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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서 바라본 푸르른 ‘통일소나무’
북녘에서 바라본 푸르른 ‘통일소나무’
  • 김정희 | 프랑스 거주 교포
  • 승인 2018.06.2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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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교포의 4번째 방북기
▲ 북녘땅에서 바라본 통일소나무

이번 북한 방문은 나로서는 4번째의 ‘북 바로 알기’ 여행이다. 2014년 5월 첫 방북 이후, 방문할 때마다 북한의 변화를 느껴왔지만, 이번 방문에서는 온몸으로 크나큰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만난 4.27 판문점 선언 이후의 방문이어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나와 우리 일행의 발걸음이 경쾌했고, 우리를 맞이한 북한 관계자들의 얼굴도 밝아 보였다. 나는 일행과 함께 베이징의 조선인민공화국 영사과에서 비자를 받으면서, 하루빨리 중국이 아닌 조국 대한민국 서울에서 무비자로 북한에 방문하는 그날을 떠올렸다. 


2018년 5월 19일 이른 아침, 베이징에서 우리는 북한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앞서 민박집에 미리 맡겨놓은 잔디 씨를 찾았다. 원산해변지대 환경조성을 위해 잔디 씨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서 미리 구입해 둔 것이다. 68년간의 미국의 경제제재와 유엔의 제재를 받고 있는 북조선은, 나에게는 같은 유전자와 문화를 가진 우리의 형제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만큼,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 기여하고 싶어 이렇게 작은 선물을 준비한 것이다. 

판문점선언 후, 경쾌한 북한 방문
   
고려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서 출발해 평양의 관문인 순안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기내가 예년과 다르게 중국인들과 서방사람들로 가득했다. 내 옆자리에는 네덜란드의 유모차 기업인 이지워커(EasyWalker) 사장이 부인과 처음 북한에 관광을 간다고 한다. 남한은 자주 방문하는데 북한은 처음이라 궁금한 게 많다고 한다. 

안내원 광혁 동무의 얼굴이 세관 사이로 보였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말을 못하는 내 남편을 위해 영어가 가능한 안내원을 붙여주겠다고 했는데, 그 때문에 작년에 우리 대표단을 안내한 경험이 있는 광혁 동무가 나온 듯하다. 우리는 그와 함께 평양 시내로 들어갔다. 

기내엔 중국인들과 서방인들로 가득  
 
퇴근 시간인 듯, 길거리에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바쁜 걸음으로 북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어, 무의식적으로 GPS가 장착된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안내원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4·27 판문점선언에 따라 평양시간이 남쪽 서울시간과 같다고 기분 좋게 설명을 한다. 남학생들 몇몇이 분수대 옆의 높은 돌들을 걸러 타며 뛰는 모습들을 보면서, 남편과 나는 “아이들은 어디나 마찬가지네!”하며 피식 웃었다. 평양 시내의 중앙이자, 대동강 강변에 위치한, 매번 내가 숙박을 했던 평양호텔이 재일조선인 학생들의 수학여행으로 가득 차서, 인근의 해방산 호텔로 숙소를 바꿔 예약해놓았다고 안내원은 설명한다. 

우리는 짐을 풀고 항상 평양에 도착하면 가는 아리랑식당을 갔다. 우리의 여행일정을 안내원이 설명해줬다. 나는 이번 일정에 남편이 첫 방북이라 빼곡한 방문목록을 만들어 한 달 전에 제출했었다. 이번에 방문을 신청한 세포등판과 금강산을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오려면 일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의 기념비적인 장소를 방문하고, 마지막 날엔 개성과 4·27 판문점선언 후 첫 번째 재외동포로서 판문각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사실 나는 세포등판 방문을 신청하면서도 세포등판이 뭔지 잘 몰랐다. “북에 가면 세포등판을 꼭 방문해보라”는 서울의 산림전문가 유재심박사의 말씀에 따라 무조건 방문신청을 한 것이다. 

우리는 평양을 떠나 개성으로 가는 길에 놓인 통일의 거리를 지나,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는 3대 헌장기념탑을 통과했다. 아름다운 두 여성이 들고 서 있는 한반도 그림의 원형판에 새겨진 3대 헌장은 자주·통일·민족대단결을 뜻한다. 자동차가 원산방향으로 가면서 평양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신평관광휴게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높은 절벽과 그 주변의 산세를 마주하면 감탄이 절로 난다. 

우리는 커피 한 잔을 한 후 계속 달렸다. 11시경 원산에 도착하면서 원산이 부산하게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트럭도 많아지고 차들이 예전보다 많아 보였다. 일요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가 신청한 세포등판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원산사업처장과 동행을 하는 것이 좋다고 광혁 안내원이 전날 저녁에 일정설명 도중에 한 말을 언뜻 떠올렸다. 원산사업처장은 그동안 우리가 그동안 미국의 ‘사이좋게’ 대표단과 방문했을 때 항상 만나온 사람이었다. 세포등판을 향하는 도로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트럭을 보면서 원산사업처장은 지금 갈마관광특구에 국제적 수준의 호텔 11채와 4~5층짜리 콘도미니엄 40동이 들어서는 공사로 매일 5천 대의 트럭들이 건설자재를 실어 나르느라 부산하다고 설명했다. 호텔 공사의 일부 완공은 이번 북한 정권수립기념일인 9월 9일까지 끝낼 예정이며, 전체 갈마관광지구의 완공은 2019년 4월 15일까지 예정돼 있어 바쁘게 작업 중이라고 그는 설명을 이었다.  

북이 말하는 만리마 속도로 갈마관광지구를 조성하는 것 같다. 내가 기증한 잔디 씨도 여기에 뿌려지려나? 이어 우리 일행은 원산에서 고산군까지 40km 이상, 또 고산에서 세포까지 70km 이상의 비포장 시골 산길을 달리면서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안내원은 세포등판이 이렇게 먼 곳인지 몰랐다며 다음번에 세포등판 신청은 받지 않겠다고 투덜(?)거렸지만, 그의 웃는 얼굴에서 그게 진담이 아닌 농담으로 느껴졌다.

개간에 성공한 세포등판 축산기지 

세포군 초입에 도착하니, 세포등판축산기지 경리위원회 부위원장이 우리를 안내했다. 부위원장은 키가 작았지만,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 탓인지 다부진 인상을 풍겼다. 그는 우리 일행의 선두에서 차를 몰면서 안내했다. 원산사업처장은 세포등판 방문을 위해 담당기관을 교섭했는데, 하필 일요일이라 부서들끼리 서로 떠미는 통에 아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일요일은 다들 쉬는 까닭에 이렇게 안내를 받아 세포등판을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세포등판은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를 자주적으로 이르는 용어-편집자주)에도 일본이 개간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썼지만 실패했고, 해방 이후에도 몇 차례 개간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이곳은 바람과 비와 눈이 많아 세포라고 불리는데, 뿌리가 50cm가 넘는 잡초들만 엉켜있어 사람도, 동물도 살기 힘든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2012년부터 이곳을 개간하기 시작해, 2017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잡초들 하나하나 뿌리를 뽑고, 메마른 땅에는 질소비료를 뿌려서 옥토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안내원도 2012년에 3개월간 이곳에 동원됐다고 말했다. 남편과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초원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세포등판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 축산기지였다. 세포등판축산기지는 강원도 원산에서 북철원 방향으로 난 세포군과 평강군, 이천군 등 3개 군을 합친 고지대를 개간한 곳이다. 북한 연구진은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의 축산연구소를 시찰한 뒤에 이곳에 북한실정에 맞게 집짐승 방목에 따른 동물병 예방, 방역과 사료풀 및 축산에 필요한 분야를 망라하는 연구소들을 세웠다고 한다.  

세포지구 축산기지는 약 600m의 높고 낮은 구릉이 연속인 고산 초원지대다. 방목하는 한 무리의 양 떼 옆을 지나, 한 축산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은 빨간 기와를 얹은 살림집들과 배구 농구장, 양 축사, 경리위원회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성산리 문화회관 앞 주차장에는 북에서 90% 이상의 부품을 자체 생산한 트랙터 몇 대와 트럭들이 주차돼 있었다. 모든 시설물들이 100% 완비돼 있고, 현재 방목하는 가축인 소, 염소, 양들이 10만 두이고 앞으로 50만 두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생산된 육류는 2017년 기준 5천 톤인데, 향후 목표는 1만 톤이라고 한다. 

차를 타고 또 한 구릉을 지나 언덕 쪽으로 올라가니 기상관측하는 기구들과 풍력발전기 태양전지판들이 보이면서 새로 지은 또 하나의 3~4층짜리 빨간 기와를 얹은 건물이 나타났다. 그 건물은 종합생산지령실로, 1층의 여러 관리실 중 하나에 세포등판의 모형과 자료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진열돼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니 종합생산지령실에는 대형스크린으로 ‘황금등판’이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었다. 자연에너지관리, 동물관리, 축사운영상태, 생육관리와화상회의 등을 할 수 있으며, 축산과 대학교수들과 일꾼들이 함께 만든 순수한 북한의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옆에서 보던 남편이 프로그램을 보더니, 브라우저는 크롬을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남편은 꼼꼼하게 북의 상황을 관찰했다. 부위원장은 “세포등판 준공 이후 처음으로 방문한 재외동포”라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까운 기색이었다. 세포등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관망대가 있기는 하지만 왕복 및 관람에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면서, 안내원이 가던 길을 재촉한다. 남편은 부위원장과 헤어지면서 인사를 할 때 프랑스어로 “이렇게 훌륭한 축산기지를 만든 것을 축하합니다”라고 했다. 그의 인사를 내가 통역하니, 부위원장은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원산으로 가는 길에, 고산군의 3천정보(1정보=3천 평)가 되는 사과농장이 바다처럼 펼쳐졌다. 가을이 되면 고산군의 전 인민이 동원돼 사과 수확을 하는데, 이곳에는 사과가 널려있어서 이곳 인민들은 사과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안내원이 말한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사과를 한 개씩 먹으면 의사를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을 인민들에게 꼭 해주시라고 부탁했다. 운전기사의 화끈한 운전 덕분에 일찌감치 원산에 도착해, 바닷가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즐길 수 있었다. 이어 우리는 트럭으로 북적거리는 원산과 빠른 공사를 응원하는 포스터들로 덮인 갈마관광지구를 지나, 감으로 유명하다는 안면읍을 거쳐 시중호와 통천을 통해 금강산으로 향했다. 저녁이 되자, 군사분계선 지구인 금강산의 고성항에 위치한 통나무 펜션에 묵게 됐다. 이곳은 과거 금강산관광이 활성화됐던 시기에 세워진 해금강호텔과 마주하고 있었다.  

판문점 선언이후 평양시간, 남한시간에 맞춰 

전날 저녁에 황금색의 노을빛을 보면서 들어온 금강산 입구에서는 아침이 되자 햇살 속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고성항의 물결은 호수처럼 큰 움직임이 없었다. 만물상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과 삼일포, 해금강을 방문할 것이라며 안내원이 무척 서둘렀다. 알고 보니 판문점 선언 이후 5월부터는 평양시각이 30분이 앞당겨져 있었다. 그런데 GPS로 맞춰진 내 손목시계 시간이 맞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일정에 30분씩 지각을 했던 것이다. 안내원은 우리가 피곤해서 늦게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시계가 맞춰진 GPS는 북조선이 남한시간에 맞춘 것을 아직도 무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바탕 웃고서, 경계가 삼엄한 군사분계선의 최전방지대인 내금강 안으로 들어가는 복잡한 수속을 마치고 만물상 등산로로 향했다. 

작년에는 구룡폭포와 상팔담을 올라갔는데, 이번에 오른 만물상등산로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귀면암을 보면서 전망대까지만 올라가는데도 산세가 깊고 높았다. 가까이, 또는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돌 봉우리를 따라 금방 깊은 산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안내원은 오늘 일정이 너무 빡빡해 천선대까지는 못 가지만, 산길이 계속 이런 식이니까 다음에는 여유로운 일정으로 오자고 한다. 내금강산 산행을 맛만 본 듯해 아쉽기 짝이 없지만, 한 점의 풍경화 같은 삼일포와 해금강을 보기 위해 발길을 서둘렀다. 삼일포로 들어가는 길은 갈대밭이 이어지고 적송들이 무성했다. 삼일포 위에 떠 있는 와우섬과 사각정엔 많은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삼일포의 물은 구룡폭포에서 내려오는 물과 바닷물이 결합해서 생겼는데 이제는 완전히 내륙호수로서 담수로만 돼 있고 주변은 옥토로 변해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삼일포에서 뱃놀이를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우리 아이들과 함께 와서 즐겁게 놀아보리라. 

군사분계선 안에서는 논매기하기에 바쁜 농촌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도로 양옆으로 이어지고, 회색이라기보다는 흰색에 가까운 돌산들이 울뚝불뚝 올라와 있는 것이 희한한 풍경이었다. 입담이 좋은 금강산의 여강사는 김삿갓의 온갖 종류의 시를 줄줄 외면서 금강산과 김삿갓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해금강에 이르러서는 두 대의 관광버스에서 내린 함흥지구의 관광객들이 향로봉 주변에서 소리치고 사진 찍으며 돌산을 올라가는 등 남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관광객의 모습들을 보여줬다. 남편은 남쪽이나 북쪽이나 한국 사람들은 다 똑같은 행동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일란성 쌍둥이’인 까닭에 70여 년을 헤어져 살았어도 5천 년의 오랜 전통과 관습을 그리 쉽게 바꾸지 못한다. 이런 동질성에 프랑스인인 남편은 놀라움을 표했다.

우리는 다시 통천 시중호 원산을 거쳐 마식령 스키장을 잠깐 들려보고, 평양으로 향했다. 저녁노을이 진 평양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대동강변의 아침 조깅은 빼놓을 수 없는 일정 중에 하나다. 대동강변길은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조깅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 춤추듯 아침체조를 하는 여성들, 아이들과 함께 운동하는 부모들, 책을 큰소리로 외우는 듯한 학생들…, 각양각색의 평양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평양호텔 앞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강변로를 택해서 조깅을 시작했다. ‘과학중시 인재중시’라고 쓰여 있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의 고층건물을 바라보며, 우리는 3~4년 정도 된 버드나무 묘목들이 단정하게 서 있는 강변로를 달렸다. 왼쪽으로 대동강물이 아침햇살로 반짝거리며 유유히 흘렀다. 이날 오전에는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으로 가서, 6·25 전쟁의 참상과 각종 살상무기를 보았다. 북에서는 조국해방전쟁에 승리했다고 하지만, 유엔기를 앞세운 미군의 공습에 의해 북의 도시가 상당 부분 파괴되고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결국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희생자들만 남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류관에서 평양식 쟁반냉면과 녹두부침개로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는 세계에서 유명한 교예(서커스)를 보러 만경대 구역에 있는 평양교예극장으로 갔다. 고공에 몸을 던져서 날아가는 사람의 손을 잡는 교예는 손에 땀이 나게 하고 숨을 멈추게 하는 고난도의 기술로, 유럽 모나코의 세계서커스경연대회에서 몇 차례나 상을 받은 기술이다. 사람이 날아가는 속도와 상대방이 그 사람의 손목을 잡아내는 힘과 속도가 절묘하게 맞아야 하니 이런 기술은 오직 북조선사람이나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예극장 관람객들은 절반 이상이 청소년들이었다. 앞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비슷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평양호텔에서 대동강변을 들어서 왼쪽으로 산책하기로 했다. 이 길가에는 대동문이, 대동문에서 더 가면 옥류관의 뒤쪽이 보인다. 특히 주체탑을 정면으로 볼 수 있고 김일성 광장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는 곳이다. 어제 조깅을 해서 오늘은 산책을 하기로 했다. 2년 전에는 대동문까지만 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대동교를 지나 옥류약수 상점을 지나 옥류관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옥류약수는 광천수로 건강에 좋아 평양인민들이 아침에 약수를 받기 위해 줄을 선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대동문 근처에 정차된 많은 관광버스들에 수학여행을 떠나는 초중등학생들이 오르고, 부모들이 배웅하느라 북적거렸다. 학생들이 농촌으로 학습활동을 떠나는 것 같았다. 북한의 모든 학생들은 1년에 3주에서 한 달 반 정도까지 농사짓는 힘든 일을 경험하게 하는 목적으로 학습여행을 떠나는데, 이번에는 1~2주 동안 농촌의 농번기에 가서 집단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농번기 집단학습 떠나는 학생들 
 
오늘은 평양시내 관광지를 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항일혁명열사릉. 과학신도시 려명거리와 김일성대학캠퍼스, 금수산태양궁전을 지나 대성산 주작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항일혁명열사릉은 항일투쟁기에 혁혁한 투쟁을 한 젊은 전사들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전사들의 사망 당시 평균연령은 25세라고 한다. 항일열사들의 흉상을 보면서, 우리 민족에게 진정한 독립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생각했다. 

▲ 항일혁명열사릉 인근의 평양동물원에 단체로 소풍온 유치원생들
 
항일혁명열사릉을 내려오니, 곧바로 오른쪽에 동물원이 나왔다. 동물원 앞에는 유치원생 아이들이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관광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동물원엔 학교에서 단체로 방문학습 혹은 소풍을 왔는지, 많은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웃고 떠들며 간식을 먹는 모습에 나도 흥겨웠다. 그다음 행선지는 개선문이다. 북한에서는 평양의 개선문이 파리의 개선문보다 10m가 높다고 자랑한다. 개선문의 지붕 위 테라스로 올라가서 아래를 보니 동쪽에는 평양에서 제일 먼저 건설됐다는, 김일성 경기장이 모란봉 뒤로 보였다. 북쪽의 큰 광장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가지런한 줄을 세워 체조하는 모습이 보였다.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9.9절 행사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한다. 평양과 지방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3개월 이상을 준비하는 것을 보니 완벽한 군무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지난번까지는 <아리랑>이 공연됐었는데 이번에는 <빛나는 조국>이라는 제목으로 경기장에서 공연이 열릴 예정인데, 놀랄 만한 공연이라고 강조한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대동강변 오른쪽으로 조깅을 시작했다.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에 직장인처럼 보이는 남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큰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발밑에 자전거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자전거 충돌사고가 난 듯했다. 결국 투덜거리며 가던 길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오전에는 평양 근처에 있는 류원신발공장을 방문했다. 1973년부터 운영된 이 신발공장은 운동화와 아동화를 만드는 곳으로 미국교포가 지원해준 생산라인을 철거하고 북한자체 기술로 만든 기계들이 있다고 한다. 특히 이 공장에서 사용하는 전기는 지붕 위에 빼곡하게 설치된 태양광전지판으로 생산하는 전기를 이용한다고 한다. 

다음 행선지는 지하철이었다. 1973년 9월부터 운영이 시작돼 지금은 2개의 노선으로 약 150m 깊이의 지하라고 한다. 지하철역들에 있는 천정의 모양이나 조명의 특색이 각각 다르고, 역마다 벽에는 작은 타일로 된 모자이크 대형벽화가 눈에 띄었다. 영광역에 설치된 평양의 4계절 모자이크는 미적인 측면으로만 봐도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다음 목적지는 조선미술박물관으로, 고구려시대 고분속의 벽화를 그대로 본뜬 그림들을 보았다. 고분속의 왕과 여왕의 초상화와, 사냥과 행차를 하는 모습으로 고구려 시대의 정치, 경제, 군대, 사회, 문화와 전통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박물관을 나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방문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약 5천 명에 이르는 7~16세 학생들이 무료로 특별활동을 하는 곳이다. 이번에는 박수림이라는, 성악을 하는 14세 학생이 소년궁전을 안내했다. 소년궁전은 발레, 가야금, 손풍금, 붓글씨 회화, 컴퓨터, 과학, 운동 등 각각 원하는 특별활동을 선택할 수 있고,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의 경우 교사들이 추천하면 집중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다음날, 개성과 판문점으로 서둘러 출발을 했다. 개성으로 가는 고속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평양평야의 밭과 논에는 농부들이 모내기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작은 구릉의 산들도 지난해보다 나무가 늘어서 붉은 흙만 가득했던 부분이 많이 줄었고, 묘목들이 즐비했다. 산사태를 막고 황폐해졌던 산림지대를 복원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꾸준한 산림 복구사업의 성과 가시화 

북의 산림청 사업처장은 북에서 산림복구사업이 2012년부터 시작돼 이미 첫 번째 5년 차 계획에서 목표가 달성되고, 이제 2차 계획으로 넘어가 2022년까지 황금산 만들기가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계속 열심히 묘목을 심으면 5년 후에는 많은 산지가 회복할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유엔경제제재로 인해 묘목을 재배할 수 있는 온실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함경남도 리원군 같은 외지는 지원의 손길이 멀고, 특히 지원단체들이 방문해 현지 확인을 하고 싶어 해도 도로사정이 나빠, 접근이 어렵다고 한다. 우리는 평양~개성고속도로로 개성에 진입하고 곧 군사분계선 입구에 도착했다. 군사분계선 전초 입구에 관광버스들이 서 있었고, 중국관광객들로 입구안내소가 북적였다. 최근에 부쩍 중국관광객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가끔 서양의 외국인 관광객들도 보였다. 안내원이 군사분계선 안쪽으로 들어갈 때면 군인 안내원이 나온다. 이번에 우리를 안내한 군관중위는 판문점지역을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군사분계선 안으로 들어서니 길 양쪽에 논농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는 곧 정전담판회의장을 방문했다. 

1951년 6월 30일 유엔사령부의 제의에 의해 시작된 정전담판을 개성지구에서 할 수 있도록, 북에서 급하게 설치한 건물이 아직도 역사의 증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정전협정조인장이 있다. 지금은 안쪽이 휑한 빈 장소이지만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날에는 북조선 남한 중국 미국 및 유엔 군인들이 빼곡히 앉아 역사적인 휴전협정의 조인을 지켜봤다. 곧바로 판문각으로 이동한 우리의 눈에 자유의 집이 보였다. 군관중위는 4월 27일 판문점선언을 하면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심은 통일나무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판문점과 남측 건물 사이의 관상용 향나무들 가운데 얼핏 보이는 푸르스름한 소나무를 가리키며 사진을 찍어가라고 했다. 우리는 통일소나무 사진을 찍었다. 촬영을 하는 우리보다 그 모습을 보는 안내원이 우리보다 더 즐거워하는 듯했다.

우리는 이렇게 판문각 방문을 마치고 개성 시내로 들어갔다. 개성은 한국전쟁 중 폭격을 비교적 적게 받은 덕택에, 천년의 역사를 아직도 보존하고 있어, 12개의 역사유적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이다. 개성 시내의 한옥촌에 자리한 개성 전통여관은 일본강점기 이전부터 문을 연 곳으로, 지금도 숙박시설과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개성여관식당에서 가야금 연주와 더불어 구첩반상으로 점심을 하고, 다음 일정인 선죽교, 표충비와 숭양서원을 방문했다. 선죽교에는 아직도 붉은 자국(?)이 남아 있고, 조선왕조들이 정몽주의 충절을 찬양해 세운 비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내원은 조선왕조는 자신들의 정권에 유리한 대로 백성들을 복종시키고 지배하기 위해, 위선으로 가득한 비들을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북한의 활력 

이번 여행에서 강렬하게 느낀 것은 북이 급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성에서도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고, 평양에는 전기자전거가 다니고 있다. 아직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로 발전이 더딘 감이 있지만 북조선식으로 발전하는 모습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이 짧은 기행문을 쓰고 있는 오늘, 싱가포르 북미회담을 마치고 미국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이 북에 도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전쟁게임을 중단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북은 변화에 속도를 더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내년에도 이어질 ‘북 바로 알기 여행’이 기대된다.  


글·김정희 
파리 경영학교(ISG) 졸업,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와 외환은행 등에서 근무했다. 최근 시민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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