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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가 야구를 ‘사는’ 법
[이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가 야구를 ‘사는’ 법
  • 이 호(영화해석자)
  • 승인 2017.12.27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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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당신은 패자예요
 
베넷 밀러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야구 영화 <머니볼>(2011)은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빌리 빈Billy Beane(브래드 피트 분)이라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Oakland Athletics 야구팀 단장을 소재로 해, 스포츠 드라마이자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만일 이 영화를 보았다면, 먼저 이 영화에 관한 당신의 성실도와 센스를 체크해 보자. 마지막 시퀀스에서 빌리 빈은 차를 타고 가며 딸이 직접 녹음해 들려주는 「The Show」라는 팝송을 듣는다. 그는 딸의 소박하고 정겨운 그 노래를 들으며, 눈이 충혈될 정도로 북받쳐 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낀다. 카메라는 그의 붉어진 안구 주위를 천천히 오랫동안 보여준다. 그리고 암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그의 후일담이 자막으로 제시된다. 그 동안에도 딸의 노래는 계속된다. 그런데 그 노래의 끝 구절을 주의하여 들었는가? 원곡에는 없는 구절이 다섯 번에 걸쳐 삽입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You are such a loser, Dad”이란 구절이다. 놀라운 승리와 혁신을 이뤄낸 사람에게 “아빠, 당신은 패자에요...”라니? 이 노래의 가사는 이 영화의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리고, 딸이 부르기 때문에 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중했던 야구경기의 시즌이 끝나고 듣는 딸의 노래는 기묘하다. 아빠, 당신은 패자에요…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한 해의 야구시즌이 끝났다. 빌리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야구팀의 제너럴 매니저(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단장’ 혹은 ‘선수 영입 책임자’)로서 그 동안 우수한 선수들을 발굴해 냈지만 그의 팀은 포스트 시즌에만 간간히 진출할 뿐,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는 못한다. 그가 발굴한 선수들(지암비Jason Giambi, 데이먼Johnny Damon, 이스링하우젠Jason  Isringhausen 등)은 이제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된다. 더 높은 금액으로 그들을 사려는 팀들이 있고, 빌리의 팀은 그들을 붙들 수 있는 금액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팀은 저예산 야구단이기 때문에(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연봉순위는 대체로 25위 안팎에 머물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음에도 이런 식의 게임규칙이 작동하는 장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가 없다. 
 
그는 구단주에게 찾아가 더 많은 지원금을 부탁해 보지만 거절당한다. 야구 경기장 안에서는 공정한 게임이 진행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선수를 영입하는 데 있어서는 공정한 게임을 할 수가 없다. 돈이 더 많은 팀이, 더 많은 화폐를 지불할 용의와 능력이 있는 팀이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으니, 더 우수한 선수들을 가진 팀과 그렇지 못한 팀 사이의 경기를 두고 공정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능력이 없으면 그 판에서 나가든지, 그 판에 남고 싶으면 어떤 식으로든 재주를 부려야 한다. 그것이 냉정한 게임의 규칙이 작동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자기 팀의 재정적 상황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발휘하기 위해 선수들을 찾고, 발굴하는 작업을 해온 그는 이제 이런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선수 영입 위원회에서 사람들은 떠든다. 누가 낫고, 누가 전망이 있으며, 누구는 안 된다고. 하지만 빌리는 다른 방식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의 강자, 자본력을 바탕으로 우수한 선수들을 사가는 팀이 있는 한, 이런 방식의 게임에서 자신들의 팀이 승자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는 야구 경기와 야구 경기를 둘러싼 세상의 법칙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데, 그 법칙은 힘의 우열에 의해 승패가 잠정적으로 결정된 그런 세상이다. 그것이 빌리가 처해있는 야구판의 법칙이며,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다.  
 
빌리는 선수 영입을 위해 클리브랜드 인디언스Cleveland Indians 팀에 갔다가, 거기서 피터 브랜드Peter Brand를 만난다. 피터는 자신만의 통계이론을 바탕으로 선수 영입에 관한 색다른 관점을 가진, 예일대 경영학과 출신의 신출내기 선수영입 위원이다. 피터는 빌리에게 다들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돈을 낭비하고 있으며 선수를 살 것이 아니라 승리를 사야 한다고 지적한다. 관점을 바꾸면 영입해야 할 선수들의 명단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관점과 운영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빌리는 피터를 영입하고 그와 함께 통계와 통계분석에 기초한 선수 영입을 시작한다. 그것이 이른바 ‘머니볼Moneyball’ 이론이다. 이름값 대신 데이터를 바탕으로 선수를 선발하며, 타율보다는 ‘출루율+장타율’을, 평균자책보다는 ‘이닝당 출루허용률WHIP’을 통계에 기반해 선발하는 시스템이다. 즉 인지도나 인기가 아니라 데이터를 바탕으로 선수를 평가한다. 경험이나 ‘감’(intuition)에 의존한 판단이 아니라 통계가 보여주는 철저한 ‘사실’(fact)에 기반한 영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힌다. 선수 영입 위원회가 반대하고, 언론이 조롱하고 급기야 감독조차도 빌리의 이론에 기초한 선수들을 경기에 투입하지 않아 그 선수들은 벤치를 지키고만 있다. 빌리가 그 선수들을 기용할 것을 아무리 주문해도 감독은 냉정히 말한다. “선수를 사서 팀을 구성하는 것은 네 몫이지만 그 선수들을 사용하는 것은 내 권한이다.” 그 선수들이 경기에 투입되지 않는다면 빌리의 선수 영입의 방침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감독이 중용하는 선수들을 다른 팀에 팔아 버린다. 이제 감독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빌리가 영입한 선수들을 기용해야만 한다. 그러자 신통하게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놀라운 연승행진을 하기 시작한다. 빌리의 예측이 적중한 것일까?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극적인 연승 행진을 시작하여 끝내 2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다. 영화는 마지막 20연승을 기록하는 캔사스시티 로열스Kansascity Royals와의 야구 경기 장면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1 대 0이라는 스코어에서 다시 11 대 11이 되고, 그리고 위기에서 빌리의 선수 스캇 해티버그Scott Hetteberg가 끝내기 홈런을 날림으로써, 그들 팀은 20연승이라는 아메리칸 리그 신기록의 위업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미국 야구사에 새롭게 쓰여진 기록의 신화가 되었다.
 
빌리는 그 놀라운 기록이 입증하는 경영 방식(머니볼 이론)에 의해 호평을 받고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sox로부터 엄청난 금액(1250만 달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그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며 골리앗에 대응하는 다윗의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았다. 한 경기를 승리하는데 뉴욕 양키스 팀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사용한 것이다. 이른바 ‘저비용 고효율’의 경영학이다. 그러나 그는 이적을 거부하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남는다. 그리고 영화는 빌리의 회한에 북받친 울음을 보여주며 끝난다. 
 
이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빌리가 20연승이라는 기록을 이루어내고서도 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왜 야구장 한 가운데 누워 설움에 북받친 울음을 우는 것일까?” “딸이 녹음해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그가 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왜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하지 않았는가?” 등등. 경기가 끝나고 빌리는 피터에게 자신들은 졌다고 말한다. 실제로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패배했기도 하지만, 이 장면은 20연승 장면 바로 다음에 나오기 때문에 다소 의아스럽다. 그의 딸 또한 그가 패자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장면은 비디오 분석실 카메라에 잡힌, 빌리가 운동장 한 가운데 누워서 오열하는 장면이다. 그는 왜 그토록 찬탄할 승리에도 불구하고 한스럽게 울어야만 했는가? 그래서 이제 독자-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거기에 이 영화의 메시지, 감독이 전하려는 야구와 사회, 그리고 인생의 비밀이 담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시장 밖은 없다
 
빌리 빈, 그는  ‘머니볼’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개발하여 적용하고 그것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야구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미국 야구 역사에 획을 긋는 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자신의 몸값을 놀라울 정도로 불렸다. 그런데도 스스로는 졌다고 말한다. 사실 빌리의 선수영입방식은 사실 통계를 통해 얻어진 결과로 선수를 영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팀이 주목하지 않는 선수를 통계를 통해서 구입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다른 팀들이 사용하지 않는 방식, 다른 팀들이 주목하지 않는 틈새를 통계로 극복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다른 팀들이 모두 통계학을 사용해 선수를 영입한다면 그들의 영입방식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역시 이번에도 돈이 많은 팀이 통계를 바탕으로 도출된 우수한 선수를 사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통계학의 우수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새로운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이 중요해진다. 다른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는데 의존하는 방식, 어떠한 룰이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패러다임인가 하는 물음이 중요하게 된다. 달리 말해 ‘머니볼’이라는 선수평가 방식과 영입 방식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다른 팀과는 다른 선수영입 패턴을 구사했다는 것이 주요한 효과를 낸 것이다. 하나의 시장(이 영화에서는 야구선수 시장) 내에서 다른 상품 구입방식을 채택한 것이 성공한 것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듯, 금융이나 경영이론에 적용될만한 모범사례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얻어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어떤 하나의 계, 매트릭스(matrix)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 매트릭스에서는 특정한 게임의 룰이 통용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거기에 따른다. 우리가 사는 사회 역시 어떤 룰과 매너가 있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그런 방법과 상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빌리는 그 방식을 따라가서는 승자가 될 수 없음을 느끼고 다른 식으로 플레이를 시작한다.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방식을 사용해 ‘성공’한 사례가 아니라, 이 다른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이 ‘판’의 강자들이며, ‘판’의 규칙, 나아가 이 ‘판’ 자체다. 
 
선수 영입 위원회에서 빌리는 질문한다. 문제가 무엇인가? 다들 문제는 떠나버린 선수를 대체할 수 있는 선수를 영입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빌리는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부자 팀과 가난한 팀, 즉 돈을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 시즌이 끝나고 선수를 사고 팔 수 있는 시장에서 공정한 게임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돈이 많은 팀이 우수한 선수를 살 수 있고, 빌리의 팀은 그렇게 결정된 시장법칙의 지배 아래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위해 분투할 뿐이다. 그는 이런 게임의 규칙에 대해 경험적으로 환멸을 갖고 있으며, 그 문제에 맞설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 한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원하는 것이다. 아니 그러한 게임법칙의 균열, 틈새를 찾는 것이다. 
 
미국의 야구시장처럼 (한국도 크게 다를 건 없지만) 냉철한 시장의 법칙을 보여주는 곳도 없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선수들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며, 선수이기 이전에 상품이다. 그들은 야구경기를 하는 상품이고, 승리와 우승을 위해서 그의 역할과 기능이 기대되고 소용되는 도구다. 경영(승리)을 위해서 인간은 통계와 숫자로 환원되고 분석되어야 하며, 그래서 그가 필요하면 대가를 지불하고 사 오며, 필요 없어지면 지체 없이 방출하거나 트레이드한다. 중요한 건 승리이지, 상품 그 자체가 아닌 탓이다. 시장이 곧 세계라면, 세계 안의 모든 것이 상품이다. 이것이 야구, 나아가 우리 사회-삶의 시장원리다. 
 
이 자본주의적 시장 원리와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빌리의 방식이 성공하자, ‘밤비노의 저주’(밤비노Bambino는 베이브 루스의 별명이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1920년 베이브 루스Babe Ruth를 방출한 뒤,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불운을 일컫는 말이다. 보스턴 레드삭스 팀은 빌리 빈의 ‘머니볼 이론’을 차용하여 2004년, 86년 만에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이 저주를 종식시켰다)에 시달려 80년 간의 승리에 굶주린 보스턴 레드삭스는 그를 사려 한다. 빌리는 거절하지만 결코 유쾌할 수가 없다. 그는 젊은 시절, 돈에 의해 인생을 결정해 본적이 있고,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의 우울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진정한 야구, 진정한 승리를 일구는 삶 따위는 계측할 수 없고 살 수 없는 것인데도, 그들은 또 그를 사려한다. 성급하게 메이저 리그의 뉴욕 메츠New York Mets에 입단한 빌리는 이후로 영락(패배)의 세월을 살았고, 그래서 선수나 감독이 아닌 스카우터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모든 것이 상품, 교환가능하며 대체가능한 소모품으로 존재하게 되는 시장-판에서 성공을 거두어봤자, 도리어 자기 몸값을 불리는 것에 불과하고, 누군가에게 더 탐나는 상품이 되어버릴 뿐이다. 빌리 그 자신이 야구라는 스펙터클에 누구보다 충실히 복무한 셈이다. 역시 문제는 ‘판’이며 판의 운영방식이다. 모든 것을 사버릴 수 있는 판,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판의 룰. 그게 문제다. 자본과 시스템 앞에서는 승자와 패자의 기준은 재점검되어야만 한다. 그 시장판에서 자신만의 삶과 인생을 살아냈는가가 성공과 실패의 진정한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빌리는 말한다. “야구란 것이 팬들에겐 그저 즐거움이고, 티켓을 팔고 핫도그를 파는 일이다.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야구는 그저 오락거리이며, 어떤 이는 그들의 승리와 기록에 열광하며 또 누군가는 그들을 산다. 이런 판에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승리했을망정 진정한 승리를 일군 것은 아니었다. 승리란 그 판 자체를 바꾸는 것이고, 판을 빠져나가는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며, 적어도 타인들의 망(사회)에서의 성공과 자기 인생에서의 성공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차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판에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내지 못했다면,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업적을 이루어냈더라도 승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빌리의 선구적인 방식은 다른 팀의 벤치마킹이 되어 판을 도리어 키워줄 뿐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판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그가 야구판을 떠나도 어차피 마찬가지다. 세상은 결국 야구-시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패배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판을 바꾸지도,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게임규칙의 장 안에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한 새로운 규칙을 발견했을 뿐이며, 그 규칙도 곧이어 상용화되고 상품화된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장의 균열을 만들기 혹은 게임의 장 외부로의 탈주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하지만, 이 영화는 자본이나 제도와 시스템을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그 판 안에서 어떻게 진짜 승리를 일구어 내는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 장르인 야구로, 가장 대중적인 삶의 방식을 넘어서기. 여기서 중요한 건 단지 (야구라는) 특수한 분야가 아니다. 아무리 분야와 장르를 바꾼다 해도 다른 곳 역시 동일한 방식의 룰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분야를 바꾸는 것으로는 판 자체를 전복시킬 수도, 판의 외부를 사유할 수도 없다. 아마도 중요한 것은 판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에서 누가, 어떻게 플레이를 하느냐일 것이다. 
 
3.패배하지 않는 기술
 
빌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촉망받는 선수였다. 심지어 그는 야구계의 5복으로 불리우며 “잘 뛰고 잘 막고 잘 던지고 잘 치고 힘 있는”, 즉 공격과 수비, 속도와 파워 면에서 독보적인 선수였다. 그런 그에게 뉴욕 메츠New York Mets의 스카우터들이 찾아와 입단을 권한다.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의 저서 머니볼에 따르면 뉴욕 메츠의 스카우터 로저 용게워드는 빌리를 두고 “선수 중에 우수한 선수가 있고 최상급선수가 있다면 빌리는 최상급 위의 최상급 선수였다. 그는 체격과 스피드, 팔의 힘 모두에서 완벽한 상품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스무살 무렵, 대학 야구팀과 프로 야구팀 사이에서 고민하던 빌리는 뉴욕 메츠를 택했고, 너무 이른 선택이었을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다른 팀으로 방출되다가 끝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선수 스카우터로 전향했다. 한 젊디 젊은 젊은이가 자신의 선택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빌리가 자기 인생을 한탄하고 후회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선수로서 그의 메이저 리그 입성은 실패였다. 그 자신이 선수로서 실패하기 위해 입단한 것은 아닐 것이겠기에 말이다. 
 
만일 빌리가 뉴욕 메츠에 입단하지 않고 스탠포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대학에서 공부도 하면서 더 단련되어 나중에 프로야구 팀으로 들어가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그런 것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들도 이런 상상을 자주 한다. 그때 거기서 이런 선택을 하지 않고 저런 선택을 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금의 삶을 후회할 때 종종 하게 되는 이런 상상은 생각 자체만으로도 흥미롭지만 우리는 두 개의 길을 동시에 갈 수 없다.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할 때가 있는 법이고, 그렇게 선택한 길에서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인생이 소중하고, 삶에서 선택이 중요하다면 바로 이런 불가역성 때문이리라. 빌리도 프로야구와 대학 야구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두 가지 모두를 가질 수는 없는, 두 개의 선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며 그래서 후회가 생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있다면 거기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선택이 없다면 인생도 없다. 
 
다시 묻자. 빌리는 그때 대학야구를 선택했다면 성공한 야구선수가 될 수 있었고,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만일 그가 지금의 인생을 실패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그 때를 그리워한다면, 그때 그 선택의 순간으로 되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지금 여기서 진짜 패배자라는 것의 증거이다. 그런 사람은 아마 되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또 다른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후회란 사실 하나의 정신적 태도이자 습관이며 무엇을 선택하든 인간에겐 후회와 미련이 남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빌리의 선택에 대한 후회가 만일 자신의 인생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면 숙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는 자기 인생이 실패라고 생각해서 그때를 후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제대로 이루어진 선택이냐 하는 것이다. 즉 선택은 이후의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순간에 이미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그런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선택으로써만 실존한다. 그런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요청되고, 또 작동되기 마련이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는 그 선택의 이유, 선택의 기준이 있어야 하고 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결국 선택의 기준이란 다른 사람들(사회)이 제공하는 것이다. 무엇이 더 좋은지 더 옳은지 그런 것들은 모두 사회-타자들의 망이 가르쳐 주고 말해준 것일 뿐이다. 여기서 자신의 본래적 욕망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가상적 대타자”(지젝)라는 사회 속에서, 타인의 욕망의 장 안에서 살고 행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 운명 앞에서 우리는 모두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타인들 속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우리들에게 승자로 보이는 사람들 대다수는 사회적 성공과 명예와 부의 기준에서 그렇게 보여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삶과 인생의 차원에서 성공과 실패의 기준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거기서는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은 평생 실패와 패자로 살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선택으로 실존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죽을 수도 있는 존재다. 
 
빌리는 젊은 시절, 도대체 무엇을 선택한 것인가? 그는 거기서 돈과 명예, 자신의 인생의 성공이라는 신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들의 인정망 속에 위치한 욕망이었고, 그런 성공과 출세였다. 거기에 자기 인생은, 자기 삶은, 자기 실존은 없었다. 인간은 사회망 속으로 모조리 환원되지 않는다. 자기 인생과 실존에 입각해 제대로 선택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선택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는 삶과 선택하는 삶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그런데 빌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피터 브랜드를 영입하고 선수 영입의 시스템을 바꾸며,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는가? 팀의 우승을 위해서, 좋은 성적을 위해서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이 자기의 직업이고 할 일이기 때문이다. 20년 전의 잘못된 선택을 이제 겨우 제너럴 매니저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많은 연봉을 받고 자기 능력을 세상에 증명했으므로 그는 성공한 것인가? 아무리 성공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타인들의 삶 속에서의 성공이지, 그것이 곧 자기 삶에서의 성공은 아니다. 타인이 성공이라고 인정하는 기준을 자기 성공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자기 성공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린 빌리에게 그런 것들이 성공의 기준이 될 수는 없었고, 그래서 기뻐할 수도 없다. 
 
야구뿐만 아니라 승리는 기쁜 것이고, 우린 모두가 이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승리를 영토화하는 어떤 장에서만 가치를 가질 뿐이다. 그 작동의 장이 사라지면 모두 일상으로 돌아간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하나의 가상적 장치 안에서만 누군가 이겼거나 졌다고 여겨졌을 뿐이다. 
 
빌리가 우는 이유는 바로 그토록 승리를 위해서 모든 걸 쏟아부어도 그 장을 벗어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패자인 이유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상징적 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빌리가 패자로 보이질 않는다. 도리어 비싼 연봉제의도 거절하는 등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한 빌리가 성공과 실패의 어떤 영역을 넘어선,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는 성공한 사람처럼 보인다. 남다른 성공을 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자신만의 삶을 살려고 해서 그런지는 독자-관객이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인생에서의 성공은 이처럼 타인의 성공의 기준과는 일정한 차이를 두고 있다. 사회 안에서 성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이미 타자들의 기준을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의 승리는 결국 무엇인가? 이 영화에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빌리와 피터의 선수를 팔고 사고 하는 장면은 중요하다. 그의 승리는 이 통계학을 관철시키기 위한 사람장사를 잘한 데서 얻어진 것이다. 사람을 팔고 살 수 있다는 것, 사람의 능력과 가능성을 팔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돈으로 사람을 팔고, 사람을 사고, 사람들을 퇴출시키고 2군으로 내려 보내서 거머쥔 승리와 승리의 기록. 그것이 그가 이룬 승리의 또 다른 면모다. 그의 문제제기와 그것의 관철에는 철학적이고 의지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철저히 상품논리의 장 안에서 행위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를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딸의 노래처럼 ‘루저’라면, 그는 아마 이 시장 안에서 시장의 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무력한 한 개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겼지만 졌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졌지만 지지는 않았다.” 왜인가? 바로 이 시장의 법칙에 따라 행위하면서도 그 시장이 관여할 수 없는 실존적 삶의 선택과 의미의 창출 때문이다. 이것만은 시장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시장과 돈(자본)은 사람을 팔고 사며, 팔게 하고 사게도 한다. 그러나 그 장 안에서 왜, 무엇을 위해 행위할 것인가의 영역에서는 자본으로 다 포획되지 않는 삶의 흐름이 사건처럼 생성된다. 세계 전체가 시장인 곳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기지는 못할 지라도 지지 않는 기술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야구에 대해 말하면서 스펙터클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스포츠는 거의 대부분 하나의 스펙터클로 화한다. 야구도 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망에서 소비되는 방식으로만 존립한다. 그것은 이미 순수스포츠가 아니라 보고 보여주는 형식 속에서만 의미를 발생시키는 사회적 향유의 한 장르가 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야구가 생존하는 방식이고, 스포츠가 시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며, 우리가 야구를 향유하는 방식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야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장 안에서의 의미부여를 보는 것이다. 야구경기는 아곤Agon(경쟁)과 알레아Alea(우연)을 통해서 팬들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과 시장 안에서 다시 영토화된다. 이제 우리는 시장의 법칙과 자본의 운영이라는 스펙트럼이 아니고서는 야구를 볼 수도 즐길 수도 없다. 야구의 장 자체가 그렇게 조직되고 운영되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야구를 움직이는 힘, 그것은 바로 자본, 시장의 법칙이다. 
 
이제 그 시장 안에서 빌리 그 자신이 상품이 될 차례다.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 팀으로부터 엄청난 연봉을 제의 받았다. 이 영화는 레드 삭스의 구단주 헨리가 등장하면서부터 단지 야구 영화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조건과 삶의 방식을 문제 삼는 영화라는 것이 한층 더 분명해진다. 빌리와 달리 노련하고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표정을 한 헨리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엿보인다. 항상 물건을 사고 팔아야 하는 상인의 피곤함… 그는 빌리가 팀-조직을 운영한 방식을 높이 사며, 그의 사업방식을 칭찬하면서 그를 사고자 한다. 빌리의 가치가 올랐으므로 당연히 더 많은 화폐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빌리는 20년 전에 이미 그렇게 팔렸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바보 같은 짓이다. 어차피 시장 안에서 행위하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그가 스스로 상품이 되길 거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인간은 시장을 벗어날 수 없으며, 시장이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지 인간이 시장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빌리는 저항한다. 시장이 종용할 수 없는 것, 바로 시장 안에서 자신의 선택을 고집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남은 이유는 그 팀이 자신이 오랫동안 몸 담아 온 팀이라는 온정적 휴머니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을 살기 위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 것이리라. 돈(즉 자본의 논리)에 입각해 삶을 결정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순간 이미 그는 시장 안에서 시장을 벗어난다. 이것은 소극적이고 부분적인 저항처럼 보인다. 그래봤자 그는 다음 시즌 또 선수를 팔고 사는 일을 여전히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과 인생과 그의 전존재는 완전히 시장의 부속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지막까지 시장이 포착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불가해한 선택을 할 가능성(저항 가능성)을 남겨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피터가 빌리에게 보여주는 제레미Jeremy Brown의 홈런 장면 영상이 중요하다. 제레미는 체구 탓에 발이 느린 선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홈런을 친 줄도 모르고 넘어져 필사적으로 1루를 터치한다. 홈런을 친 선수가 허둥거리며 기어서 1루를 부여잡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피터는 왜 이 장면을 빌리에게 보여주는 것일까? 놀라운 업적을 이뤄내고도 졌다고 말하며, 보스턴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침울해 있는 빌리를 위로하기 위해서인가? 어쩌면 빌리 그 자신이 팀을 운영한 방식, 그가 세운 기록이 홈런을 쳐놓고도 스스로 모르는 제레미와 같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런 것도 같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건은 그 판의 한계(계산과 규칙의) 너머에서 일어난다는 것, 그 선수는 홈플레이트에서 투수의 공을 받아쳐야 하고, 루들 사이를 달려서 다시 홈으로 돌아와야 하는 야구 경기의 룰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가 친 공은 홈런, 즉 필드의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장을 넘어서는 일, 그것은 철저히 야구 경기 안에서만, 그리고 그 게임의 법칙 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야구를 넘어서는 일은 야구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시장을 넘어서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시장 안에서, 시장의 법칙들을 따라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빌리의 “야구를 보면서 어떻게 로맨틱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의 뜻이기도 할 터이다. 그의 홈런도 또 하나의 기록, 그리고 또 하나의 야구 규칙에 종속될 뿐이지만 그래도 이런 사건(홈런을 치는 일, 야구 안에서 야구를 넘어서는 일)은 여전히 야구를 할 때만, 타석에 들어설 때만 가능하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그렇다. 인간은 인간들의 숲, 사회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시장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 다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야구를 넘어서는 길은 야구장 안에서, 야구 경기를 할 때만, 타석에 들어설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4. 우연과 운명
 
이 영화의 야구 장면은 뛰어나다. 관객들이 심정적으로 동일화한 팀이 아슬아슬하게 승리하는 극적인 장면을 감동적으로 연출해서가 아니다. 야구장 안에서,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계산과 실수, 필연과 우연, 의지와 통제불능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일어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20승을 거두는 마지막 장면에서 1번 타자로 나선 해티버그Hatteberg는 홈런 타자로 영입한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살아서 출루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스카우트한 선수였다. 빌리의 계산이 맞다면 그는 1루 정도로 출루해야 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아주 깨끗한 홈런을 날린다. 그것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것이 바로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통계로도 환원할 수 없는 우연의 발발, 사건의 발생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진짜 중요한 사건들이란 바로 그 통계 너머 어딘가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각본이 없다는 것은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고, 이야기와 역사가 어떻게 될지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구는 통계학적인(예측가능성이 높은) 경기라고 말하지만, 팀플레이가 언제나 그렇듯 우수한 선수를 모아놓았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경기에는 언제나 의외성, 돌발변수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야구는 기록의 경기라고 한다. 그 말은 통계학의 게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통계가 작동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야구 경기에서 만들어지는 사건의 영역, 통계에 기반한 예측을 벗어나는 지점, 마치 우연(불연속성)에 의해 사건들이 발생하고, 그 사소한 원인들의 계열이 인과적으로 예측불가능한 변수들과 결합해 승패와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통계가 전혀 손 쓸 도리가 없다. 통계는 장의 외부를 사유하지 못한다. 통계는 기술과학이다.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팀 조직과 운영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서 통계는 선수들을 분석한다. 그러나 질문하는 방식을 바꾸고, 팀을 새롭게 운영하는 철학에는 관여하지 못하는, 도구적이고 종속적인 방법에 불과하다. 빌리는 통계로 무엇을 했는가? 승리를 얻어냈다. 그러나 통계는 왜 야구 경기를 해야 하고, 왜,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삶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선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통계는 지난 일들의 기록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빌리 빈, 그는 통계에서도 실패했다. 그의 방식은 20연승을 거두어 냈지만 정작 중요한 장면에서는 그의 통계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운이 통했을 뿐이다. 이게 그가 졌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생이란 그 어떤 통계나 계산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우연과 예측하거나 지배할 수도 없는 운이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간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이 불가해하고 비의지적인 삶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은 역사를 분석하고, 자료를 통계화하며, 예측하고 대책을 세운다. 하지만 중요한 장면에서 운명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 버린다. 
 
이 우연(우발성)을 계산하고 예측하지 못하는 한 통계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통계는 언제나 사실만을 누적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어떤 결과들이 일어났는가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을 토대로 예측하는 것은 이미 통계가 아니라 해석이다. (이런 점에서 통계와 역사는 비슷하다.) 통계는 우연을 계산(사고)하지 못한다. 통계가 보여주는 건 언제나 확률이지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니볼’ 이론을 경영에 도입하여 응용함으로써 빌리는 그 판에서도 다른 방식의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승리는 야구판에서 아무도 던지지 않은 질문을 던졌고, 모두가 동의하는 방법을 거부했다는 데 있다.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판의 일반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질문하고 사고하는 방법인데, 이번에도 사람들은 그 방법을 모방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 방법의 우수성이 경험적(통계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빌리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모험을 시도했다면 사람들은 그의 모험이 검증한 결과를 모방하려는 것이다. 그 순간 독창성은 소비되고 사라진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자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팔리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주지하듯 자본에게는 자의식이라는 게 없다. 
 
사람들은 누군가 성공하면 그를 “따라잡기” 좋아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따라잡는다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만의 삶과 자신의 분야에서 생긴 고통과 고뇌로부터 비롯된 문제를 겪으며 자신만의 질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던지고, 자신만의 위험을 감수함으로써만 겨우 얻어낼 수 있는 그런 것이지 빌리를 모방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거기 ‘머니볼’ 경영이론은 있을지언정 ‘너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영혼 없고, 질문 없고, 사유 없는 삶과 경영에 승리가 깃들 수 없다. 그건 이미 자신의 삶이 아니고 자신의 플레이가 아니다. 그건 이미 남들이 성공-승리하려는 이유를 제록스한 것이며, 거기엔 승리도 없고 그 자신의 삶도 증발하고 없다. 
 
영화가 보여준 그의 승리는 독창성과 모험성이 거둔 경제적 가치창출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기 삶을 산 것이다. 자기 삶을 산 것, 그것이 그가 지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그것이 승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판을 바꾸지도, 벗어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리어 판을 더욱 발전시켰고 더 키웠을 뿐이다. 그는 승리하지 못했다. 그는 졌다. 그런데 그는 결코 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이기고도 졌으며, 졌으면서도 지지 않는 것에 대해 보여준다. 통계를 사용해 야구를 승리로 이끌더라도 삶에서 통계를 사용할 수는 없다는 엄연한 진리… 그것이 빌리가 오열하는 이유다. 
 
판을 바꿀 수는 없지만 거기서 자기 삶을 사는 건 힘들게만 겨우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질 수밖에 없지만 지지 않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썩어 문드러진 판에서도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는 말이다. 다만 통계학적으로, 확률적으로 낮을 뿐이다. 결국 가능성이 낮음에도 그것을 시도한다는 것은 일종의 위험(혹은 모험)을 시도할 것이냐 아니면 안전하고 검증된 삶을 추구할 것이냐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 복잡하다. 자기가 선택하고 있다고 믿게끔 자본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사-선택지를 매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자기 삶을 선택하고 있다고 믿고 오늘도 편안히 잠을 청한다.  
 
 
글: 이 호
문학전공자로 문학평론을 전망했으나 전향하여 ‘워너비 해석학자’를 자임하며 세상의 많은 텍스트들을 해석해보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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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영화해석자)
이 호(영화해석자)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