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모기는 살아있다
모기는 살아있다
  • 주진희
  • 승인 2016.12.02 14: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달칵. 불을 켠다. 시간은 새벽 5시. 살짝 벌어진 커튼 사이로 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눈을 붙인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불청객이 잠을 깨웠다. 코트 깃을 세우고 다녀야 할 만큼 추워졌다지만 명줄 긴 모기새끼는 여름의 명성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헝클어진 머리를 박박 긁으며 머리맡에 놓아둔 안경을 쓴다. 주위를 둘러본다. 평소에는 수없이 발에 채이던, 깡깡 소리를 내는 알루미늄 재질의 모기약은 이럴 때 꼭 사라진다. 어차피 깨버린 잠. 직접 내 손으로 놈을 잡아야겠다.

놈이 아주 괘씸하다. 잠이 드는 게 쉽지 않은 요즘. 겨우 든 단잠을 깨워 더 괘씸하다. 이른 아침에 눈을 감고 정오가 넘어 깨는 일상이었다. 아무리 피곤이 쌓여도, 푹신한 이불속에 있어도 잠을 잘 수 없었다. 밤 12시. 자정만 되면 그들이 찾아와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안에 사는 정령들이었다. 그들은 묻기를 좋아했다. 대게 질문은 이렇다. 하루를 허비한 건 아닌지. 통장 잔고는 넉넉한지. 밥벌이는 할 수 있는지. 꾸역꾸역 답을 한다. 하지만 대답과 동시에 또다시 질문이 꼬리를 문다. 그렇게 문답을 이어나가다 보면 새벽이 밝아온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4시가 다 돼서야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노트북을 켠다. 이왕 깨 있는 거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다. 바탕화면은 온갖 한글 문서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대개는 쓰고 싶어서 썼다기보다, 써야 해서 쓴 글들이었다. 그 중 한 문서를 연다. ‘3. 인생의 최대 위기를 쓰되 가능한 한 웃기게 써라.’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반긴다. 억지로 23년의 짧은 인생 속 위기들을 읊어본다. 아빠의 암 투병. 전 남자친구의 스토킹. 집안 사업의 부도. 그 어떤 위기도 ‘가능한 한’ 웃기게 쓸 수 없다. 잔인한 질문 앞에서 나는 무참히 벗겨진다. 과연 누가 인생의 최대 위기를 우스갯소리로 할 수 있을까. 이 회사엔 들어가지 못하겠구나. 씁쓸함이 목구멍 끝에 맴돈다. 

 노트북 팬 소리만 가득하던 방 안에 다른 소음이 얹힌다. 놈인가? 귀를 기울이자 벌컥 방문이 열렸다. 순간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스스한 퍼머 머리. 반쯤 감긴 눈. 엄마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게, 왜 여태 안 자고 무얼 하는지 묻는다. 나는 올라오는 화를 애써 누르며 답한다. 아주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가 무색하게 금세 문이 열린다. 도끼눈을 하려던 찰나, 엄마가 5만 원짜리 네 장을 건넨다. ‘장화 신은 고양이’ 눈으로 태세 전환. 점수가 모자라 다시 토익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모기소리로 웅얼거린 말을 용케 잊지 않은 모양이다. 엄마는 아침밥을 챙겨 먹으라는 말을 덧붙이고 서둘러 나간다. 나긋한 목소리다. 날을 세웠던 눈빛이 무안해질 정도로. 

엄마가 출근을 하고 나서야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놈을 잡지 못했다. 남의 피나 빨아먹고 사는 파렴치한 놈들. 잡을 때까지 기필코 잠들지 않을 테다. 글이 잘 써지지 않으니 머리 식힐 겸 인터넷을 한다. 초록색 포털 사이트는 대한민국 역대 최대의 게이트로 도배돼 있다. 이건 뭐 러시아 소설도 아니고. 등장인물도 매일 새롭게 많이 등장하니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할 판이다. 모기 같은 새끼들. 자기 뱃속 채우기에 급급한 양심 없는 놈들. 여러 이름들 가운데 한 이름이 걸린다. 정유라. 그 이름이 눈에 들어간 티끌처럼 계속 나를 괴롭힌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그의 글에 아마 열이 많이 난 것 같다.

그러다가도 잠시 정유라가 된 나를 상상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치열했던 공부와의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신 1등급을 따고자 친한 친구의 성적을 캐묻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쉽게 ‘달그락 훅’하고 ‘인 서울’의 문턱을 밟을 수 있다.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 아무 식당이나 당당하게 들어가도 된다. 몰래 은행 앱을 켜 통장의 잔액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 한 달에 2천만 원씩 호화스러운 데이트를 할 수 있다. 쇼핑할 때 그녀는 옷 안에 붙은 가격표를 찾느라 눈치 보지 않겠지. 1천원 차이 때문에 카페모카와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겠지. 그런 부모 밑에 그녀는 행복한 삶이겠구나. 부러움이 살짝 맺힌다.

위이잉. 놈이 나타났나? 이런 휴대폰 진동이다. 은행의 입출금 문자. 후불 교통비가 탈탈 털어버린 계좌에 꽤 긴 숫자가 생겼다. 엄마가 넣은 용돈이다. 취준 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 용돈을 받은 지 벌써 몇 달째다. 성과는 아직. 잔고가 두둑해지자마자 눈독 들여놓은 니트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즐겨찾기에 있는 쇼핑몰 페이지를 클릭한다. 순간 낮고 일정한, 그러나 온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가 귀에 꽂힌다. 이번엔 진짜 놈이다. 단숨에 의자에서 뛰어내려 요리조리 살핀다. 책상 밑인가? 장롱 위? 소리는 나는데 놈의 모습은 티끌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약이 오른다. 눈에 불을 켜고 방안을 샅샅이 살핀다. 
 
아. 놈이 여기 있다. 때탄 아이보리 색 화장대 거울 표면에 몸을 밀착해 있다. 홉. 숨을 들여 마시고 참는다. 놈의 몸과 내 오른손이 평행이 된 순간. 찰나에 내려친다. 철퍼덕. 볼록 나온 배가 터진 자리엔 싱싱함을 증명하듯 선홍빛 피가 번진다. 나의 승리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놈은 내 손안에 죽었는데 신경질 나는 위잉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핏자국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다시 거울을 바라본다. 아직 모기가 있다. 파렴치한, 양심 없는, 우리 엄마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모기가 나를 쳐다본다. 지저분하게 흘러내린 머리와 지문이 잔뜩 찍힌 안경 쓴 얼굴. 거울엔 내가 비친다. 모기는 살아있다.   


글·주진희
졸업이 무서운 평범한 스물셋. 최근 데미안을 꿈꾸며 내적 탐구에 열중하고 있다. 영상을 통해 소통을 이끌어 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최종 목표.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주진희
주진희 ‘모기' 이달의 에세이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