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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고통과 마주한다는 것
과거의 고통과 마주한다는 것
  • 고원
  • 승인 2016.11.2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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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프랑스는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지난 2015년 한국에서 광복 70주년 행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프랑스 파리에서는 해방 7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다. 비슷한 경험을 한 두 나라가 70주년을 기념하는 방식은 아주 달랐다.

 
70주년을 맞이하는 전혀 다른 두 방식
 
한국의 경우,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해방 이후 빠른 경제성장을 부각시키고 “이제 과거를 넘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야할 때”라고 강조했다. 광복 70주년 기념의 궁극적인 의도는 국민들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고 이를 기반으로 국민대통합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한국과는 정반대로 어두운 과거를 향해 되돌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부역한 협력행위들을 주제로 대규모 전시회, <콜라보라시옹, 1940~1945>를 개최했다. 300여 점의 문서기록과 유물, 영상기록을 통해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인들의 다양한 부역 행위를 분야별로 상세히 소개했다. 전시기간 중에는 기록물 전시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련 행사들이 열렸다. 313페이지에 이르는 전시도록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전시회가 열린 5개월 간 매월 2회씩 총 10회의 학술대회와 토론회가 개최됐다. 또한 친독협력을 주제로 한 영화제가 열려, 7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왜 프랑스는 해방 70주년을 맞아 하필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로 되돌아갔을까? 사실 나치 독일에 협력한 행위는 지난 70년 간 프랑스 내에서 여러 차례 조명됐으며, 이미 많은 사실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굳이 대면하기 껄끄러운 과거를 이 시점에서 또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자명하다. 친독 부역의 문제는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도 여전히,프랑스 사회가 청산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극우정당의 열풍은 <콜라보라시옹, 1940-1945>가 열리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프랑스의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은 지난 몇 년간의 주요 선거에서 약진하고 있으며, 30세 이하 젊은 당원의 숫자는 다른 주요 정당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무엇보다 국민전선의 열풍은 다른 정당들의 우편향을 부추기고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프랑스 전체가 오른편으로 기울어가는 상황 속에서 <콜라보라시옹, 1940-1945>는 극우경화의 근원인 민족전선의 뿌리가 70여 년 전 나치 부역자들에게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했다. 또한 국가 전체가 우경화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70여 년 전의 사건을 통해 알려주고자 했다.
 
즉, <콜라보라시옹, 1940-1945>는 고통스럽고 감추고 싶은 과거를 오히려 모두에게 드러냄으로써 과거와 단절하려는 시도다. 그렇게 과거와 단절함으로써 현재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다.
 
 
▲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악수하는 프랑스 비시 정권의 페탱 원수 - 1940년 10월 24일
 
 
행위자보다 행위에 중점을 둔 전시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은 프랑스어로 ‘협력’을 뜻한다. 그런데 대문자 ‘C’로 표기되는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의 ‘대독협력’을 뜻한다. 보통명사 콜라보라시옹이 ‘점령군이나 적국에 대한 부역행위’라는 뜻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대독협력정부를 이끌던 필리프 페탱의 대 국민연설에서 비롯됐다. 페탱은 히틀러와 정상회담을 가진 후 1940년 10일 30일, 라디오 방송에서 “오늘 나는 협력의 길에 들어선다”고 선언했고, 이를 계기로 ‘협력’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됐다. 
 
<콜라보라시옹, 1940-1945>는 제목 그대로 대독협력에 대한 전시회이다. 언뜻 “왜 주제가 대독협력일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우리사회에서는 보통 인물을 중심에 놓고 그 인물의 행위를 말하지, 행위 그 자체를 중심에 놓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즉 친일파를 중심으로 그의 친일 행위들을 설명하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프랑스 전시회의 주제는 ‘콜라보라퇴르(Collaborateur; 협력자)’가 아니라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 협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에서 대독협력에 가담했던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협력자’와 ‘협력주의자’가 그것이다. 협력자는 나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협조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의 행위는 전략적 대독협력이다. 협력주의자는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협조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와 이데올로기를 공유했으며 독일의 승리를 원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행위는 이데올로기적 대독협력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협력자와 협력주의자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대독협력정부의 수반이었던 페탱은 협력자에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협력자와 협력주의자 사이에서 방황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인물이라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다른 형태와 수준의 협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시시각각으로 변화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은 명확한 구분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194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영토가 두 지역으로 분할됐다. 북쪽은 독일군 점령지역이고, 남쪽은 프랑스 자치지역으로 페탱이 이끄는 비시(Vichy) 정권이 들어섰다. 페탱은 독일에 항복 선언을 한 후 휴양도시 비시를 수도로 친독협력 정권을 수립했다. 이때 페탱의 모습은 협력자였다. 당시 독일군의 점령을 받던 북쪽 지역, 특히 파리에는 협력주의자들이 경쟁적으로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도 치열하게 경쟁하는 한편, 비시의 협력자들을 협력주의로 추동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세계대전의 전세가 점차 독일에게 불리해지면서 프랑스의 상황도 급변한다. 비시 정부는 자치권을 상실하고 결국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 전체를 통치하게 된다. 협력자들의 공간은 사라지고 협력주의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독협력에서 협력자와 협력주의자를 구분하는 것은 당시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협력자와 협력주의자, 어느 한쪽 범주에 고정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보다는, 그들의 행위를 중심으로 분류하는 것이 역사를 현실적으로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일 수 있다.
 
 <콜라보라시옹, 1940-1945>는 당시 프랑스에 다양한 형태와 수준의 협력이 있었다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가적 협력을 선언한 비시 정부 인사들과 경제적 협력을 수행한 기업가들, 나치 찬양의 나팔수가 된 언론인과 문화예술인들, 나치즘의 파수꾼을 자처한 파리의 파시스트들, 유대인 강제이송에 협력한 경찰과 레지스탕스 탄압에 앞장선 의용대원에서부터 밀고와 고발을 일삼았던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광범위한 나치 부역자들의 협력 행위를 시기와 지역, 분야 등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건들에 관한 다양한 기록과 자료를 통해 행위의 수준을 보여준다.
 
왜? 프랑스는 과거 청산에 집착할까
 
한국과 프랑스는 비슷한 과거를 경험했고, 같은 시기에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행적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어두운 과거를 묻어버리고 싶어 했다. 그것이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광복 70주년에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대외적인 목적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중심으로 교과서 내용을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은 억지로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품을 광고하듯 구호와 이미지를 통해 인위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국가다울 때, 비로소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레 생겨나게 된다.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억지로 만들어 확산시키려 했던 이들이 지금 오히려 국민들에게 수치심만 남기고 퇴출의 위기에 몰려있는 것은, 이런 단순한 진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호출했다. 어두운 과거는 청산의 대상이지, 결코 침묵 속에 묻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를 호출하는 것은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드러냄으로써 청산하기 위해서이다.
 
프랑스사 연구자들은 프랑스의 과거청산을 ‘미완의 과제’라고 부른다. 해방 직후 수많은 협력 인사들을 재판정에 세워 처벌했음에도, 프랑스에서 과거청산은 아직도 여전히 진행형에 있다. 과거의 협력 행위들을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부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콜라보라시옹, 1940-1945>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과거 청산의 한 부분이다.
 
프랑스인들은 왜 그토록 과거 청산에 집착하는 것일까? 아마도, 진실로 새로운 미래는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글·고원
프랑스 파리 10 대학교에서.프랑스 현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 재직 중이다. 저서로 <우리가 사는 세계>, <몸으로 역사를 읽다: 몸과 생명정치로 본 서양사>, <개념사의 지평과 전망> 등이 있다.
 
 
박스기사 
 
 
▲ 열병하는 프랑스 비시 정권의 장성들에게 나치식 경례를 붙이는 프랑스 파시스트 군대
 

비시 정권과 콜라보라시옹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레이노(Reynaud) 총리가 사임하고, 친독파인 앙리 페탱(Henri Pétain) 원수가 내각을 구성해 독일에 항복했다. 그리고 프랑스 본국의 3분의 2를 독일 점령지구에 위임하고, 오베르뉴의 온천도시 비시에 주재한 프랑스의 친독정부가 나머지 남부 1/3을 관할했다. 국가주석에는 페탱이 취임하고 제3공화정 헌법을 폐지해, 7월 신헌법을 발표했다. 1940년 당시, 84세의 고령이던 프랑수아 페탱 노장군에 대한 본격적인 개인숭배가 이뤄졌다. 페탱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또한 ‘프랑스 패배의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총리를 지낸 에두아르 달라디에(1)와 레옹 블룸(2) 등 제3공화정 지도자들의 체포를 명했다.


원수와 그의 측근들은 독재적이고 온정주의적이며, 가톨릭의 동업 조합주의적인 새로운 국가 모델을 수립하기를 원했다. 비시 정부의 이런 프랑스 정치 생활과 사회에 대한 극우적인 개혁 의지를 이른바 ‘국민 혁명(Révolution nationale)’이라고 칭한다. 이 국민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3대 구호 대신, 4년 간 ‘노동, 가족, 조국’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1. 노동: 모든 직업이 ‘노동헌장(1941년 10월)’에 의해 조직됐으며, 계급투쟁의 종식과 노사 간 합의를 위해 분야별로 동업조합을 조직했다. 즉, 국가가 가격과 임금 등 모든 동업조합을 통제하고, 대기업들 역시 엄중한 국가관리 체제하에 놓이게 됐다. 모든 무질서를 퇴치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해산시키고 파업을 금지했다. 노동헌장은 특히 농업 동업조합에 특권을 부여했다.


2. 가족: 프랑스 정부는 대가족을 선호해 출산을 적극 장려했다. 또한 가정주부로서의 여성을 찬미해, ‘어머니의 날 축제(Fête des mères)’까지 새로 제정했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이혼이 거의 불가능해졌고, 낙태도 엄격히 금지됐다.


3. 조국: 비시 정권 하의 프랑스 청소년들은 조국과 페탱 원수에 대한 찬미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았다. 학교에서도 페탱 찬미가를 불렀으며, 8개월 간 공동체 생활을 하는 ‘청소년 작업장(Chantiers de jeunesse)’이라는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초상, 흉상, 노래 등 이 모든 상징물들이 조국과 페탱에 의한 조국 수호를 찬미했다.


또한 비시 정권은 나치스와의 ‘콜라보라시옹(협력)’체제로 특징지어진다. 1940년 몽투아르에서 총통 히틀러와 회견한 페탱 원수는 나치스 협력 정책에 동의했다. ‘국가협력체제’라는 미명하에 반유대적인 인종주의 정책이 실시됐다. 비시 정부는 유대인의 법적 지위를 정지시키는 동시에 교육, 고급 공무원, 기자 등 일정 직업과 유대인 소유의 기업에서 유대인들을 모두 몰아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30만 명의 유대인 중 7만 6천 명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으며, 그 중 무사히 귀환한 사람은 2천 5백 명에 불과했다.


프랑스인들도 강제노역에 종사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심각한 곤경에 처했으며, 특히 언론과 사상의 통제를 강하게 받았다. 도시에서 식량 배급제가 실시됐지만, 양이 너무 부족해 암시장을 통해 몰래 식량을 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파리에서는 나치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크 도리오(Jacques Doriot)의 프랑스 인민당(PPF) 같은 파쇼적인 정당들이 창궐해 반민주주의, 반유대주의, 반공산주의 운동을 한층 격화시켰다.


한편, 독일에 대한 협력을 유지하면서 대자본가·은행가 등의 지지를 받고, 1942년 봄부터는 총리 피에르 라발(Pierre Laval) 통치 하에서 일단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독일 점령군 감시 하의 반(半)주권국가라는 외적 이상성(異常性)과, 의회기능이 전적으로 정지된 내적 이상성을 가진 특이한 정권이었으므로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해,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이어 프랑스가 해방되자 나치스 독일의 패배와 함께 붕괴했다. 전후 페탱 이하 정부의 각료들은 반역죄로 문책을 받았고 복역했다. 페탱은 1945년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돼 일드외(l’île d’Yeu)에서 복역 중 사망했다. 라발은 전범으로 처형됐다.


(1) 에두아르 달라디에(1884~1970)는 1933년, 1934년, 그리고 1936년부터 1940년까지 3차례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다. 1940년 프랑스군이 항복한 후, 친독일 비시 정부의 수립으로 인해 전범으로 독일에 억류됐다가 1945년 5월 미군에 의해 구출됐다. 1946년 정계에 복귀해 신 헌법의회 의원에 선출됐으며, 같은 해 하원의원에 당선, 53년 급진사회당 명예총재를 지내다가 1958년 드골의 새 헌법에 반대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2) 유대인이었던 레옹 블룸(1872~1950)은 페탱 정부에 의해 독일로 압송됐다가,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서 돌아와 1946~1947년에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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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
고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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