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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적 자본주의’로!
‘범죄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적 자본주의’로!
  • 성지훈 | 편집위원, 인문학자
  • 승인 2017.12.0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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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3남 김동선 씨가 뉴스의 중심에 서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북 포항에 지진이 발생해 ‘액상화’ 등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지면을 채우던 와중에, 모 재벌가 자녀의 ‘갑질 폭행’ 소식이 주요뉴스로 보도됐다. 처음에 익명으로 처리된 재벌가와 장본인은 사건의 특성상 곧 실명으로 공개됐고, 김동선 씨를 포함해 폭행과 관련한 불량한 가문의 역사를 가진 한화그룹은 여론의 십자포화를 받았다. 한화에 붙은 ‘가죽장갑’이나 ‘폭력재벌’ 같은 낙인은 사실여부를 떠나 이제 지우기 어려운 것이 됐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재벌 갑질’, ‘폭력재벌’ 같은 여론의 키워드를 떠나 두 가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론에 보도되기 약 두 달 전인 2017년 9월 28일 밤 서울 관철동의 한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나중에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신입변호사로 확인된 피해자들은 경찰조사에서 폭행사실 자체를 인정하면서도 김씨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그리고 폭행죄가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함에 따라 김씨가 형사처벌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한화와 김앤장, 재벌과 로펌 간의 관계를 떠올릴 때 사실 자연스러운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다. 아주 특이한 몇몇 사례를 빼고는 재벌이 여론의 질타를 받을지는 몰라도 법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게 된다.
또 하나 주목거리는 김동선 씨 본인의 인식이다. 언론은 “만취한 김씨가 동석한 변호사들에게 막말을 하고 자신을 부축하는 변호사의 뺨을 때리거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등 폭행을 휘둘렀다”고 보도하면서 “김씨가 자신을 ‘주주님이라 불러라’, ‘허리 꼿꼿이 세우고 앉아라’ ‘존댓말 해라’ 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자연스런 맥락을 드러내는 보도된 이 세 문장 가운데 ‘주주님’은 김씨의 의식을 지배하는 핵심 키워드다. 우월의식과 갑질이 여기에서 나온다. 김씨는 2017년 1월 재벌닷컴이 발표한 청년 주식부자에서 440억 원대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집계되며 ‘100억 원 이상의 상장사 주식을 보유한 30세 이하 청년 주식부자’ 8위를 차지했다. 재벌닷컴의 보도와 김동선 씨의 인식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재벌닷컴이 ‘부자’를 강조한다면, 김씨는 ‘금권(金權)’을 체현했다는 점이다. 

시장경제에서 시장사회로

김동선 씨를 포함한 한국의 재벌집단은 스스로를 부자라고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들에게 군림할 수 있는 특권계급, 즉 자본권력으로 위상을 부여한다. 한국사회에서 자본권력이란 특권적 지위는 인간역사에 흔히 목격된 부의 부수현상이 아니라, 부와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는 본질이다. 이제는 자본과 권력을 따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자본권력으로 통합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본, 권력, 자본권력은 연결돼 있지만 셋 다 개별적으로 따져봐야 하는 주제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이 2017년 11월 출간한 <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내일을 여는 책)는 시종일관 이런 관점을 견지한다. 

부자는 사회적 단어다. 주주는 원래 경제적 단어다. 김동선 씨가 말한 ‘주주님’은 사회적 단어다. 금권은 이런 변증법적 상승, 정확히는 변증법적 악화를 거쳐 탄생한다. 저자 안치용 소장은 금권 또는 자본권력이 시장경제에서 시장사회로 전환하면서 생겼다고 진단한다. 안 소장의 진단을 따라가 보자.

시장은 한마디로 ‘가격’이다. 가격은 시장이 존재를 사유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경제에서 모든 생산은 원하는, 혹은 형성된 가격에 판매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시장경제는 상품화를 요청한다. 상품 없는 시장이나, 시장 없는 상품이나 자본주의에서 둘 다 무의미하다. 이 시장에는 자기조정 기능이란 오래된 신화가 결부돼 있다. 문제는 이 신화가 날조됐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효율성을 보장하는 자기조정 기능의 자유시장(Free market)은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자기조정 시장처럼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지속된 거짓말이 없다.
이제 우리가 익숙한 신자유주의에서는, 경제에서 정치를 분리해 낸다. 정치가 배제된 순수시장. 그것은 자기조정만큼이나 억지다. 구체적 논증은 <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로 넘기고, 정치의 배제는, 시장참여 역량 수준이 높은 참여자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탈정치의 정치’로 귀결된다. ‘탈정치의 정치’가 모색하는 세상은 정치를 시장화하고 시장을 정치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시장경제는 오로지 시장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1) 칼 폴라니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 및 사회의 경제 조직이 보호받지 못하고 시장경제라는 ‘사탄의 맷돌’에 노출된다면, 그렇게 무지막지한 상품허구의 경제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어떤 사회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2) 그 결과는 시장사회이며, 자본권력은 시장사회의 지배계급이 된다. 

한국의 시장사회는 
‘범죄자본주의’를 통해 구축된다

<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의 포괄적 현실 판단은 ‘희망 없음’이다. 우리나라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사실이지만, 그 성장이 비대칭/불균형 성장이고 성장의 과실이 특정 세력에게 돌아간다고 본다. 또한 “한국사회의 속은 썩을 대로 썩었고, 역사는 퇴행에 퇴행을 거듭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절망에 직면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범죄자본주의’와 자본권력이 한국사회를 특징지으며 그 절망을 일으킨다. 금권으로도 표현되는 자본권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통제에서 벗어난 소수의 자본가들, 즉 재벌과 그들을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뒷받침하고 보위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호위그룹으로 이뤄진 촘촘한 지배 네트워크다. 

이 금권 과두집단의 통치와 지배는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모두에 미치며, 그들의 통치와 지배 체계 또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구성돼 있다. 사회 구성원의 탈출 또는 저항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구조라는 데서 암담함을 느끼지만, 더 참혹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이 금권 과두집단을 제어할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수단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은 로마의 라티푼디움과 같은 고대의 계급사회를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고대 로마 시대의 노예들에게 노예제의 전복이 지상명령이었듯, 지금에서는 금권 과두제의 극복이 정언명법이 된다. 그러나 탐욕이 타협하지 않기에 그 극복이 완전한 전복(顚覆)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안 소장의 주장은 논란거리다. 저자가 “지금에서도, 금권 과두집단과 그 하수인들이 우리에게 채운 쇠사슬을 풀어서 돌려주고 우리의 세상을 획득해야 한다는 150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소회는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밝힌 전면적인 전복을 염두에 둔 것이어서, 자본주의가 고도화한 21세기 초반에도 과연 적합한 것일까. 전복 말고 개혁이나 개량의 길은 없을까.

저자가 불가피하게 전복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한국사회를 ‘흔한’ 금권 과두제가 아니라 ‘범죄자본주의’와 그것에서 발호한 자본권력이 지배하는 사회로 판단한 데서 찾아진다. 저자가 한국의 삼성이나 현대, SK, 그리고 (최근 대를 이어 주먹질을 하기는 했지만) 한화 등 재벌을 마피아 취급하는 것은 좀 심한 논의가 아닐까. 그러나 저자는 한술 더 뜬다. 마피아보다 범죄자본주의가 더 나쁘다. 

안치용 소장은 ‘범죄자본’과 ‘범죄자본주의’가 다르다고 지적한다. 공동체의 질서와 이익에 반해 특정 패거리의 이익을 불법적으로 추구해 만들어진 자산이 예컨대 마피아 삼합회 등의 ‘범죄자본’이라면, 이 ‘범죄자본’은 사법적 심판에 따라 언제든지 몰수되고 단죄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취약하고 그렇기에 태생적으로 음성적 성격을 띤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등장한 ‘범죄자본주의’는, 공동체의 질서와 이익에 반해 특정 패거리의 이익을 불법적으로 추구해 만들어졌다는 측면에서 ‘범죄자본’과 동일하지만 사법적 심판을 벗어나 있고 나아가 사법을 포함한 국가와 사회의 권력을 총체적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선 ‘범죄자본’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며, 한 수 위 수준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다. 해악의 범위가 제한적이고 국가권력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언제든 척결할 수 있는 마피아 등의 ‘범죄자본’과 달리 한국의 ‘범죄자본주의’는 해악의 범위가 사회와 국가 전체를 포괄하며 국가권력마저 좌지우지하는 최상위 권력이다. 

한 마디로, 재벌이 마피아보다 더 사악하다!

재벌이 마피아보다 더 사악하다

한국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인 ‘범죄자본주의’는 대한민국이란 근대국가 형성과 맞물려 발호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친일세력과 두 개의 외세에 편승한 기득권 세력이 또 이후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이어지는 독재권력이 민족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장악해 대한민국을 그들의 나라로 건국하는 현대사의 과정에서, 한국의 자본은 국가권력을 장악한 범죄자들과 협력하고 거래하며 조성됐기에 마찬가지로 범죄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기인 해방시기로 돌아가면 친일파가 주축이 돼 건국된 나라에서 친일파는 재산을 몰수당하기는커녕 새롭게 적산을 인수했고, 친일파나 이승만, 미 군정과 관련된 일부 모리배들이 적산을 가져갔다. 한국재벌의 창업자 중 상당수가 해방 시점에 적산의 직원이나 관리자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적산인수를 상황 논리로 정당화하지만 당시의 전체역사 속에서 이들이 최소한 ‘약탈’의 포괄적 공모자임이 부인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재벌의 시원뿐 아니라 이후의 축적과 발전, 그리고 자본권력의 행사과정 전체가 적산불하와 비슷했다는 점이다. 재벌들이 자신들의 창업자를 미화한 것과 달리 그 창업자들 대부분에게선 이른바 기업가정신이란 발견되지 않는다. 오로지 밀수, 뇌물, 불법적 정치자금, 탈세 등 온갖 종류의 범죄로 무장한 ‘종합모리배정신’이 목격될 뿐이다.

이런 ‘모리배정신’은 한국 자본주의 초창기에 잠깐 등장했다가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거의 대부분의 한국 재벌에게서 ‘모리배정신’이 작동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최근의 몇몇 풍경만 떠올려도 금세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살아남아 번성한 한국 자본 중 범죄에 관련되지 않은 자본이 과연 몇 개나 될까. ‘범죄자본주의’에게 범죄는 예외적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기본원리로서 범죄를 개입시키며, 그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침해하고 약탈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면서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피아와 달리 재벌은 뻔뻔하고 가당찮은 특권의식에 절어있다. 

안치용 소장은 “범죄자본주의의 전복은 기존 자본주의 작동체계에서 범죄적 요소를 제거하고 다수의 이익을 신장하는 시장자본주의를 찾아내어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말하는 전복이 “(어떤 시민이든) 소유권을 비롯한 시민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시장기제를 활성화할 것을 기본전제로 한다”고 하니, 처음에 들었던 ‘과격한’ 경로에 대한 우려는 어느 정도는 불식된다. 결론적으로 사적 소유와 시장기능을 전제한 가운데 자본의 운용을 공동체의 이익에 맞게 조정하는 ‘사회적 자본주의’ 혹은 ‘사회화한 자본주의’를 검토하자는 것이 안 소장의 논지다. 시장과 (사적) 소유권을 전제한다면 분명 사회주의와 다르기에 ‘사회적 자본주의’는 상당히 온건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경영에 다양한 이해관계자 참여, 연기금 의결권의 사회화, 소액주주 참여의 조직화, 상속 등에 관한 세제개혁, 시민적 입법을 통한 자본의 전횡방지 등 현존체제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회적 자본주의’의 실현 방안이 결코 적지는 않다”는 온건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 실현 가능성은 솔직히 희박하다”고 곧바로 덧붙인다. 
 
그럼에도 저자는 서둘러 “우리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진 “느린 걸음이 되겠지만 희망 자체보다는 희망의 근거를 찾는 일에서 우리는 희망 부재의 타파를 모색해야 하지 싶다”는 부언까지, 진단이 아닌 희망에 관한 안치용 소장의 오락가락은 그에게 타파의 전망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시사한다. 다행히 “절망을 깊숙이 또한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불량한’ 그의 책이 약간은 선량해질 수 있겠다.  


글·성지훈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 인문학자

(1)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도서출판 길, 1944(2009), 241~242쪽
(2)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242~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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