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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한강 얼음 위로 여자가 걸어간다
[안치용의 프롬나드] 한강 얼음 위로 여자가 걸어간다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8.01.29 2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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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하는 차 안의 리어뷰 미러에 비친 석양이 붉다. 원래 붉은 석양이지만 오늘은 같이 붉은 노을 속에 유독 두드러지게 붉어, 미러가 터질 듯하다. 차 안은 훈훈하고, 시트 열선의 온기로 엉덩이도 따뜻하다. 다만 좀 건조한 게 흠이다. 어느 여배우인가 피부노화를 늦추려고 겨울에도 차 안에서 히터를 틀지 않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가 생각난다.

 

기록적인 한파가 등장한 후로 나는 계속 차를 몰고 다닌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되도록 걸어 다니는 습관을 들였지만, 이번 한파가 물러갈 때까지는 예외상황으로 두기로 했다. 덕분에 차 수명으론 나보다 더 늙은 내 차가 고생이다. 옥외가 아닌 지하주차장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아침에 시동을 걸면 힘겹게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애잔하다.

 

아침에 나 역시 힘겹다. 일어나는 것도 일어나는 것이지만 일어나자마자 이 추위를 뚫고 개들과 아침산책을 나가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목도리에 파카, 장갑까지 끼고 억지로 나서는 나와 달리 그들은 계절과 무관하게 언제나 기쁘게 집 밖을 나선다. 그들의 본향이 스코틀랜드 북단에서 북동쪽으로 80Km 떨어진 날씨가 추운 제도(諸島)이기는 하지만, 요즘 서울의 날씨는 그곳보다 춥다. 웬만한 추위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아주 춥거나 정말 귀찮을 때 공원에 가는 대신 나는 내가 사는 공동주택의 옥상을 이용하는데, 최근 개에 관한 규제가 생겨 집 밖을 나설 땐 목줄을 채워야 하기에 아침에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몸으로 그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목줄에 난 작은 구멍이 종종 개털로 덮여 덜 깬 정신으로 찾아내는 게 쉽지 않다. 자연모피로 몸을 휘감은 그들은 그 와중에 한시라도 빨리 나가려고 안달이 났다.

 

아침 출근길, 집에서 나오자마자 대로변에 택시가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사시사철 이곳엔 밤부터 꽤 늦은 아침까지 택시가 문전성시다. 유명한 클럽이 있어 항상 경쾌한 복장의 젊은이들이 인도까지 복작거린다. 길에서까지 흥에 겨워 몸을 흔드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늙은 기사들은 젊은 손님을 기다린다.

 

귀가하는 오른쪽 차창밖엔 한강이다. 거의 얼어버린 한강의 표면이 햇볕을 받아 반짝거린다. 막히는 강변북로에서 나는 저 얼음 위로 새 한 마리가 종종걸음을 놓는 모습을 상상한다. 아침에 본 클럽 앞 어린 여자의 긴 다리가 떠오른다. 10센티가 넘어 보이는 하이힐 위에 얹힌 두 다리는 북극한파 속에서도 짧은 미니스커트의 밑단에 도달할 때까지 도도한 맨살이었다. 얼음 아래로 차가운 강물이 흘렀다. 뒤차가 경적을 울린다. 시선을 돌리니 앞차가 저만치 가 있다. 그래 그 정도면 많이 참아 주었다 싶어 액셀러레이터를 서둘러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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