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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받을 빚이 있다
우리도 받을 빚이 있다
  • 안영춘/편집장
  • 승인 2010.03.0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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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 마감이 막바지를 넘어서면 몸과 마음은 처지지만 머릿속은 열뜬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1차 독자로서, 양파 속처럼 혹은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착취와 억압, 부정, 반혁명 그리고 무엇보다 유혈 분쟁의 낭자함을 대면하다 보면 그런 심신 상태를 비켜가기 어렵다. 다만 이때에도 무력감과 열뜸은 주체 안에서 분열적이지 않다는 걸 느낀다. <르 디플로>가 2차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것도 그 정도일까? 답은 일단 미룬다.
 3월호라고 다르지 않다. 노엄 촘스키의 헌사(“<르 디플로>는 세계의 창이다”)에 빗대자면, 창밖의 세상이 그러하니 다르려야 다를 수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재정을 쏟아부을 때부터 국가의 채무이행 불능 사태는 어느 정도 예고됐다. 금융자본과 국가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는 한쪽의 주장은 거짓이었고, 다른 한쪽의 믿음은 헛되었다. 이제 깔끔하게 때를 벗은 금융자본은 위기를 맞은 국가의 무능을 나무란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뱃속으로 환원될 처방을 제시한다. “국가를 줄여라. 그래서 우리에게 넘겨라.” 유로존의 몇몇 국가와 두바이의 위기는 잘 알려진 바다.
 그러나 <르 디플로>는 약자의 시선으로 사태를 전한다. 그리고 주장한다. “국가여, 차라리 빚을 갚지 마라.” 그만큼 지금의 국가재정 위기가 ‘경제 쇼크’를 예고할 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겠지만, 악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약한 고리’를 탁월하게 짚은 것이기도 하다. 이제 금융자본이 국가를 위해 동원되어야 할 때이고, 그 방법은 분명 있다고 <르 디플로>는 진단한다.
 한겨울 당신의 입안에서 아삭하게 씹히는 토마토 한 개에는 가시화되지 않은 환경파괴와 노동착취라는 ‘푸드마일’(식료품의 이동 거리)이 기록되어 있다. ‘토마토를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르 디플로>의 표현은 수사학에 멈추지 않는다. 한 개의 토마토가 되어 생산과 운송, 소비의 모든 과정을 낱낱이 좇아가다 보면 어느새 지금 여기, 한국의 20대가 왜 냉소와 속물주의를 생존 전략으로 채택했는지, 한국의 약자들은 왜 계급투표를 못하는지, 그 디테일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착취와 억압, 부정, 반혁명, 유혈 분쟁의 피해와 희생이 왜 오롯이 약자에게 전가되는지, 왜 약자들은 그럴수록 고립되는지가 비로소 가시화된다.
 앞의 물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사적 이야기를 꺼내본다. 나는 서울·경기 지역 독자 모임인 ‘르 디플로 아고라’(cafe.naver.com/lemondeagora)의 평회원이다. 2주에 한 번씩 전체 토론 모임이 마련되고, 다양한 소모임도 수시로 열린다. 20대 대학생부터 30~40대 직장인, 50대 예술가까지 온갖 나이대와 직업을 가진 이들이 진지하게 토론하고 뜨겁게 소통한다. <르 디플로>라는 매체를 매개로 만난 이들의 그 놀라운 열기가 처음엔 불가해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르 디플로>를 읽는다. 그 속의 얘기는 자신과도 닿아 있다. 가시화된 소외와 배제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체의 요구에 열뜬 머리로 한데 모인다.  고립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우리도 언제나 갚아야만 하는 게 아니라, 받을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앎의 연대는 진화론적 더듬수를 거쳐 요구의 실천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것은 어느새 그 모임에 흠뻑 빠진 내 경험담이다. 물론 아직은 미완의 답이다.

글·안영춘 편집장 editor@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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