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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진’
바보들의 ‘행진’
  •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 승인 2017.03.0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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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엄한 스승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엄한 스승이라도 바보만큼은 가르치지 못한다.”(1) 1970년 세상을 뜬 벤자민 프랭클린은 번개를 예방하기 위해 피뢰침을 발명했지만, 정작 유럽연합(EU)의 탄생은 예방하지 못했다. 경험이라는 스승에게서도 제대로 가르침을 얻지 못할 그 유럽연합(EU)을 말이다. 

유럽국의 국민들은 분명 직접투표를 통해 자유무역을 거부한다는 뜻을 당당히 밝혔다. 그러나 유럽의회는 또 다시 새로운 자유무역협정을 통과시켜버렸다. 이번에는 캐나다를 상대로 말이다. 이제 순식간에 각국 의회가 협정을 비준하러 나설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바보라 할지라도, 적어도 두 번째 경험에서만큼은 배우는 게 조금은 있어야하는 것 아닐까. 아무리 심각한 바보라 할지라도. 2010년 5월 유로그룹,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의 극약처방을 받고 피를 철철 흘리던 그리스는 이내 다시금 새로운 디폴트 위기를 맞이했다. 여기저기 멍든 그리스는 소독조차 하지 않은 오염된 주사 바늘을 계속 맞고 있다. 제발 그 사이 독일 우파가 유로존이라는 야전병원에서 그리스를 쫓아내지만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최신 사례도 있다. 여러 유럽국이 사회복지예산을 삭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미 각국은 어떻게 하면 실업자에게 돈을 덜 줄지, 외국인을 치료대상에서 제외할지 온갖 묘책을 짜내느라 바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놀랍게도 국방예산을 증액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듯하다. 다름 아닌 ‘러시아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란다. 정작 러시아 국방예산은 미국의 1/10에도 채 미치지 않는데 말이다.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유럽이 추진하는 선결과제들을 더 이상 옹호할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지혜로운 친구 프랑수아 올랑드를 본받아, 재임 포기를 선언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는 3년 전 집행위원장직을 맡을 때만 해도 “유럽연합을 살려낼 마지막 기회로 삼아 위원회를 열정적으로 운영하겠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그는 “하루에 몇 시간을 한 회원국의 EU 탈퇴 계획을 짜는 데 보내고” 있다. 지난 2월 11일 “이것은 그다지 미래지향적인 일이 아니다”라고 그가 한숨을 내쉰 것도 일견 이해가 간다.

오늘날 룩셈부르크의 조세탈피 비호자로 널리 알려진 유럽 우파 성향의 후보 융커는 2014년 사회당 소속 유럽의회 의원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직에 올랐다. 당시 그의 경쟁자인 사민당 출신의 마르틴 슐츠는 “우리 둘 사이에 대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시인했다. 융커도 “많은 점에서 나와 슐츠는 생각이 일치한다”고 화답했다. 둘의 이념이 그처럼 유사해서였을까. 지난 2월 17일 유럽연합은 기어이 캐나다와의 자유무역협정을 통과시켰다. 대다수의 사민주의 유럽의회 의원들은 이제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하나의 진영을 형성했다. 60년 유럽연합(EU)사에 가장 중대한 유럽정책의 실패로 간주될 그리스 문제와 관련해, 프랑스 사회당 정부는 독일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그리스의 부채액(분명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액수) 탕감 문제를 논의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노동당 출신의 예룬 데이셀블룸 유로그룹 의장도 거의 광신도에 가까운 거만함으로 일절 논의를 거부하고 있다.(2)

선거철만 되면 유럽연합의 ‘방향 전환’ 문제가 종종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경험을 통해 배울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경험은 이미 우리가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훤히 알려주고 있다. 또다시 똑같은 문제로 실망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말이다. 남은 대부분의 문제들이 걸려 있는 그 골치 아픈 문제로 인해 또 다시 실망하기 원치 않는다면.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Benjamin Franklin, <L'Almanach du Bonhomme Richard(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1732.
(2) Yanis Varoufakis, ‘Leur seul objectif était de nous humilier’(그들은 우리를 능욕했다), <Le Monde diplomatiqu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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