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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독자성을 위해
지속가능한 독자성을 위해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7.11.30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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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진보 언론사’ 간부들을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간지 고위 간부들, 또 다른 이들은 시사주간지의 편집책임자들이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경영상의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촛불시민혁명 이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뒤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독자들의 ‘경각심’이 무뎌진 탓인지 진보매체들에 대한 호응도가 떨어졌고, 또 예전에 자사 매체가 비판한 재벌들의 총수들이 구속된 처지에서 광고수주가 쉽지 않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어떤 매체들의 경우, 불과 1~2년 사이에 판매부수가 거의 반 토막이 나서 존폐의 갈림길에 놓였다면서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대안언론으로서 신선한 공론장의 가능성을 보여준 인터넷 매체들까지도 혹한기의 보릿고개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한 언론사 간부는 재벌들의 광고축소에 대해 촛불혁명 보도에 대한 보복이라며, 이에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고 단호한 결기를 보였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아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에 의하면, 요즘 한국언론들은 보수성향이든 진보성향이든 재벌문제 보도를 다루는 데 있어 극도로 몸을 사리고, 이러다 보니 특히 진보매체 젊은 기자들의 ‘기자정신’이 경영진의 경영마인드와 충돌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뭐, 보수 상업언론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재벌의 대변인, 홍보담당자 역할을 ‘변함없이’ 자임하고 있지만요.
 
이런 상황이다보니, 요즘 언론사들은 저마다 판촉활동에 적극적입니다. ‘파워풀한’ 일간신문과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대형 언론사들이야 막대한 액수의 현금이나 현물을 뿌리며 독자유치에 나서는 한편, 자사의 기자 등 직원들에게 두둑한 수당을 쥐여주며 판촉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언론사의 막강한(?) 영향력 덕택에, 사내 판촉 캠페인을 한 차례만 해도 수천 부의 구독실적을 올리곤 합니다. 또 언론사의 저명성(?) 덕택에, 꽤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들이 앞다퉈 스스로 구독자임을 ‘커밍아웃’하며 구독캠페인을 자원합니다. 
 
그러나 저희에게는 대형 신문사처럼, 현금을 쥐여주며 독자를 현혹할 자금력도, 시민사회와 정치권을 연결하는 막강한 인적 네트워크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대형 언론사 소속 자매지처럼, 발행 광고를 마음대로 낼 수 있는 신문지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저들에게 나름의 ‘본연의 길’이 있는 것이고, 저희에게도 ‘숙명의 길’이 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랑스럽지도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은 사실은, 꽤 오래전 이 공간에서 언급했듯 발행인을 비롯해 편집위원들도, 번역위원들도, 그리고 그 지인들도 세상물정을 잘 몰라, 어디 가서 강매를 하거나 광고 한 건 받아오기 힘든 백면서생들이라는 점입니다. 창간 때나 지금이나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원문에 충실하도록 번역문을 다듬고, <르 디플로>의 가치에 부합하는 훌륭한 필진을 찾고, 시대정신에 맞는 편집기획을 하고, 기껏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에 저희 매체의 진정성을 알리는 정도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럴수록 반성하고 노력하면서, 저희는 가파른 실적 곡선을 향해 질주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디뎌 왔습니다. 그렇다 보니, 창간 10년이 다 되도록, <르 디플로> 한국어판은 제도권보다는 비제도권, 주류보다는 비주류, 중심보다는 경계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고수해왔습니다. 세르주 알리미의 지적처럼, 어느 신문의 발행 부수가 많다고 해서 그 신문의 질적 완성도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럴수록 무료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사가 무료로 제공된다면 언론사의 생존은, 더 이상 독자가 아니라 검색엔진과 광고에 좌우될 것입니다. 결국, 독자의 관심과 참여 없이는 신문은 상품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온갖 유혹 속에서 저널리즘의 본연의 길을 걷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로지 독자와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르주 알리미는 최근 프랑스어판 독자수가 정기구독 9만 456명, 매달 가판대나 서점에서 낱권 구입하는 구독자 15만 6,585명, 온라인 구독 2만 8,790명 등 총 27만 5,831명(2016년 말 기준)이라며, “우리의 이름을 승리라 부르라!”며, 독자와 함께 거둔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다시 저희 한국어판으로 돌아오면, 우리의 현실은 소름 돋을 정도의 혹한기입니다. 그럼에도 독자님들과의 연대에서는 강렬한 온기가 느껴집니다. 서울의 대학가를 비롯해, 강남, 논현, 홍대, 여의도, 인천과 부천, 대전과 전주, 대구, 광주 곳곳에서 자발적인 <르 디플로> 읽기모임이 운영되고, 참여 독자들은 학생, 직장인 가정주부, 연구원, 군인, 경찰, 심지어 판사‧변호사 등 법조인들까지 다양합니다. 또한 열렬 독자그룹의 팟캐스트 활동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료 콘텐츠로 운영되는 <르 디플로>의 생존방식은 독보적입니다. 전체 매출 중 독자구독료가 95% 이상 차지하는 매체는 한국 언론사상 유례없을 것입니다. 저희는 유료독자가 아닌 일반 네티즌들에게도 <르 디플로>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무료 기사를 공개하지만, 늘 적정량을 놓고 고민합니다. 무료공개를 많이 할 경우 <르 디플로>가 많이 알려지겠지만, 자칫 유료 독자분들의 외면 속에 검색엔진과 클릭 광고의 유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르 디플로> 한국어판의 자산은 지난 2008년 10월 창간 이후 아카이브에 고스란히 축적된 3,000건 이상의 다양하고 수준 높은 글들과, 그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독자분들입니다. 고급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국내 미디어 학자들의 진단은 백번 옳은 이야기지만, <르 디플로>의 가치와 그 운영방식에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르 디플로>의 존재와 가치를 알려고 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제도권 언론의 시장논리와 정파적 시각에 포획된 그들의 편협한 관점이 가장 큰 문제인 듯싶습니다. 아마도 대학 강단에 선 학자들이 수업시간에 <르 디플로>의 가치에 대해 단 한 마디라도 언급한다면, 저희로선 더할 수 없는 큰 위안과 격려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경험상 그들의 ‘지지’를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통신회사나 미디어 기업들, 그리고 돈 많은 단체들이 지원하거나 후원하는 연구주제들에 대해선 경쟁적으로 나서겠지만, ‘까칠한’ 언론매체의 가치와 운영방식 같은 소소한 진실에 대해 시간을 뺏기고 싶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믿을 곳은 <르 디플로>를 가장 잘 아시는 독자님의 관심과 격려밖에 없습니다. 암웨이 같은 네트워크판매방식을 결코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나름대로 자신들의 가치로 채택한 ‘프로슈머’ 개념은 저희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님이 구독기간 중 <르 디플로>의 가치를 경험하신 뒤 새로운 독자를 한 분 한 분 추천하시면, 이후 그 분도 <르디플로>와의 경험을 연장하며, 또 다른 한 분을 추천하시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저희를 믿고 응원해주시는 독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형 신문사처럼 촘촘한 판매망이 없지만, 독자님들의 헌신적인 추천으로 새로운 개인 독자와 공공도서관 등 기관독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저희 한국어판에서도 언젠가 독자 여러분과 함께 당당하게 “우리의 이름을 승리라 부르라!”라고 노래할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르 디플로> 한국어판의 실적이 개선되면, 그만큼 독립성이 확고해지고 양질의 콘텐츠 보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독자님, 다시 한 번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 주위의 공공 도서관이나 이웃에 <르 디플로>를 추천해주십시오!
- 지인들과 <르 디플로> 읽기 모임을 만드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르 디플로>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알려주십시오.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사회의 지적 패러다임을 확 바꿀 것이라는 거대한 희망을 품고서, 저희 <르 디플로> 편집팀은 독자님과의 관계를 이어가길 희망합니다. 연말의 혹한 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2018년엔 <르 디플로>와 더불어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며 성큼 전진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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