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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들의 봄
리얼리스트들의 봄
  • 안영춘/편집장
  • 승인 2010.05.1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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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르 디플로' 읽기]

 이제 ‘삼한사온’은 한반도의 겨울 날씨가 아니라 봄 날씨의 특성이 된 듯하다. 생체의 달력과 바깥 공기의 달력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무는 황망히 꽃을 터뜨리고 떨구었다. 이토록 낯선 봄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월호는 3년 전 세상을 등진 앙드레 고르를 호출했다(33면). 한국에서는 80대의 아내와 동반자살, 그리고 그 선택을 앞두고 아내를 위해 쓴 <D에게 보낸 편지>로 유명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생태주의 이론을 정초한 위대한 철학자였다.

그는 묻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태론에 관련된 제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각종 억압을 없애고 바로 인간이 공동체와 그들의 환경, 자연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경제·사회·문화 혁명인가?” 그에게 생태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이행’이었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대면하는 건 필연이었다.

그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경제 생태계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시작한 금융위기는 2년 만에 공공부채 위기로 ‘변종’했다. <르 디플로>는 이 위기에서 ‘국가적인 것’을 환기한다(1, 4~5면). 국제 투기자본의 손아귀로 넘어간 공공부채를 국가의 울타리 안으로 회수하고, 주권자의 민주적 합의를 거쳐 해법을 찾자고 제안한다. 국민 세금을 쏟아부어 부자들에게 이자를 갖다바치면서, 왜 국민에겐 묻지 않느냐는 상식적인 물음과 함께.

<르 디플로> 한국판은 ‘국가적인 것’의 다른 면을 상기시킨다. 천암함에는 두꺼운 기호와 담론의 장막이 덮여 있다(1, 26~27면). 진실은 국가주의의 폐쇄회로를 통해 징후적으로만 재현된다. 대통령은 ‘밥 먹으면 배부르다’ 수준의 빤한 얘기로 말을 흐리고, 보수 언론은 그 빤한 얘기를 재해석해 상상의 적을 눈앞에 전시한다. 방송은 편성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탁월한 ‘정치적 예능’으로 분위기를 거든다. 국·영·수 중심으로 암기과목을 열심히 하면 전국 수석이라는 얘기다.

자본과 국가의 관계는 수학적으로 미분할 수도 있고, 적분할 수도 있다. 둘의 관계는 국가부채와 천안함 참사 사이에서 변주된다. 그리고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에서 하나로 수렴된다(25면). 박지연씨의 죽음은 산업의학적으로 삼성반도체의 작업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국가와 자본은 그녀의 죽음을 ‘단순 병사’로 처리했다. 법이 그렇고 제도가 그렇다지만, 그 법과 제도는 바로 그들이 만든 암기과목이다. 우리 곁엔 제2, 제3의 박지연이 있다.

서울 홍익대 앞 두리반 식당은 ‘제2의 용산’이라고 불린다. 국가가 경전철을 놓는데 민간자본이 수용과 철거를 한다. 노동절 120주년이던 5월 1일, 그곳에서 난장이 열렸다(38면). 독립 음악인들은 스스로를 ‘음악하는 노동자’로 규정하고, 철거 반대투쟁에 나섰다. 마이크와 악기가 연대하는 풍경은 앙드레 고르가 자본주의와 생태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사유했던 것과 공명한다. 그들의 급진성은 힘이 아니라 상상력에서 나온다.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뉴욕타임스>가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했던 노엄 촘스키에 대해 <르 디플로>는 그런 서열 평가 대신 ‘낙관주의 리얼리스트’라는 단출한 자리를 내준다(1, 6~7면). 그에게는 다가올 세상을 상상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 실천이다. 더 나은 미래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글·안영춘 편집장 editor@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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