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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유(性自由)’한 미래를 위해
‘성자유(性自由)’한 미래를 위해
  • 황순형 | ‘자유' 이달의 칼럼 가작
  • 승인 2017.06.30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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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우리의 시대적 과제는 ‘양성평등’이었다. 그때는 ‘성평등’이라는 용어가 생소했다. 최근에서야 다양한 성적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싹을 틔우면서,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대체하자는 목소리가 등장했지만, 논의의 대상은 여전히 남성과 여성에 국한되곤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평등’에 막 발을 들이려는 지금, 지구 반대편에선 매우 흥미로운 광경이 연출됐다.

지난 5월 배우 엠마 왓슨이 MTV 무비&TV 어워즈에서 최초의 ‘성중립적’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것이다. MTV는 올해부터 연기상을 성별로 나누지 않기로 하고,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열연한 엠마 왓슨을 첫 번째 수상자로 지목했다. 엠마 왓슨은 수상소감에서 ‘좋은 연기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하는 능력이며, 이 능력은 성별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하며 눈길을 끌었다. 가히 파격적이다.

내가 꿈꾸는 미래는 바로 이 ‘젠더리스(Genderless)’한 세상이다. 사전에서는 ‘성중립(性中立)’ 정도로 번역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성자유(性自由)’라고 부른다. 모든 구성원들이 고정된 성 역할과 사회적 선입견, 이른바 ‘성별(性別)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성평등과 성자유. 얼핏 보면 비슷한 말 같지만, 전혀 다르다.

사실 ‘성평등’은 페미니즘과 동의어다. 왜곡되지 않은 본질로서는 그렇다. 페미니즘의 정의가 ‘남성과 동일한 수준의 권리이행을 원하는 급진적 여성운동’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현 정부가 천명한 남녀 동수 내각구성 공약과 우리 헌법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특별보호 조항을 들 수 있다. 고정된 성역할을 타파하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크게 신장할 것이란 기대와 함께 여러 논란과 갈등이 존재하고, 소수자 외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이유인 즉, ‘평등’이라는 용어가 필연적으로 분류작업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비교기준이 있어야, 평등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을 편 가르기 식으로 갈라놓고 누가 더 좋은 처우를 받는지 비교하다 보니, ‘군가산점’, ‘여성 병역’, ‘역차별’ 등 끊임없는 논란과 갈등을 양산한다. 논리적이고 발전적이어야 할 경쟁은 어느덧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대립으로 변하고, ‘여혐, 남혐’ 등 입에 담기도 괴로운 말들이 귓전을 울리는 우리의 현실은 요즘 말로 소통 없이 제 할 말만 쏟아 붓는 ‘아무 말 대잔치’다.

게다가, 이분법적 비교기준의 적용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소수자들의 존재를 외면한다. ‘양성평등’에서 ‘성평등’까지 발전했지만, 여전히 ‘성평등’이라는 용어는 무궁한 성적 정체성을 모두 수용할 능력이 없다. 우리 정부내각의 젠더 비율을, 우리 사회의 그것과 비슷하게 하는 것이 ‘평등’이라면, 그 중 성소수자가 차지해야할 비율은 얼마나 되며 그것을 계산하는 일은 과연 생산적인가. 소수자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각자의 정체성을 공개해야만 하는 현 실태는, ‘아웃팅’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 의문에서 ‘성자유’의 소망이 시작됐다. 성자유는 개개인의 이력서에서 성별을 지우는 일이다. 성자유에 젠더 분류 작업은 없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혹은 제3의 정체성을 가졌는지 관심이 없다. 그래서 젠더 블라인드(Gender-Blind)라고도 한다.  성자유는 우리 모두의, 훨씬 고차원적인 해방을 의미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성, 여성, 인터섹스의 무분별한 구별을 최소화하고, 다양한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에게도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부여하는 시발점이 된다. 남성 우월주의도 페미니즘도 없다. 남성과 여성의 집단적 대립상태는 인격과 인격 간의 건전한 경쟁으로 치환되고, 소수자로 규정할 비교기준을 없앤 그곳에는 성적으로 소외된 이가 없다. 생물학적 성별은 병원에서 진료 받을 때만 기입하면 된다. 헌법 전문(前文)의 표현을 빌면, 성자유한 사회는-적어도 성적으로는-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는 사회다.

요컨대 성자유는 남성 위주의 전통적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는 인류의 모든 투쟁과, 하나의 평범한 인격체로 존중받길 원하는 성소수자들의 고된 노력을 모두 끌어안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다. 1986년 페미니스트 작가 마리 시어는 페미니즘을 ‘여자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진보적인 개념’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성자유는 ‘남자도 사람이고, 여자도 사람이고, 성소수자도 당연히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원초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나의 영속적 지향점은 ‘성자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 정부의 페미니즘 정책을 환영한다. 성자유의 염원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이고, 페미니즘이 ‘여성 우월주의’와 명백히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며, ‘도구로서의 페미니즘’이 가지는 효용성을 믿어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에는 생물학적 구별의 당위성이 용인되는 분야가 아직 남아있다. 그러나 그 당위성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점차 희미해지거나, 소멸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성자유를 위한 훌륭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자칭 ‘페미니스트 대통령’의 남녀동수 내각구성 의지는 그 내포하는 상징적 의미와, 성역할에 대한 선입견을 타파해 낡은 인습을 개혁하려는 점에서 돋보인다. 그러나 이는 성자유로 도약하기 위한 중간과정에 불과하다고, 갈 길이 멀다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꼭 전하고 싶다.

그렇기에 나에게 페미니즘은 일종의 망치와 같다. ‘성별(性別)의 구속’이라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성자유의 달콤한 과육을 얻기 위한 좋은 도구다. 페미니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가 남성우월주의에서 양성평등으로 바뀌고, 양성평등에서 성평등으로 발전한 것처럼, 성자유의 시대도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성자유한 미래를 위해, 나는 오늘도 이 땅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글·황순형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가사에는 철학을 목소리엔 감성을 담는 김광석을 닮고 싶어, 글에는 내 철학을 글씨에는 내 감성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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