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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는 이제 공권력의 답을 요구한다
미투는 이제 공권력의 답을 요구한다
  • 목수정 | 재불작가
  • 승인 2018.05.3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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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9일, 서울 대학로에서는 경찰의 몰카촬영 편파수사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당초 1천 명 정도가 모일 것으로 예상되던 집회에는 1만 2천 명의 여성이 모여 4차선 도로를 가득 메웠다. 남성누드모델 사진 유출 사건 1주일 만에 용의자를 구속해 포토라인에 세운 경찰의 태도는, 그동안 의심받던 경찰의 편파성에 물증을 제시한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신속한 수사 그 자체를 나무랄 순 없다. 그러나 여타의 동종 범죄들에서 그들이 보여준 대응과 확연히 달랐던 점이 문제였다. 한국사회에 이미 미세먼지처럼 만연한 몰카범죄. 거기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여성들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갑자기 중대 범죄로 다뤄지며, 거기에 경찰이 상상을 초월하는 기민함으로 대응한 이 모든 정황의 중심엔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이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차별적 수사방식을 규탄하는 청와대 청원에 순식간에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동의가 이어졌고, 이철성 경찰청장은 “수사과정이 성차별적이지 않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전후 맥락을 모두 생략한 채, 기계적으로 수사가 쉬운 상황이었음을 설명하는 데 급급했던 그의 답변은 여성들의 분노에 대한 수사당국의 몰이해를 재확인시켰을 뿐.

이보다 이틀 앞서, 강남역에서는 2016년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추모 집회가 열렸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2년 전의 절규는 불행하게도 여전히 유효한 상황이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대상 범죄는 오히려 10% 이상 늘어났고, 세상은 여성에게 그만큼 더 적대적인 곳이 됐다. 연초에는 여자 친구를 때려죽인 남자가 “우발적 범죄”라는 이유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나는 일도 있었다. 장대비가 몰아치는 가운데, 2천여 명의 여성들은 “우연히 살아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몫을 곱씹으며 함께 걸었다. 

1월 29일 JTBC 뉴스룸을 통해 자신에게 가해진 검찰 내 성추행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가 대한민국 미투운동의 본격적 포문을 연지 약 4개월이 흘렀다. 이후 정계와 문단, 연극계, 영화계, 학계, 종교계로 이어지며 연쇄 폭발해 가공할 위력으로 한국사회를 뒤흔들던 미투운동은 정봉주 전 의원의 성추행을 둘러싼 한 달 동안의 공방을 고비로, 확연히 그 위력이 잦아든 상태다. 정봉주 사건에서는 7년 전 기억을 분 단위로 추적하는 진실공방이 벌어졌고, 여기에 온 사회가 편을 갈라 싸우는, 피곤한 양상이 전개됐다. 

결국, 전투적인 진실게임을 벌인 당사자 정봉주의 카드내역이 결정적 증거를 제공하며 싸움은 그의 패배로 종결됐으나, 이 과정에서 그의 지지자들이 피해자와, 피해자의 고발을 실은 매체, 기자들을 향해 벌인 테러 수준의 사이버 공격은 미투 릴레이를 이어가고자 준비하던 많은 후발 주자들을 얼어붙게 했다. 

이후, 미투는 중고등학교, 대학교, 교회, 직장 등 생활공간 속으로 이어졌고,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에도 군인들에 의한 성폭력이 민간인들에게 자행됐다는 아픈 폭로가 나왔지만, 연일 성역 없이 터지며, 각 분야에서 권력을 점하던 자들을 순식간에 직위해제 시키던 초반의 화력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동일 범죄, 동일 수사, 동일 처벌 

여성들의 분노가 잦아든 것도, 더 이상 대중적 폭로를 통해 매스컴을 장식할 저명한 성범죄자가 고갈된 것도 물론 아니다. 일각에서 제기된 미투 공작설에 힘입어 정봉주 결백을 무작정 주장하던 사람들이 힘껏 피해자와 피해자의 폭로를 보도한 언론을 코너로 몰며 협박을 가하는 동안 여론은 슬슬 분산되기 시작했다. 그 일방적 협박전은 피해자의 판정승으로 끝났지만, 들불처럼 번져가던 미투의 기세를 한풀 꺾는데 그들은 확실히 성공했다. 

이제 어떤 길이 남아있을까? 현시점에서 미투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공권력’의 태도다.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안태근, 강간혐의로 기소된 안희정에 대한 구속영장은 연달아 기각됐다. 검찰은 서 검사의 폭로 이후에도 4개월 동안 제대로 된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법무부 산하조직의 여직원들 가운데 62%가 조직 내 성범죄의 피해자였다는 놀라운 조사결과만 추가됐을 뿐이다. 미투의 들불 이후, 여성들의 분노가 향하는 지점이 가해자 아닌 경찰이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일베 유저들의 염산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1만 2,000명의 여성들이 모인 것은 바로 공권력을 향해 제대로 경고장을 날리기 위함이었다. “동일 범죄, 동일 수사, 동일 처벌”. 법치국가 치안당국이 상식으로 숙지해야 할 이 원칙을 외치며 경찰을 향해 “똑바로 하라”고 경고하기 위해 그들은 모였다. 그리고 경찰 캐릭터인 ‘포돌이’ 형상의 박을 깨뜨리고, 대형 현수막에 그려진 ‘법전’에 물감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지금 필요한 행동은, 가해자를 고발하는 일이 아니라, 정의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멋대로 편향적 잣대를 휘둘러온 치안당국의 멱살을 잡고 경고하는 일이라고 그들은 판단한 것이다. 

이날 등장한 “홍대 몰카 7일, 소라넷 17년”이란 구호는 여성의 공분이 향하는 지점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경찰이 홍대 몰카 용의자를 체포하는 데 걸린 시간은 7일이지만, 몰카 영상물의 성지 소라넷은 17년 100만 명이 넘는 유저들이 들락거리며 호황을 누린 끝에야 폐쇄됐다. 소라넷이 희생양으로 삼은 희생자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으며, 운영자는 여전히 수사망을 피해있는 상태다. 흔히 성범죄는 고발된 것보다 감춰진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통용되는 상식이다. 성범죄가 고발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견딜 만해서가 아니라, 고발해도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으며, 피해자에게 고통만 가중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미투운동은 이 모든 조건들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사회에서 다수의 힘으로, 지렛대를 옮겨보겠다고 나선 사회운동이다. 지난 4월, 서지현 검사는 자신이 고발한 검찰 내의 성범죄 수사가, 능력도 의지도 공정성도 없이 엉망진창으로 진행되고 있는 3무 수사였음을 기자회견을 통해 신랄하게 폭로하면서 자신이 폭로에 나선 배경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저는 한 사람을 망신 주거나, 개인적 한풀이를 위해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으로서 조용히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선택이었음을 알지만 세상 앞에 나선 이유는, 이것이 한 사람의 가해자, 한 사람의 피해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투는 사회적 동기에서 분출될 들불 

한 개인을 향한 복수심 따위가 성폭력 고발의 전면적 동기가 될 수 없음을 소리 높여 밝혀야 알아차린다는 사실을, 서 검사의 증언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고서야 알게 됐다. 다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전혀 겪을 가능성이 없는 성범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입장에 자신을 놓기 힘들고, 따라서 피해자의 폭로가 어떤 심리적 기반에서 이뤄지는지도 판단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검찰이라는 기관이 공정한 수사기관으로서 바로 서기를 희망하고, 성범죄가 피해자들의 폭로로 더 많이 드러나 법에 따라 제대로 다스려지기를, 그리하여 이 사회에 정의가 작동하길 희구하며, 산 같은 용기를 내고 깃발을 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안희정, 이윤택, 김기덕, 고은 등의 인물들이 저지른 만행을 고발한 모든 이들에게도 같은 동기가 작동했음은 분명하다. 가부장제의 코털을 건드리는 일에는 항상 무시무시한 대가가 따르는 법임을 모르는 여성은 아무도 없다. 

안희정의 수행비서 김지은이 안희정의 성폭행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다고만 생각했다면, 비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안 지사의 범죄가 중단될 가능성은 없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사회가 이 표리부동한 정치인에게 더 큰 권력을 건네게 되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김지은의 행동은 이어질 수 있는 모든 불행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자신에게 불어닥칠 모든 후폭풍을 잘 알면서도 그녀는 기꺼이 증언대에 섰던 것이다.

배우 오달수가 자신의 성범죄를 부인하자, 그에게 성폭행을 당한 제2의 피해자가 나서서 그를 저격했고, 거기서 오달수는 더 이상 범행을 부인하지 못하게 됐다. 두 번째 고발자인 연극인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있으며, 이 사실을 폭로하지 않으면, 제자들이 배우가 돼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고통을 반복해서 겪을 수 있기 때문에, 교사의 양심으로 아픈 기억을 세상에 꺼냈다고 심경을 전한 바 있다. 

최영미 시인이 고발한 고은의 추행은 문단이 모두 알고 겪어온 일이다. 목격자였던 남자 문인들은 여성 문인들이 피해자일 때 그들을 전혀 보호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때론 피해자를 공유하는 공범이기도 했다. 안태근의 성추행을 말없이 지켜본 수백 명의 검사들이 그러했듯이. 최영미는 모두가 침묵하는 문단에서 자신이 고은을 지목하면 세상은 고은보다 그녀의 손가락과 손가락의 주인인 그녀 자신의 얼굴을 더 유심히 쳐다보게 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지기로 했다.누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그의 악행은 그의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중단되지 않을 터이므로. 

용기는 전염되고 위대한 정신은 드러나는 법. 이 척박한 성 평등의 불모지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미투운동의 불길에 72%의 한국인이 지지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미투운동이 촛불혁명을 완성하는 사회정의 실현의 한 지류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공권력이 이들의 용기에 답하지 못하고, 남성기득권을 수호해오던 기존의 악습을 답습한다면, 촛불혁명 직후 발화한 이 모든 위대한 노력은 강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며, 우리는 또다시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짓밟히는 전근대의 야만 속에서 지내야 할 터이다.   

왜 아시아에서 유독 한국에서만?

며칠 전, 한 프랑스 언론인이, 내게 한국의 미투운동에 대한 인터뷰를 청해왔다. 아시아 전문 웹매거진(Molty Mag)의 발행인이었다. 자신이 아는 한, 미투 운동이 또렷하게 벌어지고 있는 아시아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것. 도대체 왜? 어떤 남다른 사회적 배경이 이토록 폭발적인 미투 운동이 한국사회에서 전개될 수 있는 동력이었는지?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이유와도 비슷하다. 절대군주와 귀족들이 독점하는 부와 권력, 그들에 의해 착취되는 백성들의 통한이 하늘을 찌르기도 했지만, 만인의 평등과 존엄을 역설한 계몽사상이 프랑스 사회를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의 의식을 바꿔놓지 않았다면, 민중은 혁명을 일으킬 수도, 개혁된 세상을 유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남녀차별의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남성 임금의 60%밖에 되지 않는 여성의 임금. 2.7%에 불과한 500대 기업 여성 임원의 비율. 그리하여 한국의 성평등 지수는 148개 국가 중 118위에 불과하다. 이 같은 익숙한 불평등 속에서 자행되고, 방치됐던 성범죄들을 좀 더 감내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게 된 직접적 계기는 당연히 <촛불혁명>이다. 6개월간 남녀노소, 화이트, 블루칼라가 함께 불의한 정치세력을 몰아내자 나섰고, 하나 된 민중의 힘은 산을 들어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감히 “페미니스트 정부”를 천명하던 정부가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 정권 출발부터, 흔히 볼 수 없는 수준의 천박한 여성 인식을 저서를 통해 피력한 인물이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자리에 임명됐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추동한 미투가 전국에 번져가던 중, 대통령은 기꺼이 “위드유”를 말하며, 공직사회에서 성범죄 무관용 원칙을 내세웠으나, 검찰은 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는 허술한 조사로 일관했다. 공공부문 대상 ‘장내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센터’가 3월부터 100일간 운영되며,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피해자가 두려움 없이 신고할 수 있게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내 ‘온라인 비공개 게시판’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범죄자를 적발만 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처벌이 행해지지 않고, 직장 내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은 오직 피해자일 뿐이라면 이 모든 노력은 헛소동일 뿐이다. 집권 후 처음 치러지는 선거에서 집권 여당은 보란 듯 15개 단체장 후보에 단 한 명의 여성도 공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정부를 천명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그들은 최소한의 면피용 제스처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5.19 대학로 집회에 이런 구호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기회는 남성에게만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남성에게만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남성에게만 정의로울 것입니다. 

혁명이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이 주인인 공화제를 완성했다고 하나, 결국 왕과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지배계급이 바뀌었을 뿐 시민들의 삶은 지배계급에 의한 착취에 기반 한다는 사실엔 변화가 없던 것처럼, 그래서 여성과 노동자들은 각자의 조직으로 연대해 싸우며 제 몫을 획득해 나갔던 것처럼, 함께 촛불 들고 싸워 얻은 새 세상에서도 여성은 꾸준히 배제되고 여성들의 권리는 착실히 유린당한다면, 이런 현실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저 문장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몰카 찍고 몰카 보는 그들의 삶

지난해 10월 영국 일간지 <더 선>은 한국의 몰카문화를 이렇게 평했다. “한국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국가이며 여성인권 지표는 초라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자랑하는 발달한 기술문화는 기술에 빠삭한(Tech-savvy) 일군의 변태들을 낳았다.” 올해 5월 프랑스의 국영방송인 ARTE는 한국의 미투운동을 전하는 방송에서 “한국사회에서 몰카(Molka)는 격투 스포츠(Sport de Combat)”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최근 한국에서 몰카범죄는 연간 21.2%씩 증가하며 반지형, 열쇠고리형, 시계형부터 나사형 소형카메라까지 등장시키는 테크놀로지의 꾸준한 발전과 더불어 눈부시게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런데 묻고 싶다. 도대체 점점 늘어만 가는 이 집요한 몰카 가해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몰카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피해를 본다면, 그런 피해를 주는 자들은 대체 어떤 이득을 얻는가? 이들은 범행을 벌이고 전파하며 과연 한 조각의 이득이나 행복이라도 얻는 것인가? 

화장실이나 탈의실, 계단에서 찍히는 여자의 신체 부위 일부를 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돌려보며 인생의 한 조각을 허비하면서 보낼 만큼 그들의 삶은 무료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영혼은 이런 일에서 즐거움을 느낄 만큼 비틀려 있는 것인가? 진지한 사랑은 고사하고, 그런 식으로 탕진되는 삶 속에 과연 타인에 대한 존중과 진정한 소통 따위가 자리 잡을 수 있는가? 그들에게 이 같은 추잡한 범죄를 저지를 권리가 기업과 수사당국에 의해 관용되는 동안 그들의 삶은 썩어들어 가고 삭제돼 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지하고나 있는가? 이런 삶이 제 살을 파먹으며 지내는 벌레의 시간이지, 인간이란 고등한 생명체가 살아내는 삶이라 부를 수 있는가?

성폭행이 범죄이기 때문에 해선 안 되는 일이기에 앞서, 상호 간에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를 통해선, 충만한 기쁨도, 만족도 느낄 수 없기에 권장되지 않는 것이다. 충분히 안정적인 관계에 있는 커플 사이에서도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그들의 관계는 원만하게 지속될 수 없다. 존중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관계는 정상적인 상호 간의 기쁨을 생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을 값싼 소비재나, 훔쳐보는 관음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자유가 만연한 사회에서, 오직 힘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작동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소통과 영혼이 교류하는 풍요로운 인간관계의 기회를 점차 차단당한다. 
 
과도한 남근 사회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남녀 모두인 것이다. 칼을 휘두르기만 하는 자는 그 칼로 남의 목을 베며 힘을 과시할 수 있겠지만, 결국 자신의 팔로 타인을 뜨겁게 안을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 남는 것은 폐허뿐이요, 소외되고 단절된 인간관계일 뿐이다. 법질서가 공정하게 작동해야 하는 이유는 인류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공존하기 위함이다. 남근주의가 모든 것들을 짓이겨 놓기 전에 공정한 법질서의 집행이 인간을 복원시키는 최소한의 역할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컷의 힘이 과도하게 판치는 사회에선 그들도 피해자다. 어쩌면 암컷보다 더 처참한.  

글·목수정 
동숭아트센터 기획팀장, 국립발레단 기획팀장,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을 지냈다. 현재는 파리에 거주하면서 칼럼리스트, 작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저서로는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야성의 사랑학』,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스테판 에셀 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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