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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회일 | ‘카톡' 이달의 에세이 당선
  • 승인 2017.08.3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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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반공주의적인 집단일, 대한민국 군대에서 나는 이따금 공산체제 하에 사는 기분이 들었다. 출신배경과 상관없이 모두가 통일된 생활수준을 누렸고, 의식주와 무상의료가 보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책 속의 평등사회를 간접체험 하는 것 같았달까. “먹여주지 재워주지 얼마나 좋냐”는 어른들의 말은 단순히 짓궂은 농담만은 아니었는지, 매일 전역을 꿈꾸며 달력에 엑스표를 치면서도, 정글 같은 경쟁사회로 돌아가면 다시 신경이 날카로워질 것이 예감돼 씁쓸하기도 했다. 자유와 개성이 제한돼 연극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던 생활도 나로 하여금 북한주민이 된 기분이 들게 했다. 마치 미국 로큰롤이 듣고 싶어 안달이 난 동독청년처럼, ‘자유세계’에 대한 욕망이 생겨났다. 커피를 싫어하던 내가 잡지 속 ‘모카 프라푸치노’라는 단어를 보고 침이 고였고, 합법적 성추행(?) 문화라 생각하던 걸그룹 사진을 관물대에 붙여놓았는가 하면, 언제 2G폰을 고집했었냐는 듯 ‘카톡’이라는 것이 해보고 싶어 괴로워졌다.

제대 후, 까페 메뉴판에 적힌 각양각색의 커피를 차례대로 맛보았고, 걸그룹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결정적으로, 갓 계약한 스마트폰을 손에 꼭 쥔 채 설레는 마음으로 ‘카톡’을 내려받았다. 카톡은 정말 편리했다. 똑같은 이야기도 일반 문자로 할 때보다 왠지 더 재미있었다. 이모티콘은 어찌나 표정이 절묘한지 한동안은 사용할 때마다 낄낄거렸다. 형식적인 부가기능이라 생각했던 보이스톡과 영상통화는 국제전화 하며 조마조마 하던 것을 옛날이야기로 만들었고, 각양각색으로 꾸며진 지인들의 ‘프사(프로필 사진)’와 ‘상메(상태 메시지)’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자연스레 카톡은 하나의 삶의 현장이 됐다. 친구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꿈을 나누고, 때로는 공통의 적을 비판하기에 참 용이한 무대였고, 직장 동료와는 빛의 속도로 자료를 주고받는가 하면, 어떤 이와는 썸을 타고, 사랑의 속삭임을 나눴다. 카톡 덕분에 근엄하게만 느껴졌던 친척 어르신의 ‘귀여우신’ 속마음을 알게 된 적도 있었다. <타인의 삶> 속 동독정보부 요원이 도청 대신 카톡 사찰을 했다면, 그래서 이 수선스러운 인간군상을 더 빠르게, 다량으로 보게 됐다면, 영화 속에 묘사된 심경변화가 더 일찍 이뤄 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카톡이 없는 전화와 카톡이 깔려있는 전화의 차이는 상당했다. 카톡이 실행되고 있는 이상, 마치 광화문 인파 속에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면 과장일까. 줄곧 시대의 유행을 거스르는 차별화 전략을 펼치며 살아온 나였지만, “대은은조시(大隱隱朝市, 큰 은자는 조정과 시장에 숨는다)”라는 옛 말까지 애써 끌어들이며 디지털 사회망에 접속된 기분을 즐겼고, 성공적으로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가고 있다며 뿌듯해 했다.
‘톡 해~’라는 인사말이 입에 붙기 시작할 때 즈음, 카톡의 문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없어지지 않는 ‘1’을 둘러싼 심리전, 프로필의 의미, 단톡방의 기류, 대화를 원하지 않는 자를 향한 의사표시… 사람 일이 모두 그렇듯, 카톡에도 처세술이 필요했고, 카톡 대화를 분석하고 적당한 답장을 조언하는 방송까지 생겨났다. 카톡이 오묘한 밀당과 우선순위의 게임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SNS가 Sehnsucht & Saudade의 약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저 두 S가 독일과 브라질 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특유의 향수 어린 감정-갈망-그리움을 뜻하듯, 카톡에는 카톡만의 그리움이 있었다. 용건도 없이 카톡을 확인하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말을 쓰고, 자려고 누웠다가 지난 대화를 다시 읽어보고, 홧김에 카톡을 지웠다가도 이내 다시 설치하고… 이런 행동의 근저에 그리움이 있었다. 예컨대, 오늘날 가벼운 터치로 카톡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어르신들은 분명 10여 년 전만 해도 문자 메시지 한통 쓰기도 벅차하셨다. 카톡은 카톡만의 방식으로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잘 타는 땔감으로 사용하는 듯했다.

‘젠주흐트’는 괴테로 하여금 펜을 잡게 했고, ‘사우다지’는 조빔을 피아노 앞에 앉혔다지만, 카톡이 자극하는 그리움의 감정은 생산적이지 않았다. 먼 거리와 결핍에서 생겨나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과잉 연결과 넘침에서 오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난 카톡 안 써”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마치 ‘밀가루 끊기’, ‘미디어 금식’처럼 절제의 의지가 느껴지는 하나의 쁘띠 선언 같은 뉘앙스와 함께. 카톡을 사용하며 생기는 몇 가지 불편한 감정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는 듯 했다. ‘사람 사는게 다 그런거지’ vs. ‘이건 아니지’.

자유진영(?) 탐방을 마친 나는 다시 예전의 라이프스타일로 돌아왔다. 붉은 광장에서 소련기를 흔드는 할머니가 된 것은 아니지만, 자발적인 엠바고를 걸었달까.

‘아이스 블라블라푸치노 시럽 라떼’를 내가 정말 원해서 마시는 것인지, 요란한 이름만큼 다양한 재료들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인지 앞뒤 순서가 모호해졌고, 내가 열심히 연습한 걸그룹의 전문적인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것인지, 예술이라는 구실 좋은 명분 아래 맘껏 시선 추행(?)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졌고, 소통을 위한 도구로 시작했던 카톡이 점점 도구인지 목적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러시아식 유머’로 내 우여곡절의 결말을 요약할 수 있으리라.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카톡이 나를 하더군요!”   


글·구회일

체면도 차리고 돈도 벌자고/하다하다못해 번역업을 했더니/권말에 붙어 나오는 역자 약력에는/한사코 XX대학 중퇴가 XX대학 졸업으로 오식이 돼 나오니/이렇게 돼서야 그만이지/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
 
김기영 <파자마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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