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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 광신, 그리고 민주주의
팬덤, 광신, 그리고 민주주의
  • 이택광  경희대 교수
  • 승인 2017.06.01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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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일본의 미시마 유키오는 동경대를 점거한 전공투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전후 일본 지식인들을 비판하면서 원칙이나 논리를 무시하고 오직 ‘당면 질서’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후일 책으로 묶여 나온 이 대담은 한국에서 일본 ‘극우 지식인’ 정도로 알려진 미시마 유키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전공투 학생들을 만난 이 ‘극우 지식인’은 “자기와 타자가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대립이 있고 싸움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미시마 유키오는 “어쩔 수 없이 어디까지나 공산주의를 적으로 삼아 싸운다”는 자신의 반공주의야말로 “공산주의를 주체성 있는 타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발언을 정신 나간 ‘극우 지식인’의 광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담을 읽어보면, 그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정상국가’에 대한 요청이었고, 그의 행동은 이 요청에 화답할 의지도 이유도 없었던 일본의 권력엘리트를 향한 저항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할복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그를 밀어붙인 것은 ‘위선에 대한 분노’였다. 전후의 일본을 ‘죽은 상태’로 규정했던 이 탐미주의 작가에게 ‘정상국가’의 기준은 ‘군사적 무력’의 유무였다. 이런 그의 주장은 군대라는 물리적 폭력의 보유야말로 국가의 의미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그의 주장과 행동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고 할지라도 그가 폭로한 전후체제의 ‘비정상성’은, 지금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알베르토 토스카노가 언급한 ‘광신’의 문제를 여기에서 다시 환기할 수 있다. 토스카노가 바디우를 인용하면서 지적하듯, ‘광신’은 “재현된 실재를 의심하는 것”에 따른 결과다. 왜냐하면 재현은 언제나 이미 실재를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현은 언제나 실재의 닮은꼴일 뿐, 결코 실재 자체는 아니다. 이 절대적 소외의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미시마 유키오의 ‘광신’을 낳았다. 그는 현실의 천황제를 옹호했다기보다, “모든 후궁과 프리섹스를 하는 고대의 천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고대의 천황’은 모든 향락을 독점한 최초의 아버지를 다르게 부른 지칭한 것뿐이다. 
 
그러나 근대의 자유민주주의라는 ‘문명’은 이 절대적 아버지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의 목표는 합리적인 통치이론을 수립하는 것이지 실재에 대한 충동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죽여서 ‘병든 쾌락’을 제거하고 그 무덤 위에서 아들들이 공평하게 쾌락을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문명’의 원리이다. 이 과정에서 과잉은 제거돼야 하고, 윤리적 규범에 따라 쾌락은 절도 있고 질서 있게 분배돼야 한다. 자유주의적 공리주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쾌락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은 이런 맥락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쾌락주의는 정치의 이념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제 아무리 자유주의가 스스로를 ‘정치철학’이나 ‘정치학’이라고 부르더라도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은 쾌락주의의 아포리아다. 
 
대중은 통제가 힘든 ‘광신집단’인가
 
경제학을 떠난 자유주의를 상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논리라면 정치체의 목적은 공평하게 모두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 살아야한다는 ‘먹고사니즘’의 발양에 지나지 않게 된다. 먹고사니즘을 위배하면서 토론과 논쟁을 유발하는 행동이나 발언은 곧잘 과잉으로 치부 당하기 일쑤다. 이른바 ‘문빠’라고 쉽게 불리는 행동들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대체로 ‘~빠’라는 지칭은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팬덤을 조롱하기 위한 용어였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처럼 대중문화의 현상을 가리키던 말이 정치 영역으로 유입됐다는 것이고, 더불어 팬덤은 ‘비정상적인 정치 행태’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무엇이 ‘비정상적인 정치’이고 무엇이 ‘정상적인 정치’인지 구분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즉, 어디까지 팬덤이고 어디까지 아닌지 기준을 결정해야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숱한 논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빠’라는 말 자체가 자의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적 행위를 팬덤이라고 지칭했을 때, 그 전제는 이미 자기와 입장이 다른 특정 정치세력을 ‘~빠’로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누구는 순수한 정치참여라고 하는 반면, 또 누구는 불순한 정치 테러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트럼프 지지자들을 ‘포퓰리즘’이라고 지칭할 때, 그 주장은 이미 그 지지자들을 ‘무지한 대중’으로 상정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무지한 대중’은 말 그대로 특정할 수 없고, 그래서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포퓰리즘’이든 ‘~빠’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하기 위해 불러낸 명칭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행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트럼프 당선’이든 ‘문자폭탄’이든 엄연히 눈앞에서 발생한 일이지 않은가.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 일에 대한 평가 또는 판단을 문제 삼자는 것이다. 특정한 정치적 행위 또는 행동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이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따른다. 이 평가와 판단은 서로 중립적인 척하지만 사실상 편견을 내재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편견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하든 ‘대중은 무지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편견은 ‘대중’을 통제하기 어려운 광신집단으로 규정하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 일련의 과정이 보여주는 것은 정치적 입장이나 지지하는 정치후보에 상관없이 발생한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입장이고 누구를 지지하는지 이 사실이 중요해진다. 이런 입장과 지지에 반하는 모든 이들은 ‘무지한 대중’으로 분칠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치 일반의 원리이지 특정 지지집단만의 특성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의 아포리아는 광신의 출현을 방기할 수밖에 없다. 독재는 바로 이런 민주주의의 결락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다. 팬덤은 그러니까 제대로 작동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민주주의의 아포리아를 덮고자 하는 정념의 스크린인 셈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제한한다
 
이 아포리아 덕분에 ‘독재자의 딸’도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 아포리아로 인해 헌법을 준수하지 않은 대통령은 탄핵을 당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뽑아줄 때는 언제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끌어내리는 것이 민주주의인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토머스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은 바다의 괴물이다. 플라톤의 말처럼, 바다는 육지의 위계를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바다의 괴물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표상인 것이다. 홉스가 말한 강력한 참주는 리바이어던 자체가 아니라, 그 괴물을 탄생하게 만드는 구심점이다. 이 참주에게 중요한 것은 그를 강력한 권력으로 만들어줄 인민의 지지다. 
 
인민의 지지가 강할수록 참주의 권력은 강해진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권력은 인민의 단결을 흐트러뜨리는 ‘데마고그’의 선동을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자 한다. 홉스에게 이런 권력의 기동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지당한 시도였다. 그러나 오직 참주의 ‘인격’만을 신뢰해야하는 이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제한해야한다”는 역설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무한하게 확장될 수 없다. 참주를 거부하고 모두가 주권을 나눠가진 통치자가 된다 해도, 누군가는 그 통치의 대상이 돼야한다. 그래서 결국 합의하게 되는 것이 견제와 균형을 통한 현상 유지다. ‘대안은 없다’는 자유주의의 유일사상은 이렇게 설득력을 획득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완벽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상호 감시’라는 ‘피어 리뷰’의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칸트의 말처럼, 인간은 동물이기에 주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 주인도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이라는 동물들끼리 서로 감시하는 것이다. 이 ‘감시의 기술’이야말로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인 셈인데, 자유주의는 이 감시를 전문가의 몫으로 설정하고 있다. 선거는 권력을 선출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독재자의 딸’이든, ‘인권 변호사’든 선거라는 절차를 통과해야 정당한 권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권력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앞서 지적했듯이, ‘상호 감시’라는 ‘현상 유지’의 장치가 민주주의에 내장돼 있기 때문이다. 
 
팬덤은 사라지지 않는다, 감춰질 뿐이다
 
이런 장치들은 결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고안된 것들이 아니다. 반대로 이 장치들은 현실의 문제를 가리기 위해 작동한다. 이른바 ‘~빠’들의 팬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이 장치들의 작동에 자신들의 열정을 투여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자유민주주의적인 의미에서 ‘합리성의 정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빠’ 현상은 과잉의 광신이기에 사라져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라는 것이 이런 광신을 배제하고 과연 작동 가능한 기계일까. 존 로크는 정부라는 분할장치를 통해 종교적 광신을 제거하고 정치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언제나 대중의 정치는 루소의 ‘일반 의지’를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대의제에 저항하는 대중의 정치를 ‘포퓰리즘’이나 ‘반지성주의’라고 규정하고 제어하고자 하는 입장은 정치를 안정화의 문제로 바라보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런 정치는 정치라기보다 경찰의 역할에 가깝다. 
설령 로크의 정부라고 하더라도 팬덤은 감춰질 뿐이지 사라지지 않는다. 자원봉사나 기부행사 따위로 분산된 열정은 어쨌든 특정 후보의 인격에 대한 지지로 나타난다. 지난 미국 대선이 정확히 이 사실을 보여줬다. 미국 유권자들은 ‘나쁜 후보’에 투표한 것이 아니라 ‘솔직한 후보’에게 투표했다. 물론 그 결과가 이제 와서 만족스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에 미국 유권자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규범을 위선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오히려 막말로 점철된 트럼프의 발언들이 정직하게 비쳤던 것이다. 비록 투표라는 ‘간접성’으로 매개돼야하지만, 여하튼 대의제 민주주의라고 할지라도 다수의 집결을 목표로 한다. 
 
이 집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참주를 향한 열정이다. 이 열정이 팬덤을 지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정은 개인의 독립성을 훼손할뿐더러 나아가서 국가의 존립근거를 약화시킨다. 후보의 인격에 투표를 했지만, 언제나 이 인격의 재현은 실재에 어긋나 있다. 더 실재에 가까운 재현을 요구하는 것이 선거라는 장치의 메커니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메커니즘의 한계가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좋은 국가’의 표상과 충돌한다. “일관된 신민들의 복종”을 이끌어내는 것은 국가의 덕과 권리 덕분이다. 여기에서 덕이라고 함은 정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한 능숙함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권은 자연적으로 주어진다기보다 국가를 통해 보장받는 것이다. 이때 시민권은 ‘계약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통해 개인의 독립성이 보장되면서 부여된다고 볼 수 있다. 
 
41.1%가 80%이상이 된 것을 설명할 수 있나
 
지난 촛불이 요구했던 것은 이 시민권의 보장이었다. 이런 시민권을 보장해주는 국가야말로 한국적 진보주의라는 맥락에서 ‘정상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행위를 통해 ‘시민들’이 탄생했지만, 이들의 시민권을 보장해줄 국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선거제도는 이 ‘시민들’을 유권자로 환원시키고, 득표수로 재현했다. 41.1%의 득표율은 실질적으로 나머지 58.9%의 반대자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런 단순 계산법은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찬성하는 80% 이상의 지지율을 설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수의 재현은 한시적이다. 촛불로 재현됐던 ‘시민들’이 수로 완벽하게 환원될 수 없는 셈이다. 이 ‘시민들’의 권리 주장을 선거는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권력이 주어졌으되, 그 운영은 무소불위일 수 없다. 
 
‘~빠’ 현상은 이런 균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상 국가’를 통해 시민권을 보장 받기 원하는 공화주의의 ‘시민들’을 한편으로, 국가와 개인은 공평하고 합리적인 ‘계약관계’를 맺어야한다는 공리주의의 ‘인민들’이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과 ‘인민들’을 연결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개념이 바로 인구다. 자유주의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인구에 대한 ‘상상’이다. 이것이 ‘상상’인 이유는 인구야말로 ‘총체화’할 수 없지만 일정하게 존재하는 집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한다면, 인구는 경제적인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경제학 자체이기도 한 자유주의는 인민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인구라는 개념으로 대체해왔고, 그 정점에 놓여 있는 것이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인간행동이론과 그에서 파생 발전한 인간자본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구라는 경제적 개념은 인민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전치 또는 억압한다. 인구에 대한 강조는 결과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쾌락원칙에 따라 관리 조절하는 대상으로 보게 함으로써 인민의 정치를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흥미롭게도 이 부정과 배제의 방식은 그 무엇도 아닌 과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방식은 과학의 원리에서 출현한 근대적인 법률의 성격과 연동한다. 정치경제학이라는 것은 이처럼 인구에 대한 과학이었던 것이고, 자유주의는 정치경제학의 정립을 통해 무질서로 가득한 세계를 합리적으로 구획하고 계량 가능한 세계로 만들어내고자 했다. 
 
인구는 인민의 정치라는 ‘심연’을 지워버리고, 말끔한 수의 풍경을 펼쳐보이게 만드는 마법의 기표이다. 진화생물학에서 인구라는 개념은 유기체와 그것을 재생산하는 다양성을 지칭했다. 그레고르 멘델의 유전학에서 인구는 성적 결합을 통해 재생산되는 개체의 집합을 의미했다. 이런 맥락에서 종이라는 개념과 인구라는 개념은 밀접한 관련성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멘델의 인구 범주에서도 인류는 가장 큰 인구 규모에 해당했는데, 지역적 범위에서나 언어, 민족, 종교, 그리고 경제적 특징에서 인류에 필적할 만한 다른 종은 없다는 논리였다. 
 
인류는 다른 종과 교배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인구 범주였다. 진화생물학의 인구 개념이 손쉽게 인류학의 의미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류학만 인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생태학, 인구통계학 또는 경제학에서도 인구라는 개념은 각기 다른 뉘앙스로 쓰인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우리는 인구통계학을 인구에 대한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인구라는 개념은 훨씬 넓은 분야에서 자의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인구통계학에서 사용하는 인구라는 개념은 훨씬 협소한 것으로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미 설정돼 있는 한계로서 정치나 관리의 대상으로 인구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준다. 
 
경제주의적 패러다임은 
‘인민’을 ‘인구’로 바꾼다
 
인구통계학과 달리 유전학에서 거론하는 인구는 성적 재생산을 전제하는 개인의 집합이다. 이런 개념으로서 인구는 정확하게 재생산되거나 또는 재생산 능력이 있는 개체에 한정된다. 말하자면, 재생산 능력이 없는 동성애나 불임은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렇게 성적 재생산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한다면 인구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의 <인구 원리에 대한 에세이>는 이런 인구의 무한성이라는 속성에 대한 고찰이다. <인구론>으로 간단하게 번역된 이 저작의 부제는 “인류 행복에 인구가 미친 과거와 현재의 영향에 대한 견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악을 제거하거나 완화하기 위한 우리 전망에 대한 연구와 함께”이다. 
 
맬서스의 부제는 의미심장하다. 이 부제가 전제하는 ‘악’은 그 무엇도 아닌 인구 증가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맬서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프랑스혁명 이후의 대혼란이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초래된 경제공황을 해결하기 위한 맬서스의 고민에서 인구 증가의 문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윌리엄 고드윈의 급진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맬서스는 인구의 원리를 제시하고자 했다. 맬서스에게 인구는 혁명을 통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런 관점에서 맬서스는 정치를 통한 사회 개조에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정치제도를 개선하고 실증적인 사법체계를 통해 개인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수 있다는 ‘진보주의’에 반대하면서, 맬서스는 빈곤과 악은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에 제도 개선이나 사법 장치를 통해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맬서스에게 인구의 무한성은 ‘진보주의’를 부정하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이 무한성은 유전학이라는 자연과학의 영역을 통해 ‘검증’ 받은 것이라는 점에서 과학의 관점에서 사회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던 계몽주의의 기획을 물구나무 세운 것이다. 맬서스의 인구 개념은 불규칙한 과잉 욕망을 통제하려는 공리주의적 발상과 쉽사리 연동한다. 인구의 원리는 규제와 지도의 대상이지 축소와 개조의 대상이 아니라고 맬서스는 말한다. 규제와 지도는 개인에게 고유한 도덕적 자제력을 실천하게 만드는 것이지, 강제적 집행을 통한 인구 축소나 개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맬서스는 보수주의적인 관점에서 고드윈의 아나키즘을 배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구의 원리, 말하자면 인구의 무한성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건전한 결혼’이다. 
 
맬서스가 말하는 인구의 원리라는 것은 사실상 성욕을 자연의 법칙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규칙한 성욕을 조절해서 ‘건전한 결혼’으로 수렴시키는 것만이 인구의 원리를 통해 초래될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할 수 있다. 성욕을 제거할 수 없듯이, 인구의 문제는 예방의 문제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 성욕은 가족부양이라는 의무감을 통해 조절 가능하다. 가족부양의 의무를 의식할 때, 개인은 성욕을 자제할 수 있다. 이런 자연의 원리에 지배 받는 것이 인구이기 때문에 맬서스의 입장에서 빈곤의 문제는 정부의 형태나 불평등한 재화의 분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빈자를 권리에 의해 고용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빈자도 부자에게 고용을 요구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 맬서스의 논리다. 이런 방식으로 인구라는 개념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주체인 인민을 기각한다. 
 
맬서스의 논의가 잘 보여주듯, 인민에서 인구로 전개되는 이 탈정치화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경제주의적 패러다임이다. 다수결의 민주주의는 이 패러다임을 넘어선다기보다 존속시킨다. 팬덤은 정치의 무능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지지의 결집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결집인지, 그 정치적 대의가 부재한 현실이다.   
 
 
글·이택광 
영국 셰필드대학 영문학 박사. 계간 <미래와 희망> 편집위원. 저서로 <마녀 프레임> <임박한 파국> <당신들의 대통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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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
이택광  경희대 교수 info@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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