 확보하고(신호안내판과 CCTV), 거주민과 거주 공간의 관계에서 수익을 발생시키기 위한 기호로 가득 찬 곳이다. 많은 이들이 감금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마치 감방 벽에 낙서를 할 수 밖에 없는 수감자가 된 기분이 든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보잘 것 없는 현실에 마법을 걸어라”라고 부르짖었다. 캡 피, 그리1, 카싱크와 같은 수많은 거리예술가들이 이를 자신의 모토로 삼을지도 모른다. 클레 아브라함과 옥스는 신호표지판과 광고선전물에 그라피티를 입혔고, 프레드 르 슈발리에는 “11월 13일 이후 특히 더 호의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포스터로 파리 건물벽을 뒤덮었고, 제브는 유명 브랜드의 로고에 물방울 지어 떨어지는 페인트를 칠해 문자 그대로 흐르게 만들었고, 키덜트는 에어로졸 폭탄으로 개조했다. 소화기로 ‘거리 출신이 아닌’ 가진 자들이 거리예술을 빼앗아 가고 있다”며 현실을 비판했다. 
스트리트 아트는 하나의 시장이 됐다. 의식 있는 컬렉터이자 비영리 갤러리 아티스틱 레조의 소유자이고 다음 학기에 스트리트 예술에 관한 첫 번째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개설할 예술문화기획전문학교(Icart)의 학장인 니콜라 로게로라세르는 “프랑스에서 매년 수억 유로에 달하는 시장”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60여 개 갤러리, 10여 개 경매회사가 활동 중이다. 작품 시가는 수천 유로에서 시작해 존원이나 JR의 경우 수만 유로를 호가한다. 파장이 컸던 ‘파리 13구 투어’(7)처럼 점점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져 작품 가격도 편차가 크다. 도시예술을 확산시키려는 공적 주체와 민간 주체가 많으며, 그들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2015년 6월 문화통신부는 공식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관청 외벽을 그라피티로 장식해 달라고 그라피스트 15명을 초청했다.(8) 근처 주민들에게 미리 알리지는 않았지만 행인들은 이들의 작업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어떤 아티스트는 마스크를 쓰고 지원을 받은 전복 행위라는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다. 
많은 도시예술 작품은 맥락을 떠나면 거의 의미가 없다. 다니즈는 “갤러리는 종종 아티스트에게 프레스크화 대신 픽처 레일에 걸만한 작품을 만들라고 요청해야 한다. 하지만 성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사실 프레스크화에 담긴 상상의 세계를 시장의 기대에 맞추고, 그라피티를 화폭에 가두고, 거리라는 맥락을 닫힌 공간(닫힌 건물보다는 낫지 않은가)에 걸린 레이블(9)의 텍스트로 대체하는 일은 민감한 사안이다. 에드가 드가의 말처럼 “액자는 그림의 포주”니까, 아니 적어도 완성의 상징이니 말이다. 잡초와 같은 감성으로 펼쳐져서 자신이 놓인 곳과 자신 안에 담긴 무엇과 함께 숨 쉬며 소멸될 때까지, 누구나 볼 수 있는 거리예술 작품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글·필립 파토 셀레리에 Philippe Pataud Célérier 
저널리스트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Agnès de Gouvion Saint-Cyr, <Brassaï. Pour l’amour de Paris>, Flammarion, Paris, 2013.
(2) André Velter, <Ernest Pignon-Ernest>, Gallimard, Paris, 2014.
(3) Marie Escorne, <L’Art à même la ville>, Presses universitaires de Bordeaux, coll. “Artes”, 2015.
(4) Henry Chalfant and James Prigoff, <Spraycan Art>, Thames & Hudson, coll. “Street Graphics / Street Art”, London, 1987. Martha Cooper and Henry Chalfant, <Subway Art>, Holt, New York, 1984.
(5) Woshe, <Blackbook. Les mains dans l’alphabet>, Éditions Alternatives, Paris, 2013.
(6) Magda Danysz, <Anthologie du street art>, Éditsions Alternatives, 2015. Cf. aussi Marc-Aurèle Vecchione, <Writers. 20 ans de graffiti à Paris>, Résistances Films, Paris, 2004.
(7) www.tourparis13.fr
(8) “Oxymores” 전시회, 프랑스 문화통신부, Paris, 2015년 4월 2~26일. 2016년 프랑스가 로마에서 운영하는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 빌라 메디치에 그라피티 아티스트 듀오 렉과 소왓이 선정됐다.
(9) 미술관에서 작품 옆에 붙어있는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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