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카슈미르인들의 문화적 반격
카슈미르인들의 문화적 반격
  • 라파엘 고드쇼
  • 승인 2016.09.01 11: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47년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영유권을 놓고 세 차례 전쟁을 벌였다. 인도령 카슈미르 지역에는 특별 체제가 시행되고 있다. 7월 8일 카슈미르 분리주의 반군 무장단체, ‘히즈불 무자헤딘’의 지도자 부르한 무자파르 와니가 인도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덕분에 무장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었다. 일부 분리주의자들은 문화 자원을 이용해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인도령 카슈미르의 한 현대미술 갤러리. 2015년 1월 12일 잠무카슈미르주  역사상 최초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문을 열었다. 잠무카슈미르주의 여름 주도(1)인 스리나가르에 위치한 갤러리 ‘원(One)’은 아티스트들에게는 작품을 전시하는,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이를 보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시에드 무즈타바 리즈비는 “이곳은 카슈미르의 항구적인 예술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를 포함, 카슈미르 계곡의 주민 96% 이상이 무슬림이다.(2) 리즈비는 60여 년간 인도군과 반군 간의 전투가 끊이지 않는 분쟁 지역에서 획기적인 시도인 예술 공간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히말라야 계곡에 진주해있는 70만 군병력 때문에 카슈미르에서 예술은 존재 자체가 버겁다. 1990년 통과된 군특별권한법에 의거, 카슈미르 주둔 인도군은 면책권과 용의자 사살 및 재산 압류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리즈비는 끈기 있게 갤러리 설립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했다. 카슈미르 관광국은 리즈비에게 면적 460m²의 건물을 제공했다. 
 2015년 2월 23일 카슈미르 관광국은 예고도 없이 갤러리 원을 강제 폐쇄하면서 일부 작품을 파괴하기까지 했다. 리즈비는 “점령도 문화적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어요. 예술은 사회적, 문화적 고양을 위한 것인데, 인도가 점령지역에서 이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 이상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없는 언론
 
 그는 현재 스리나가르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카슈미르 예술가들은 시를 읽고 노래를 하고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 전통적이건 현대적이건, 정치적으로 개입하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리즈비는 “카슈미르 예술은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주장하지 않아야, 존재할 수 있다”고 씁쓸하게 말한다. 2014년 대홍수 때 스리나가르 예술대학 건물이 파괴된 이후 카슈미르 당국은 예술대학을 이전보다 훨씬 비좁은 장소로 이전했다. 스리나가르 대학복합지역에 있는 버려진 낡은 건물로 말이다.
 이 대학에서 예술사를 가르치는 쇼우캇 카트주는 일부 표현 방식은 허용됐지만, 그 이외의 것은 금지됐다고 설명한다. “전통적으로 수공업은 카슈미르 경제에 매우 중요한 산업 활동입니다. 그러나 현대예술 측면에서는  이뤄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저항정신을 표현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전시공간을 얻기가 힘든 거죠.” 
 이 같은 인도 정부의 창작활동 ‘목죄기’는 전략적이다. 리즈비는 “사람들은 우리를(카슈미르의 이슬람교도들)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폭력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싶어 해요. 그래야 뉴스거리가 되니까요. 따라서 예술가, 작가, 시인들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카슈미르 전문가인 디비에쉬 아난드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정치학·국제관계학과장도 비슷한 지적을 내놓았다. “카슈미르 분쟁은 인도인들의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어요. 카슈미르에서 누군가가 살해되면 언론이 달려들어 국가적인 문제로 확대해버리죠. 이런 식으로 인도 언론이 카슈미르 무슬림들을 폭력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의 인간성을 말살시켜 버리는 겁니다.”
 서방 언론은 이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다. “냉전 당시, 미국과 영국은 카슈미르의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반대하지 않았어요. 인도가 소련의 우방이었기 때문이죠. 당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에 저항하는데 도움을 주는 파키스탄의 우방이었고, 카슈미르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했어요. 그렇지만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인도는 서방세계에 잠재력이 풍부한 시장으로 떠올랐습니다.” 1998년부터 프랑스는 인도의 제1우방으로 등극했다. 특히 항공우주·방위산업에서 말이다. 아난드 교수는 “서구 언론에서 카슈미르 분쟁에 대한 보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인도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생각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국제 사회에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90년대 들어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무슬림들의 무장봉기(1996년 추정 5천~1만 명)(3)가 시작된 이후, 인도 언론은 카슈미르 무슬림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그려내고 있다. 아난드 교수는 “Welcome talibans” 같은 낙서 몇 개나 수천 명의 시위대 가운데 겨우 4명이 복면을 쓰고 검은 깃발을 흔드는 것을 두고, 탈레반에 대한 지원, 혹은 최근 들어서는 이슬람국가조직(IS)에 대한 지원이라고 과장하고 있다. 인도령 카슈미르에 여타 이슬람 무장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할지라도, 탈레반과 IS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주요 반군 세력으로, 친파키스탄을 표방하는 ‘히즈불 무자헤딘’ 조직과 완전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잠무카슈미르해방전선(JKLF)이 있다.(4) 현재 무장저항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는 1990년대보다 훨씬 적다.(5) 아난드 교수에 따르면, 카슈미르인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대다수는 자유를 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카슈미르인들에게는 인도에 맞서 시위대를 이끄는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일상화 돼있다. 2016년 4월 서인도 제도(카리브)의 크리켓팀이 인도에 승리하자, 일부 카슈미르인들이 스리나가르 거리에서 기쁨에 겨워 환호했고, 진압에 나선 인도군이 이들을 체포하는 사건이 있었다. 더 극적인 사례를 보면,  지난 7월, 22세의 히즈불 무자헤딘 지도자, 부르한 무자파르 와니가 인도 치안 당국에 의해 사살되면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인도군은 이를 강력 진압했다. 최소 50명의 민간인이 사살됐고, 8천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신문 발행이 금지됐고, SNS가 정지됐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수상을 배출한, 힌두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 BJP)에 있어 “카슈미르는 인도에서 반대파를 침묵하게 하는 수단”이라고 아난드 교수는 지적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인도군의 폭정, 권력 남용을 언급하는 모든 사람은 ‘반민족주의자’로 분류되고, 그들의 진보적인 언사들은 자동적으로 신용을 잃게 됩니다. 민족주의 우파는 현재 표준으로 자리 잡았어요. 의회 내에는 무슬림이나 기독교 의원이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인도의 무슬림 인구는 공식적으로 14.2%다.
 카슈미르 출신 언론인, 파하드 샤는 2001년 6월, 인도의 유력 언론들에 대항하는 또 다른 목소리로, 최초의 잠무카슈미르 지역 온라인 신문 <The Kashmir Walla>를 창간했다. “인도의 유력 언론들의 경우, 분쟁 사태를 제대로 전달하기가 극히 어렵고, 기사는 검열을 거친다.” 7월의 대규모 시위 사태는 또 하나의 반증이다. 2015년 4월에 이미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 점유 지역이 자국 관할 영토와 구분 되지 않는 카슈미르 지도를 방송했다는 이유로 5일간 알자지라 영어방송을 중단시킨바 있다. 샤는 “카슈미르에서 인터넷은  혁신적인 문물이었다”고 덧붙였다. 비록 인터넷 언론이 종종 검열에 희생될지라도 말이다.
 샤는 <The Kashmir Walla> 독자층이 주로 카슈미르 지역에 거주하는 영어가 가능한 젊은이들, 인도나 외국 거주 독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정보 조작에 맞서는 방어막이 존재한다고 한다. “기존 언론이 카슈미르 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저널리즘과 SNS는 그러한 신화를 깨부술 수 있어요. 인터넷은 카슈미르 분쟁에 관한 언론 보도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지요. 언론은 반응이 없으면 말하려는 바를 더 이상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카슈미르 지역 사회 자체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2013년 샤는 카슈미르 여성들로만 구성된 록그룹, 프라가쉬(Pragash)를 옹호했다가 SNS상에서 호된 공격을 당했다. 지역 종교기관인 무프티가 프라가쉬의 음악을 반이슬람적이라고 선언하면서 반프라가쉬 파트와(파트와는 어떤 사안이 이슬람법에 저촉되는지를 해석하는 권위 있는 이슬람 판결이다-역주)를 낸 반면, 샤는 카슈미르 지역의 전통적인 수피교의 여성 음악을 떠올린 것이다.  그에 자신에 대한 공격이 잇따랐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언론의 역할이지요. 프라가쉬에 대해 언급하면 사람들은 저에게 그만두라고 하곤 했어요. 한번은 카슈미르 지역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사가 나간 이후, 우리 기자 중 한명이 협박 전화를 받은 적도 있어요. “당신 가족이 카슈미르에 살고 있지 않는가. 더 이상 파하드와 일하지 말라.” 샤는 협박 전화를 누가 했는지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면, 우리 기사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인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거지요.” 샤의 결론이다. <The Kashmir Walla>는 계속 발행되고 있지만, 프라가쉬는 활동을 중단했다.
 샤는 카슈미르 분쟁 사태에 국제적 반향을 불러온다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카슈미르의 상황은 팔레스타인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서 국수주의적인 관점을 배제해야 합니다. 세계가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요. 중요한 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카슈미르에 대한 기사를 읽을 수 있어야, 그리고 더 나아가 카슈미르의 예술을 접하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인도 정부는 카슈미르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지역이 분리할 수 없는 자국의 고유 영토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외국 기자들은 인도에 갈 때 특정 비자가 필요 없다. 그렇지만, 기사 방향이 인도 정책에 확연하게 비판적일 경우, 당연히 그 대가가 따른다. 2011년 카슈미르 주둔 인도군대의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바사미안은 인도 입국을 거부당했다.(6)
 샤나 리즈비의 뒤를 이어 그들과 비슷한 자주적인 시도들이 잇따르고 있다. 카슈미르 최초의 래퍼, MC 캬슈(Kash)의 노래 ‘I Protest(나는 항의한다)’는  2010년 시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카슈미르 민간인 살해로 촉발된 2010년 시위는 가혹하게 진압 당했다. 시위대 112명이 사망했다.(7) 루샨 일라히(MC Kash의 본명)는 인터넷을 통해 전파된 자신의 노래에서 카슈미르를 점령한 인도를 ‘살인 정권’으로 규정지었다. 그는 “카슈미르의 전통 예술은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고통, 살인, 강간 같은 우리 세대에 영향을 주는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랩, 그래피티, 힙합문화가 바로 그러한 예다.” MC Kash는 자신의 스튜디오가 수차례 수색 당했으며, 전화는 도청당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무기 대신, 글과 예술로
인도의 점령에 항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무카슈미르 인권옹호협회인 ‘잠무 카슈미르 시민사회동맹’ 소속 쿠람 파르베즈에 따르면, 카슈미르 사회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이전 세대가 1990년대에 손에 무기를 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 세대는 무기 대신 글과 예술로 인도에 항거하는 것이다. 1990년대에도 이미 카슈미르인들은 인도 점령을 원치 않았었다. 그러나 “점령 상황으로 야기된 폭력과 도그마 때문에 저항하는 것에 겁을 냈었다. 카슈미르인들은 이제 더 이상 인도의 카슈미르 점령을 용인하지 않는다. 점령 거부가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파르베즈는 전했다. 이 때문에 랩 같은 저항 음악이 카슈미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것이다. MC Kash는 “현재 수백 명의 래퍼가 활동 중”이라고 덧붙였다. 샤는 카슈미르 분쟁을 고발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신세대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모여 활동한다. 다큐멘터리 <그를 돌려달라(Bring Him Back)>가 그 예다. 2015년 상영된 이 다큐 영화는 JKLF의 상징적 인물, 마크불 바트의 어머니가 인도 티하르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벌이는 저항 운동에 관한 이야기다. 감독에 샤, 포스터 제작에 리즈비, 음악에 MC Kash가 참여했다.  MC Kash는 자신의 투쟁 노래 중 한곡을 영화에 삽입했다. 이 다큐 영화는 단순한 협업을 넘어 저항 차원에서 예술, 문화, 미디어를 융합한, 신세대의 이념적 단결을 보여준다. 2015년에는 카슈미르 최초의 만화가 세상에 선보였다. 만화 <문누: 카슈미르에서 온 소년>의 작가, 말릭 사자드는 리즈비의 친구로, 분쟁으로 얼룩진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그려냈다.
 2010년 이후 카슈미르에서는 디지털, 문화적 저항이 꽃피고 있다. 도처에 존재하는 육체적 억압 및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글·라파엘 고드쇼 Raphaël Godechot
저널리스트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겨울 주도는 잠무 Jammu.
(2) 2011년도 인구조사에 따르면 잠무카슈미르(인구 12억5천4백만 명)의 종교별 인구 분포는 다음과 같다. 이슬람교 68.3%, 힌두교 28.4%, 시크교 2.4%, 불교 0.9%.
(3) ‘India’s secret army in Kashmir’, Human Rights Watch, 1996년 5월, www.hrw.org
(4) ‘Who are the Kashmir militants?’, BBC, 2012년 8월 1일, www.bbc.com
(5) Cf. Fahad Shah, ‘Kashmir’s young rebels’, The Diplomat, 2015년 8월 22일.
(6) Rajesh Joshi, ‘In free India I was denied entry’, <Outlook>, New Delhi, 2011년 9월 26일.
(7) Bilal Ahmad Shah, Dr P. Chinnathurai, ‘Violence’s against the unarmed protestors in Kashmir: a disguised brutality’, Asia Pacific Journal of Research, vol. 1, n° 35, Bangalore, 2016년 1월.
 
 
 
연혁: 분쟁의 역사
 
 
 
1819년. 4세기 간의 이슬람 지배 후 잠무-카슈미르 주는 라호르부터 시작해 시크왕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1846년. 영국이 시크왕국으로부터 잠무카슈미르주를 매입해 영국에 충성을 다하는, 힌두교를 신봉하는 도그라족에 되팔았다. 
1947년 8월 15일. 인도, 파키스탄 분할. 잠무카슈미르는 이들 가운데 한 나라에 귀속될 뿐, 독립은 불가능했다. 
10월. 파키스탄 부족들이 인도의 군사 개입을 요구한 도그라족을 침공.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49년 1월 1일. UN 중재로 휴전. UN은 통제선을 그어 카슈미르의 2/3는 인도에, 1/3은 파키스탄에 분할해줌.
1953년 8월. 쉐이크 압둘라 초대 잠무카슈미르 총리, 분리·독립 기도 혐의로 체포, 투옥돼 11년간 복역.
1965년.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카슈미르 문제가 전쟁 이전 상황으로 회복되는데 그침.
1984년. 마크불 바트(Maqbool Bhat), 분리·독립운동단체인 잠무카슈미르 해방전선(Jammu and Kashmir Liberation Front(JKLF)) 지도자, 뉴델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짐.
1989년.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카슈미르인들의 무장 봉기 시작.
1999년 5월~7월. 카길 전투, 제3차 인-파 전쟁. 파키스탄 병력과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활동하는 반군 침투. 인도, 파키스탄 각각 5백 명 가까이 사망자 발생.
2005년 4월 7일. 스리나가르(카슈미르)와 무자파라바드(파키스탄)를 왕복하는 버스 노선 개통.
2008-2009-2010년.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폭동이 계속적으로 발생, 인도 군대가 폭력 진압.
2016년 2월. 대학생 2명 사망 사건 이후 다시금 항의시위 일제히 발생. 
7월. 부르한 무자파르 와니, 분리주의 반군단체인 히즈불 무자헤딘 지도자가 인도 군대의 공격으로 사망. 대규모 시위가 이어짐. 인도군 진압으로 최소 50명 사망. 대대적으로 시위대를 체포하고 야간 통행금지령 시행.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라파엘 고드쇼
라파엘 고드쇼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