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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대한 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
  • 임유
  • 승인 2016.09.30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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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말한다
 
‘우병우 사태’를 지켜보면서 가장 분노했던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우병우를 향한 한국사회의 비판이 조금도 실효적이지 않았다는 점. 둘째, ‘우병우’ 같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점. 이 두 엄혹한 사실을 앞에 두고 황망해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한국의 위태로운 ‘민주주의’에 대해 마땅한 답을 구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민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체제’인 민주정의 이념은 완전히 심연에 빠지고 말 것이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경고가 멀지 않다.
 그러나 막막하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데, 정작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나는 민의는 박근혜 정권에 한낱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가지 말고,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가길 바란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격려는 관료를 고무하는 대신 국민을 억누른다. 사실 대통령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확성기’가 돼야 한다. 행정부에서 오로지 대통령만이 공정한 선거가 보장하는 정치적 정당성 위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료가 설혹 민의에 무감각할지라도, 대통령이 그래서는 안 된다. 대통령에게는 정부가 추진하는 것과 시민이 바라는 것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추구해야 할 임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를 방기하고 있다.
 물론 국민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여론에 맞서 정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런 상황에서도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하고, 설득이 되지 않더라도 국민의 비난에 몸을 낮추는 자세를 취해야 옳다. 그것이 단순한 공무원이 아닌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다. 그런데 ‘우병우 사태’를 처리하는 청와대의 행태는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할 수 없다. 고위공직자로서 우병우 민정수석이 저지른 비위는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고 편법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은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인사를 검증하며 중요 정보를 취합한다는 말인가. 우 수석은 ‘자격’이 없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민의 합당한 지적을 무시하고 ‘자격’을 줬다. 그 순간 우 수석은 국민의 봉사자가 아니라 대통령의 수족이 됐고, 대통령은 민의의 대표자가 아니라 자의적 통치자가 됐다.
 선거 이후, 민주주의는 쉽게 무너진다. 정치인이 곧잘 언급하는 헌법 제1조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한다. 이 조항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한민국의 주권에 관한 당위적 명제가 단순한 서술적 명제로 쓰였다는 것이다. 즉 실제 주권은 국민에게 없는 듯 보이고 권력의 원천이 국민인 시간은 찰나에 불과한 게 현실인데도, 마치 위 조항이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오도한다는 것이다. 헌법의 본래 이념은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어야 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정언명제다. 국가의 통치행위가 이 목표에 가까워지려는 방식으로 행해지려면 뼈를 깎는 절실함이 필수다. 그러나 헌법을 준수한다고 주장하는 불의한 위정자들은 위 조항의 형식과 내용의 간극을 언제나 무시한다. 그 틈을 좁히려 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대의민주주의의 한계가 있다. 국민은 투표로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지만, 대표자는 국민의 선택이 끝난 시점부터 권력의 소재를 스스로에게 옮긴다. 그리고 이를 시정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곰팡이처럼 퍼진다. 칼 슈미트는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대해 결단을 내리는 자”라고 말했다. ‘예외상태’란 기존의 법규범으로 해소할 수 없는 갈등 상황을 뜻한다. 그러한 사태는 오직 정치적 결단에 의해 해결된다는 게 슈미트의 생각이었다. 슈미트는 법치주의에 근거한 민주주의가 작동하려면 정치적 지배를 통해 안정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 선행돼야 함을 밝히고자 ‘예외상태에서의 결단’을 강조했지만, 나는 이 이론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려 한다. 예외상태는 법이 풀지 못하는 모든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가리킨다. 주권은 이에 대해 결단을 내리는 주체에게 있다. 우리는 지금 주권자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 국정원 선거개입, 12‧28 위안부 합의, 사드, 그리고 우병우 사태까지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단지 국가가 내리는 결단을 지켜봤고, 규탄했으며, 저항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국가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것은 주권자에게 어울리는 태도가 아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전해지는 국민의 비굴한 모습은 한국 민주주의의 말기적 징후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구걸하고 있다.
 길은 없는가. 다시 선거를 기다리는 일이 유일한 대안인가. 이것은 부족하다. 급진적인 기획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은 든다. 진정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예외상태에서의 결단’이다. 따라서 결단의 주체를 박 대통령을 위시한 국가에서 국민으로 전환하거나, 국가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제도적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국민 통합을 저해하는 행위’이자 ‘이적 행위’로 규정돼 처벌을 받거나 ‘삼권분립 위반’ 따위의 항변에 가로막힐 것이 뻔하다. 나폴레옹은 “굳은 결심은 가장 유용한 지식”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더 나은 민주주의를 이룩하겠다는 결의는 실천 없는 지식으로 귀결될 것이며 함부로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지 않으려는 내적 검열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예감이 똬리를 튼다. 다음 대선까지는 약 1년 4개월이 남았다.  
 
 
 
글·임유
부조리에 예민한 백수. 가는 길이 자꾸 엇나가곤 하지만, ‘올바른 삶’이 있다고 믿고, 생각과 글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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