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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같은 남자와 남자같은 소녀의 자아찾기, 연극 ‘벨기에 물고기’
여자같은 남자와 남자같은 소녀의 자아찾기, 연극 ‘벨기에 물고기’
  • 이숙정 <민중의 소리> 객원기자
  • 승인 2017.04.0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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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같은 사십대 남자가 벤치에 앉아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앞에 펼쳐진 벨기에 브리쉘의 익셀호수를 하염없이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쵸코바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아이같은 여자아이가 그 남자를 발견하곤 그의 옆에 앉는다. 남자 이름은 그랑드 무슈이다. 실직해 혼자 살고 있다. 그는 인터넷 채팅으로 피스트피오나 글라디아텍스같은 데이트 파트너를 만난다. 남자는 트라베스티(여장남자, 게이)이다. 어린시절 자신의 가슴 속에서 은밀하게 자라나기 시작한 소녀때문에 가족에게도 사회에게도 버림받은 채 혼자 살고 있다.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자신이 얘기하지 않았다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열 살의 쁘띠 피이브는 여자아이다. 정신분석학자인 엄마, 아빠의 갈등과 다툼, 잔소리를 피해 물 속 침묵의 세계로 도망치길 좋아한다. 심지어 자신은 물고기여서 아가미로 숨을 쉰다며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독특한 아이다. 평범하다는 것이 애매하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이 남자와 소녀는 독특하다. 남자는 우연으로 만난 소녀를 잠시 보호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오지만 고요하기만 했던 남자의 일상은 소녀가 들어서며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소녀와 소녀의 부모의 갑작스런 죽음, 실종된 소녀를 찾는 신문기사들, 소아성애자로 오해받을까봐 소녀를 돌려보내려 애쓰는 남자가 벌이는 해프닝은 꽤 오래 무대 위를 정신없게 만든다. 관객은 도대체 왜 저 아이는 필사적으로 집으로 가지 않으려는 것인지, 부모의 죽음에 소녀는 왜 덤덤한지, 남자는 어쩌다 저렇게 건조하고 소외된 삶을 살게 된 것인지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품은 채 한바탕 소동을 지켜봐야 한다.

 연극 ‘벨기에 물고기’는 중반부를 넘어가서야 그 실체를 드러낸다. 관객들의 궁금증도 그때서야 조금씩 풀린다. 남자와 소녀는 속사포처럼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세상은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공격하고 배척했다. 그들은 상처받았지만 누구도 그 상처를 봐주지 않았다. 남자는 세상과 등을 돌림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한 인격체로 살아남기로 결심한다. 소녀는 집을 도망쳐나옴으로써 남과 다른 자신을 지켜내려 한다. 남자와 소녀는 서로를 돌봄으로써 자신도 가치있는 인격체임을 확인해 간다. 

연극은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커다란 호수같기도 하고 어항같기도 한 무대는 푸른 빛으로 가득하다. 낡은 가구와는 대조적으로 불투명 글라스와 값비싼 욕조가 놓인 그랑드 무슈의 아파트는 부조화 그 자체다. 주인공 그랑드 무슈와 쁘띠 피이브의 이름 역시 남자와 여자에게 사용하는 단어를 조합해 놓았다. 작가의 의도대로 무대 위에 남자와 소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호해진다. 또 굳이 성별을 구별할 필요성도 못느끼겠다. 그저 인간으로서 오롯이 존재하는 두 사람을 보게 된다. 

우리는 살며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것인지 잘알고 있다. 지금이야 '다르다'는 것이 '개성'이 되기도 하고 다름이 인정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다르다'는 '틀리다', 또는 '불편하다'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왼손으로 연필을 잡으면 연필을 왜 그렇게 희한하게 잡느냐는 질책이 어김없이 날아왔다. 장애아동이 같은 반에 있으면 그 친구와는 왠지 가까이 하기에 불편하고 어색했던 기억도 있다.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본다고 하면 무슨 큰 문제를 일으켰을까란 생각이 머릿속을 먼저 스쳐간다. 남자인데 여자같은 목소리를 가졌거나 여자인데 남자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들도 낯선 대상들이다. 불혹을 넘어서도 결혼안 한 사람들을 보면 뭔가 성격상 문제가 있지 않을까란 오만방자한 생각들까지. 우리는 수많은 다름을 잘못과 문제로 규정해 놓는 경우가 많다. '다르다'는 것은 기준이 있어야 가능한 상대개념이다. 무엇과 비교해 다른가? 그 기준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연극 ‘벨기에 물고기’는 아름답지 않아서 더 애잔한 동화같지만 누구나 다를 수 있고 다르다는 것이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는 아름다운 동화같을 것 같다. 
 
[민중의 소리 발췌]
 
연극 ‘벨기에 물고기’

공연장소:알과핵 소극장
공연날짜:2017년 3월 15일-4월 2일
공연시간:90분
관람연령:만 12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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