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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택시기사의 행복한 노년을 위해
그 택시기사의 행복한 노년을 위해
  • 박재현/백수
  • 승인 2010.03.05 18:3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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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늙을 수 있는 평등사회’를 읽고

 다른 수가 없어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와의 대화가 괴롭다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먼저 질문을 던지고는 한다. 그날 만난 기사분은 지방에서 섬유 관련 업체를 운영하다 도산 후 서울로 이주한 50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택시회사에 근무하며, 운전 경력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다. 내가 술을 먹지 않은 손님임을 반겼다. 회사에 소속된 택시기사가 2인1차 2교대 형식의 근무라면, 한 달에 약 120만~140만 원의 수입을 가져가게 된다. 서울시 복지재단은 “서울에서 여유 있게 살려면 최소 월 344만4천 원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83%의 가구가 이 기준에 미달된다고 밝혔다.(1)

▲ <목욕 중인 노인>, 2006-안 루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월호(한국판 제16호)의 ‘잘 늙을 수 있는 평등사회’는 프랑스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인구 노령화를 걱정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저의 출산율(2008년 기준 1.12명)을 기록하는 나라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에 다가가고 있다. 이는 비노동인구인 노인층을 부양할 노동인구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질이 오로지 소득수준으로 결정되는 사회에서 충분한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노년의 삶은 공포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응은 개인적이다. 몇 년 전 불어닥친 10억 원 만들기나 재테크 열풍, 늘어나는 노인 대상 보험상품, 월 3만 원으로 준비하는 죽음은 이러한 한국 사회의 증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미래의 불안에 대처하는 개인이 손에 쥔 처방전에 나열된 진통제의 이름들이다.
 ‘잘 늙을 수 있는 평등사회’에서 뤼시앙 세브는 현재의 위기를 “인류학적 위기”로 진단하고 이 문제를 사회제도와 사회생활의 논리로 구축되는 ‘사회·전기적 인격’의 문제로 접근한다. ‘사회·전기적 인격’은 심리학자 알렉시스 레온티에프의 정의로서 그는 인간을 ‘사회·전기적 인격’과 ‘생체·심리적 개체’의 개념으로 구분한다. 뤼시앙 세브는 선천적 조건이 우세한 ‘생체·심리적 개체’의 특성에 비해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사회·전기적 인격’의 존재를 통해 ‘잘 늙을 수 있는’ 개인의 자율성을 발견한다.
 그가 지적하는 인류학적 위기는 인간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 ‘사회·전기적 인격’이 기업의 인적 자원 정책으로 포섭됨으로써 ‘생체·심리적 개체’의 특성을 기반으로 재구조화된 데 따른 것이다. ‘기계제 시대’, 칼 폴라니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이 기계의 요구에 기꺼이, 나아가 열광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이룬” 시대의 유산이다.(2) 이후 산업구조가 기계제 생산에서 고도로 다양화된 시기인 오늘날, 인간이 노동으로 상품화되는 현상은 시장이 전 사회의 질서를 포섭함에 따라 ‘사회·전기적 인격’을 더욱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사회·전기적 인격’은 이력서에 기재하는 스펙 정도의 의미로 축소되었다. 이후 사회관계는 ‘명함’이 주는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경제활동을 포함한 사회생활은 직장, 학교, 가정, 종교단체, 동호회 모임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사회관계들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임금, 수업료, 생활비, 헌금, 회비. 이러한 단편적 예를 통해서도 돈을 매개로 작동하는 시장이 거의 모든 사회관계의 근간에 자리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시장의 유일한 보편물인 돈의 획득에 관련된 지위가 ‘사회·전기적 인격’을 대체한다. 그 지위는 노동 가능 연령 동안 유지된다. 노인의 위기가 노동의 상품화와 겹치는 지점은 그 지위가 흔들리게 되는 은퇴 이후의 시기다. ‘제3의 삶’이라 할 이 시기에 ‘사회·전기적 인격’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우리는 이 시기에 어디에서 자율성의 공간을 찾을 것인가? 뤼시앙 세브의 대안이나 우리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그는 사회학자 뤼시앙 레비브륄의 예를 통해 고양된 인간 정신이 노년기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하는지 보여준다. 이 특별한 예는 ‘환경을 인간적으로 구축’함으로써(3) 보편적 현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는 이를 위한 개혁 방안으로 보편적 고등교육, 청년실업 해결, 노동소외 극복, 안정적 취업과 직업교육 그리고 노동자 스스로를 개발할 풍부한 활동으로서의 여가를 제시한다. 그러나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특별한 예가 그 독자에게까지 실현되려면 더 세부적인 우리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노동시간과 여가의 문제다. 서두에서 언급한 택시기사의 경우 하루 12시간을 일한다. 우리나라는 2007년 기준 임금근로자의 연간 노동시간이 2294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가장 길다. 그러나 통계에 잡힌 수치보다 현실은 더욱 심각하다. 공교육이 대입을 거쳐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경쟁으로 수렴되는 현실에서 ‘제3의 삶’을 위한 재교육은 여가 시간의 확보에 달린 일이다. 이에 실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직 후 자영업자로 나서게 되고, 운영 능력이 없으니 프랜차이즈에 의존하게 된다. 현재 떡볶이를 파는 분식점까지 프랜차이즈는 파고들었다.
 사회화 교육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사회·전기적 인격’을 형성하고 삶을 조직할 자율성은 경쟁을 통한 인력 선발 기준으로서의 교육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근로시간 단축과 여가 확보가 이를 위한 물리적 조건이라면,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 그 내용이 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월호에 실린 ‘약자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는 인문학’에서 ‘모두의 인문학’을 위한 강단 밖의 실험(4)이 그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장 실현할 전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개혁의 이야기와는 별도로 삶의 본질을 함께 고민하는 이웃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것이 사회를 다시 발견하고 그곳에서 돈과는 무관한 새로운 인격을 형성할 작은 기반이 될 것이다.

 

<각주>
(1) <한국일보>, 2010년 2월 23일자.
(2) 칼 폴라니, 홍기빈 역,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제1장: 낡은 것이 된 우리의 시장적 사고방식’ 22쪽, 책세상.
(3) 카를 마르크스, <신성가족>, Editions sociales, Paris, 1972, p.158 해당 기사에서 재인용.
(4) ‘약자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는 인문학’, 이명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0년 2월호,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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