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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개념-뿌리들: 생성(1) 니체와 베르그송
현대철학의 개념-뿌리들: 생성(1) 니체와 베르그송
  • 이정우 | 철학자
  • 승인 2017.07.3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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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이정우의 개념정리 (3)

 

▲ 프리드리히 니체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생성(becoming)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제 이 개념을 따로 주제화해 보자. ‘생성’이라고 하면 아마 ‘아이디 생성’이 떠오를 것이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도 생성에 포함된다. 하지만 이 말의 본래 뉘앙스는 세계 자체가 끝없이 차이들을 드러내는 현상, 차이생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만나는 세계의 모든 것들은 생성한다. 그런데 생성한다는 것은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론, 무론(Meontology), 생성론은 서로 밀접히 연관돼 있다. 아니, 사실상 한 문제-장(章)의 세 얼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초점을 맞춰 논할 내용은 19세기 후반 정도부터 전개됐던 서구 철학사에서의 거대한 변환, 즉 ‘존재에서 생성으로(from Being to Becoming)’의 변환의 과정이다. 


영원한 본질로부터 생기(生起)하는 현실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우선 좀 더 가시적으로 확인되는, 현실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례를 예술, 과학, 정치 분야에서 찾아내 보자. 

예술 분야에서 찾아낸 사례는 곧 인상파 미술이다. 르네상스의 회화들과 인상파 회화들을 비교해 보면, 여러 가지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차이점들 아래에는 서구문명에서의 심대한 변화가 작동하고 있다.

우선 금방 눈에 띄는 차이는 전자의 경우 모든 대상들이 이상적인데 비해 후자는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전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인물들은 현실의 인물들이 아니라 신화, 전설, 역사의 인물들이며, 현실의 인물들이라 해도 그 이상태(理想態)에 있어 묘사되고 있다. 반면, 후자의 그림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공원을 산책하며,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상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이동이 눈에 뜨인다.

다음으로 조금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자의 그림들에서 대상들은 매끈한 윤곽선을 가지고서 뚜렷한 개별성(Individuality)을 띠고 있는데 비해 후자의 그림들에서 인물들은 윤곽선이 희미하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상파 그림들에서 인물들과 대상들은 개별성을 통해서 나뉘어 있다기보다는 자연의 빛 아래에 흡수돼 빛나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다시 말해, 인상파 그림들에 있어서는 각각의 대상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모든 것들이 빛 아래에서 ‘생성’하고 있는 듯이, ‘흐르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또 하나, 인상파 미술에 오면 뚜렷한 특징이 생겨난다. 바로 ‘연작(連作)’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왜 예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연작’이 이 시대에 들어서 많이 제작됐을까?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여러 개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 대상의 유일한 본질(Essence)이 없다는 것, 또는 찾기 힘들다는 것과 관련된다. 하나의 건물을 단숨에 그 전체에서 볼 수가 없을 때, 우리는 그 건물을 여러 각도에서 본 것들을 합쳐 전체를 이해한다. 이는 공간적인 예지만, 시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사물의 본질을 알기 힘들고 단지 그 사물이 특정 시점에서 나타내는 모습들만을 알 수 있을 때, 연작이 요청되는 것이다.

다빈치는 숱하게 많은 스케치들을 했지만, 그 중 결과/정답은 단 하나다. <모나리자> 연작 같은 것은 없다. 모나리자의 이상태는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을 찾기보다는 시간 속에서의 그 변화에 초점을 맞출 때, 필연적으로 ‘연작’이 요청된다. 인상파 미술에 들어와 연작이 많아졌다는 것은, 곧 회화가 한 대상의 이상태 즉 그 본질/모범답안을 그리기보다는 그것이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 양상들을 그리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모네의 유명한 <루앙 성당>도 그 좋은 예다.

이런 여러 차이들을 잘 음미해 보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상태’의 그림으로부터 ‘흐름’의 그림으로의 전환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존재에서 생성으로”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철학사가 줄곧 찾아왔던 것은 변하는 가운데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실체(Substance)’, ‘참 실재(Reality)’, ‘본질’ 같은 것이었다. 즉, 영원하고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존재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탐구과정에서 ‘이데아’(플라톤), ‘물질’(에피쿠로스), ‘창조주’(중세 일신교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나드’(라이프니츠)를 비롯한 여러 중요한 개념들을 배태해낼 수 있었다. 이런 흐름을 총칭해서 곧 대문자로 쓴 존재(Being)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 이런 형이상학적 추구와는 다른 경향이 등장한다.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세계, 우연 또는 우발성의 가치,(1) 생생하게 변해 가는 세계, 새로운 창조에의 열의에 대한 관심 등등. 이런 흐름을 총칭해서 대문자로 쓴 생성(Becoming)이라 한다. 현대문명의 사상적-문화적 기저에는 바로 “From Being to Becoming”이라는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하겠다.

이런 철학적 변화는 과학의 영역이나 정치의 영역에서도 확인된다. 과거에 생명계에서의 종(Species)이란 영원불변한 것이며, 종의 새로운 생성이라든가 종들 사이의 교배라든가 등등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진화론의 등장은 이런 세계관을 무너뜨렸으며, 생명의 세계란 다윈의 저작 <종의 기원>이 시사하듯이 새로운 종들이 태어나기도 하고, 기존의 종들이 소멸되기도 하고, 종과 종 사이에 연계고리가 만들어지기도 하는 등, 매우 역동적이고 복잡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인간을 포함해 생명체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존재에서 생성으로’의 대표적인 예들 중 하나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거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과거에 사람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틀 내에서 태어나, 마치 생명체들이 각 종에 속해 살아가듯이 그렇게 각 계층에 속해 살아갔다. 정치는 왕과 관료들에 의해 구성된 틀이 아래로 내려와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형태를 띠었다. 현대 대중사회의 도래는 정치의 세계를 대중 각인(各人)들의 욕망의 모자이크로 만들었으며, 정치적 형태는 이런 모자이크의 흐름이 빚어내는 결과, 특히 여론과 선거를 통한 결과로써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어떤 주물이 위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흐름이 일정한 경로를 통해 일정한 주물을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 또한 ‘존재에서 생성으로’의 전환을 잘 보여주는 예다.

“생성은 무죄다!”: 니체

이제 이런 흐름을 압축하고 있는 두 사람의 위대한 철학자를 통해서 이 흐름의 철학적 알맹이를 읽어내 보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런 전환을 대표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철학은 A. N. 화이트헤드, 마르틴 하이데거, 질 들뢰즈 같은 인물들을 거쳐 오늘날로 이어지고 있다.
니체는 서구 철학사의 거대한 변환, ‘존재에서 생성으로’의 변환을 진수시킨 인물, 철학사의 이정표에 이름을 각인한 인물이다. 니체는 서구 철학사에서 ‘문제적 인물’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며, 서구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를 모양지은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서구의 철학은 영원하고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것의 추구를 기본 동력으로 전개돼 왔다. 이런 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일신교의 신학으로 대변된다. 그러나 니체는 영원불멸의 것을 희구했던 서구 존재론사를 전복시키고 생성과 창조의 철학을 연 선구자다. 그의 사유는 플라톤 이래 다양하게 변주돼 온 ‘존재’의 철학에 일침을 가하고 생성존재론(Ontology of becoming)의 단초를 열었으며, 그가 연 길은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들뢰즈 등으로 이어진다. 

그 이전에 플라톤과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구적 가치에 철퇴를 가한 것은 계몽사상가들이었다. 계몽사상가들(특히 프랑스의 ‘필로조프’들)은 ‘앙시엠 레짐’을 타파하고 ‘모더니티’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사유 수준에서 본격적인 전통 해체에 착수한 인물은 역시 니체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외치면서, 서양 문명의 근저에서 작동하고 있는 플라톤적 가치와 유대-기독교적 가치를 깨부수는 망치를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비전으로서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를 근간으로 하는 ‘초인’의 사상을 설파했다. 기존의 가치를 송두리째 거부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 니체는 서구문명사에 있어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었다.
니체 사유의 초석은 영원회귀(Eternal return)의 긍정이다. 영원회귀란 무엇이고 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생성은 대개 극복의 대상이었다. 모든 것이 생성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그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흘러가다가, 생로병사를 겪은 후 죽는 것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때 ‘허무주의(Nihilism)’가 등장한다.

어떤 기댈 곳도 없이 오로지 끝없는 생성만이 계속되는 이 세계, 아무런 의미도 없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를 거듭하는 이 세계 앞에서 끝없는 허무의 나락으로 빠져들 때, 사람들은 ‘삶’에 대해서, 나아가 ‘존재’에 대해서 ‘앙심(르상티망)’을 품게 된다. 왜 나는 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한 가운데에서 태어나고 또 죽어야 하는가? 어째서 세계에는 내 삶을 궁극적으로 뒷받침해 줄 동일성(Identity)이 없다는 말인가? 

이는 곧 생성만이, 차이들만이 영원히 회귀하는 세계, 다시 말해 새로운 차이들만이 계속 생성하는 세계에 대한 앙심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철학자들은 그토록 “Being”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외친다. “생성은 무죄다!” 세계가 생성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덕적 죄가 없다.

생성이 무죄임을 깨달은 사람은 영원회귀를 긍정한다.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차이생성의 반복을 긍정하는 것이다. 통상 반복이란 어떤 같은 것의 반복으로 이해되지만, 시간 속에서 완벽히 같은 것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항상 차이가 동반된다. 차이나는 것들만이 영원히 회귀한다.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차이나는 것들이 반복된다는 것, 결국 세계는 차이를 계속 산출하면서 이어진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 이것이 영원회귀의 긍정이다. 이는 곧 시간과 생성을 부정하고 즉 앙심을 품고 이데아니 신이니 하는 영원불멸의 것들을 꾸며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원회귀를 긍정하는가? 니체는 일체의 “그랬었다”를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했노라!”로 바꿀 것을 요청한다. 시간과 생성변화, 우연과 덧없음의 허망함 앞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긍정하는 존재로 화하는 것. 하지만 이것은 결코 사후적 정당화가 아니다.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긍정하는 자기정당화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사건들의 일어남 그 자체를 에누리 없이 긍정하는 것이다. 

시간을 긍정한다는 것은 사건의 파편들을 이어붙이고, 생성의 수수께끼를 풀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편들을 거두어들이는 전체, 수수께끼를 해소시키는 해(解), 우연을 설명해 주는 필연을 해체함으로써, 파편이 더 이상 파편이 아니고, 수수께끼가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며, 우연이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되는 경지를 가리킬 뿐이다. 전체, 해, 필연을 해체해버린 파편, 수수께끼, 우연은 더 이상 부정적인 뉘앙스에서의 파편, 수수께끼, 우연이 아니게 된다. 이런 경지에서만 영원회귀는 긍정된다. 

삶은 주사위놀이와도 같다. 매번 던질 때마다 중요한 것은 “그랬었다”라는 우발성을 의지의 필연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 던져진 수에 대한 사후적 정당화가 아니라 매 수마다 동반되는 의지의 필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그랬었다”에 대해 투덜거리며 따라가기보다는 “창조적 번개의 웃음”을 터뜨리는 것, 진정으로 자신의 사건을 사는 것, 이것이 영원회귀의 긍정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영원이고, 그 사랑의 증표는 회귀다.

서구의 기독교적 가치는 원한=앙심, 가책=죄의식, 그리고 금욕으로 구성된다. 니체에 의하면, 서구의 문명은 그리스-로마적 건강함을 유대-기독교적 병약함으로 대체함으로서 망가지기 시작했다. 고대적 환희와 승리가 중세적인 어두침침함과 비틀림에 의해 더럽혀진 것이다. 서구문명은 ‘로마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의 대립의 역사이며, 후자가 전자를 정복함으로써 서구의 몰락은 시작됐다.

이런 흐름은 근대에 이르러서조차도 치유되지 못했다. 현대인들의 저 왜소함과 평범함을 보라. 니체는 외친다. “선악의 저편에 숭고한 수호의 여신들이 있다면, 내가 한번 볼 수 있게 해 달라! 아직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 만한 완전한 것, 마지막으로 이뤄진 것, 행복한 것, 강력한 것, 의기양양한 것을 한번 볼 수 있게 해 달라!”

유대교적인 원한=앙심은 기독교로 전환되면서 가책=죄의식을 발명해냈다. 유대교는 “그들은 악하다”고 말한다. 이제 유대교를 이은 기독교는 말한다. “나는 악하다!”고. 기독교는 원한의 방향을 바꿔 한 개인의 ‘양심’ 속에 내재화한다. 이로부터 ‘가책’이 생겨난다. ‘원죄설’이야말로 이 가책의 정당화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신자들은 “더 많은 고통을! 더 많은 고통을!”이라고 외친다. 더 많은 고통을 내면화할수록 더 큰 구원의 기회가 보장된다.

유대-기독교가 발명해낸 또 하나의 개념은 ‘금욕’이다. 모든 밝은 것, 강한 것, 행복한 것들은 ‘죄’로 전락한다. 원한이 세계/삶을 고통으로 보고, 가책이 고통을 내면화한다면, 금욕은 고통을 벗어나고자 한다. 니체는 이런 금욕주의에서 ‘반(反)자연’, ‘삶을 거스르는 삶’의 전형을 본다. 금욕적 인간들은 무리를 이룬다. 공동체 속에서 우울증을 극복한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무리를 조직한다. 우리 안에서 개인들은 왜소화되고 하향평준화된다. 

니체에게 현대(니체의 당대)는 허무주의의 시대다. 허무주의는 세 가지의 얼굴로 나타난다. 1)소극적 허무주의는 의지의 소멸을 지향한다. 의지하는 것은 귀찮다. 하지만 귀찮아하는 것 자체도 귀찮다. 2)반동적 허무주의는 무를 의지한다. 죽음에의 욕동. 해방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이뤄진다. 3)부정적 허무주의는 초월을 지향한다. 니체는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에게서 허무주의의 전형을 본다.
니체가 지향하는 것은 의지의 소멸과 투쟁하는 의지에의 긍정이자, 무에의 의지와 투쟁하는 존재=생성에의 의지의 긍정이며, 초월에의 의지에 투쟁하는 창조에의 의지의 긍정이다. 창조행위는 초월적 동일자가 아닌 의지적 생성에의 긍정이며, 무가 아닌 새로운 생성에의 긍정이며, 의지의 소멸이 아닌 의지의 확장에의 긍정이다.

이런 긍정이란 곧 “삶의 형식을 창조하는 힘” 즉 ‘조형력(from-giving force)’에의 긍정이다. 형식을 창조하는 힘은 곧 해석하는 힘이기도 하다. 니체에게 해석이란 세계를 특정관점에서 보는 인식론적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를 특정한 해석 주체로 내세우는 행위다. 한 인간의 관점이란 곧 그의 존재다. 나아가 해석이란 힘과 더불어, 입각해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삶의 방식 그 자체다. 산다는 것은 곧 힘에의 의지의 활동이며, 이것은 다름 아니라 ‘관점을 세우는 힘’으로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해석주체로 세워가는 인간,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적/초월적 진리에의 믿음과 그 파멸로 인한 절망이라는 양극을 무효화시키는 인간, 그가 곧 초인(超人)이다. 초인은 가치들의 가치를 해석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세워나가는 해석적 주체다. 뱀의 대가리를 물어뜯어라! 뱀 대가리를 수없이 물어뜯어 내뱉는 고난의 밤들을 버티어내고 마침내 새로운 리라(lyra)를 얻는 자, 그가 곧 초인이다. 마침내 영원회귀를 기쁘게 긍정하게 된 인간, 삶을 기쁘게 긍정하게 된 인간. 이미 ‘인간’ 그 자체를 넘어서 가는 초-인!

이런 니체의 철학이 그저 몰락해 가는 서구문명의 끝자락에서 터져 나온 단말마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현대라는 시대를 새롭게 정초해 준 희망과 비전의 사유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그러나 현대 서구인들에게 나아가 현대인 일반에게 니체를 읽는 것은 아마도 일종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일일 것 같다. 서구인이 아닌 우리로서는 좀 더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서 니체를 읽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시간과 생명 그리고 창조: 베르그송

 
▲ 앙리 베르그송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앙리 베르그송은 19세기에 그 발단이 마련된 생성존재론을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음으로서 현대철학의 초석을 마련한 거장이다. 베르그송이 니체에 의해 마련된 ‘생성의 무죄’라는 테마를 탄탄한 철학사적-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엄밀한 형태로 다듬어냄으로써 20세기의 형이상학/존재론이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유는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들뢰즈 같은 거장들로 이어져 왔다.

베르그송 사유의 강점은 그가 그의 실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서 사유하거나 시대의 분위기에 들어맞는 사유를 하거나 또는 어떤 특정한 정치적 정향을 가지고서 사유하기보다는, 학문의 역사(여전히 서양 학문사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전체를 그 근저에서 검토하고 새로운 학문 전반을 정초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적 가설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사유의 잘 알려진 측면들보다는 그가 자신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가설인 ‘지속’ 개념에 어떻게 도달했는가에 초점을 맞춰 보자. 이는 니체의 “생성의 무죄”를 잇는 생성존재론의 기초에 해당한다.

베르그송은 어느 날 제논의 패러독스를 강의하고서 학생들과 산책하던 어떤 순간에 지속의 생각이 떠올랐다고 스스로 회상하고 있다. 그는 이때 서양학문의 역사에서 시간개념은 늘 공간개념으로 환원돼 이해돼 오지 않았나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제논의 파라독스는 어떻게 그의 이 생각을 일깨웠을까?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했던 엘레아학파의 일원이었던 제논은 그의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가설, 즉 다자성(Multiplicity)과 운동/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논증하고자 그의 패러독스들=역설들을 개발해내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패러독스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경주를 한다. 거북이 아킬레우스보다 더 앞에서 출발할 경우 아킬레우스는 거북을 결코 추월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추월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거북이 있던 자리까지는 가야 한다. 그런데 거북이 아무리 느리다 한들 그 사이에 조금은 앞으로 갔을 것이다. 발 빠른 아킬레우스라 해서 시간을 초월해서 달릴 수는 없다. 그 역시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일정한 시간을 거쳐야 거북이 있던 곳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거북이 아무리 느린들 아무리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 해도 그 사이 조금은 앞으로 갈 것이다. 이런 과정이 계속 되기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결코 거북을 추월할 수 없다.

제논은 왜 이 맹랑한 역설을 제시했을까? 그것은 다자성(이 세계에는 숱하게 많은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운동/변화(세계는 계속 운동/변화를 겪는다는 것)를 인정할 경우, 바로 위와 같은 역설이 초래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논증은 이른바 ‘귀류법(歸謬法)’이라 불린다. “~는 무리수임을 증명하라”는 문제를 봤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증명한다. “~가 유리수라 해 보자, 그러면 ~한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는 무리수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제논은 “다자성과 운동/변화가 있다고 해 보자. 그러면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우와 같은 모순 -눈으로 봤을 때는 따라잡는데, 위의 논리로 보면 따라 잡지 못한다는- 이 생긴다. 그러므로 다자성과 운동/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증한 것이다.
학문의 역사에서 제논의 패러독스는 수학자나 철학자라면 반드시 한번은 마주쳐야 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근대 이후에도 물리학자, 수학자, 형이상학자가 이 패러독스를 풀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미적분’이라는 빼어난 수학적 도구가 발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의 해법은 긴 논증이나 복잡한 수식이 아니라 단 한 명제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때로 단 하나의 생각의 전화가 거대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베르그송이 볼 때 패러독스의 해결은 간단하다. 제논은 시간을 공간화해 논증한 것이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은 현실 속에서 운동/변화하고 있고 그 시간은 연속적인 흐름이다. 그런데 이를 종이 위에 공간해 놓고서 자르고 붙이고 하면서 논증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시간을 왜곡한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종이 위에다가 수식을 적으면서 이 패러독스를 해결코자 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런 행위 자체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간은 정지돼 공간 위에 표상될 수도 없고, 불연속적으로 분할될 수도 없으며, 오려붙이는 등의 조작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시간은 절대 연속성이며 그 어디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흐름이며, 절대적 생성이다. 

베르그송은 서구의 철학이 시간의 본성을 오래도록 망각해 왔다고 말한다(후에 하이데거는 이를 이어서 ‘존재 망각’을, 들뢰즈는 ‘차이 망각’을 논하게 된다). 제논의 역설에서 나타난 다자성과 운동/변화의 부정은 물론 그 후에 극복되지만, 그 그림자는 생각보다 길고도 길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과학철학적 판본이라 할 에밀 메이에르송은 과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일성의 사유’가 19세기까지도 지배해 왔음을 분석했다. 베르그송 역시 고전 역학으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은, 흔히 고중세의 사유와 대비적으로 논의되지만, 사실 그 존재론적 근저에서는 플라톤의 그림자 아래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근세 수학에서의 미적분의 발명에는 높은 의미를 부여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미적분은 ‘연속적 운동’을 수학적으로 표상할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이다. 고대 과학에서는 연속적 운동을 표상할 수 없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 개념을 통해서, 운동의 시작점에 끝점에 초점을 맞춰 다룰 수 있었을 뿐이다. 14세기에 활동한 파리와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들에 의해 미적분의 기초가 놓이고, 17세기에 이르러 라이프니츠와 뉴턴은 각각의 방식으로 미적분(당대는 아직 미분만, 즉 무한소미분만이 정립됐다)을 창시했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무한소미분’을 통해서 연속적 운동, 순간 가속도 등이 수학적으로 포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무한소미분은 운동의 연속성과 시간의 연속성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볼 때 이 역시 시간의 공간화와 양화(Quantification)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베르그송이 볼 때 수학은 세계를 양적 관점에서만 표상할 뿐 그 질적 변화를 포착하지는 못한다. 근대 철학자들은 ‘제1 성질들’과 ‘제2 성질들’을 구분하면서 ‘제1 성질들’만이 실재라고 봤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제2 성질들(좁은 의미에서의 질들)이야말로 오히려 세계를 구성하는 실재이며, 제1 성질들(양적-기하학적 존재들)은 오히려 추상물들에 불과하다고 봤다. 매우 복잡한 존재론적 논변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지만, 베르그송의 사유에서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며 근대 철학으로부터 현대철학이 변별돼 나오는 핵심적인 지점들 중 하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르그송은 자신에게 미적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질적 미적분’임을 언급한다.

베르그송이 근대 과학을 넘어 세계의 질적 파악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간주하는 두 과학은 열역학과 진화론이다. 열역학 제1법칙, 즉 ‘에네르기 보존의 법칙’은 여전히 엘레아적 그림자 아래에 있다. ‘보존’이라는 개념 자체가 동일성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역학 제2 법칙 즉 엔트로피의 법칙(우주의 모든 것들은 등질화되며, ‘화이트 노이즈’ 상태가 된다는 법칙)은 우주 전체가 흘러가는 ‘시간의 방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베르그송은 이 법칙을 “모든 물리학 법칙들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인 법칙”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 열역학 제2 법칙과 진화론은 정확히 대조된다. 진화론은 오히려 우주 전체가, 적어도 지구 전체가 생명체들이 점차 ‘다질성’을 획득해 온 역사였음을 보여주기에 말이다. 열역학이 말하는 세계와 진화론이 말하는 세계가 대조된다. 이로부터 생명에 대한 베르그송의 유명한 정의가 나온다.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이다.” 베르그송은 이 두 과학적 성과를 종합해서 우주의 생성을 ‘생명과 물질의 투쟁’의 과정으로서 파악한다. 이로써 베르그송의 질적 형이상학의 기본 구도가 정립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이 하나 남았다. 베르그송은 기존의 질적인 사유들 또한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대전제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세계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도 세계 그 ‘전체’는 일정하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베르그송은 이 전제조차도 벗어나야, 즉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질적 탄생이 항상 이뤄지고 있으며 이것이 곧 ‘창조’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때에만 우리는 시간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렇게 발견된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기초로 해서 전개된다.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 

(1) ‘우연’은 프랑스어 ‘hasard’, 영어 ‘accident’에 해당하고, ‘우발성’은 프랑스어 ‘contingence’, 영어 ‘contingency’에 해당한다. 존재론적으로는 미묘하게 구분되지만, 지금은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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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 철학자
이정우 | 철학자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