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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기본소득’의 꿈
오래된 미래, ‘기본소득’의 꿈
  • 곽노완
  • 승인 2010.08.06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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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ée 특집] 소득보장제도의 새 패러다임

▲ <아침>, 2009 - 이강혁
노동 유무와 무관하게 유아부터 노령자까지 모든 사회 성원에게 무조건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사실 어제오늘 제기된 주장이나 제도가 아니다.

기본소득의 주장은,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의 지도자인 토머스 페인의 <농업의 정의>(1796)에서 발견된다. 그는 국가 기금을 조성해 남녀를 불문하고 21살이 되는 국민에게 15파운드를 지급하며, 나아가 50살이 넘은 모든 국민에게는 매년 10파운드를 지급할 것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토지사유제로 인해 상실된 자연법적 권리에 대한 보상이며, 선조에게 물려받은 재산에 대한 모두의 동등한 권리다. 당시 아동 및 청소년, 그리고 여성의 정치적 무권리 상태를 감안할 때, 이는 파격적 주장이었다.

토머스 페인에서 프리드먼까지

토머스 페인의 주장은 1797년 토머스 스펜스의 <아동의 권리>를 거쳐, 19세기에는 샤를 푸리에와 조세프 샤를리에,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에게서 더욱 구체화된다. 마르크스의 ‘필요에 따른 분배’도 이를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서 버트런드 러셀은 노동과 무관한 사회소득이 모두에게 지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클리퍼드 H. 더글러스는 1924년 사회신용제도를 통해 모든 가족에게 국가 배당금을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틴버겐과 제임스 미드는 기본소득을 적극 주장했고, 제임스 토빈과 밀턴 프리드먼도 기본소득과 유사한 최소보장소득 내지 마이너스 소득세를 제안했다. 토빈은 처음에는 마이너스 소득세와 같은 최소보장소득을 주장했고, 신자유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를 수용해 구체화했다. 그러나 이후, 토빈은 사회복지국가를 급격히 단순화하며 마침내 절멸시키려는 미미한 최소보장소득과 마이너스 소득세의 구상에 반대해 ‘데모그랜트’(Demogrant)라고 부르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옹호했다.

한때 1930년 이후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더글러스의 영향을 받은 사회신용당이 집권해 ‘국가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소득과 유사한 정책을 실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다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1977년에는 네덜란드의 급진당이 기본소득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어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덴마크,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더불어 1986년 판 파레이스를 포함한 샤를 푸리에 서클의 주도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2004년부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로 개칭됨)가 탄생하면서, 기본소득은 국제적으로 새로운 담론과 정책의 지평을 열었다. 이후 2009년에는 독일 총선에서 약 10%의  지역구 의원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당선되었고, 몽골의 대선에서도 최대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제시한 후보가 당선되었다. 현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한국을 포함해 미국,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등 비유럽 국가로까지 확장되었다.

미국의 알래스카주에서는 석유 배당금 형태로 기본소득이 실시되며, 나미비아의 오미타라 지역에서는 2008년부터 기본소득이 실험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2010년 들어서는 브라질의 산토 안토니오 도 핀할 지방에서 기본소득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브라질은 이미 2004년 전국적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실행 시기는 차후에 결정될 예정이다. 몽골 신정부는 2014년부터 기본소득을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

한국에서는 2007년 대선 당시 사회당의 금민 후보가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제시했으나, 본격적인 담론과 운동은 2009년 초 ‘기본소득네트워크’가 출범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한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는 2010년 초에는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해 진보학계와 다양한 사회운동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이끌어냈으며, 7월에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 참가해 17번째 가맹 단체로 인준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 서울 은평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진보 단일 후보로 출마한 사회당의 금민 후보는 다시 한번 기본소득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기본소득이 무상급식과 더불어 한국에서 언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아직 알 수 없다.

캐나다에서 몽골, 알래스카까지

기본소득은 오래된 미래지만, 앞으로는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브라질에서 그리고 독일과 몽골에서 갑자기 기본소득이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 것처럼, 그리고 한국의 무상급식이 순식간에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면서 대대적인 성공의 전망을 만들어낸 것처럼, 기본소득의 미래는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빠른 속도로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와 진보뿐만 아니라, 케인스주의자나 심지어 자유주의자 중에도 기본 소득 내지 이와 유사한 제도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 그만큼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자본주의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며 지속 가능한 대안경제 체제를 새롭게 기획하고 실현할 수 있다면, 기본소득은 그 사회에서 더 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누구도 현재 자본주의에서 가처분 국내총샌산(GDP)의 60~70%를 차지하는 비노동소득(투기·불로소득)에 대한 독점권을 갖지 못하며, 대신 노동소득 이외의 모든 소득에 대해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 안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

물론 여기에 앞서 기본소득의 정당성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리는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인류를 지배해온 오래된 이데올로기다. 보수와 가진 자들은 자신은 노동하지 않거나 노동한 이상으로 향유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꼴은 못 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왔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거대한 투기·불로소득을 향유하며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해왔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강조되는 이데올로기며 현실이기도 하다. 실업급여나 연금 같은 사회복지도 노동할 의지 내지 과거의 노동과 연계되어 있으며, ‘무노동·무임금’도 최근 한국의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담대한, 그리고 정당한 제도

통계로 확인된 것만 해도 한국의 가처분 GDP 중 40% 수준은 불로소득(이자, 배당, 임대료)이다. 그리고 GDP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이자·임대료소득 과 부동산·증권양도차익 등 투기소득을 감안하면 가처분 GDP의 70% 내외는 투기·불로소득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소득은 사실상 가처분 GDP의 30% 안팎에 불과하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인구의 5%도 안 되는 극소수 자본가와 부자에게 최대한의 투기·불로소득을 보장하는 체제인 셈이다. 곧 ‘무노동·무임금’을 근본 원리로 한다는 현대 자본주의는 ‘무노동의 투기·불로소득을 극대화’하는 체제다. 어쨌든 ‘무노동·무임금’이라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원리에 따를 때조차, 기본소득은 현재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더 정당하다.  

그렇다고 전통적 진보가 주장하는 ‘노동에 따른 소득’을 미래 사회의 근본 원리로 하기에는 문제가 따른다. 가처분 GDP 중 임금노동 소득 및 노동계급의 권리 극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지향하는 전통적 진보의 원칙은, 임금노동자가 전체 인구의 30~40%밖에 되지 않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정치적으로 거의 실현 불가능한 기획이다. 자본가를 제외한 55~65%의 비임금노동자(자영업자, 실업자,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노령인구, 가정주부, 노숙자)가 그런 원칙을 소극적으로라도 지지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21세기 진보는 정규직과 프레카리아트(Precariat·소득이 없거나 불안정한 사람들)(1) 모두가 상생하는 새로운 원칙과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프레카리아트는 비정규직과 가난한 비임금노동자 모두를 포함한 새로운 개념어이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을 통해 더 많은 소득과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럴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과 조상, 그리고 자신의 연합 지성과 후세대 양성을 통해 만들어진 전 사회적인 부와 소득에 대해 정규직이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평등한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더 많은 소득과 더 많은 자유를

이런 새로운 원칙에 따르면, 미래 사회의 가처분소득은 ‘노동소득의 상승 + 지속 가능한 기본소득의 극대화 + 투기·불로소득의 극소화’ 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다. 따라서 노동소득의 증가와  추가로 지급받는 기본소득으로 인해 노동자의 총소득은 급증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불안정한 소득으로 고통받는 과반수 인구에게도 어느 체제보다 많은 현금 및 현물 소득을 보장한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소수에게 독점되었던 투기·불로소득은 급격히 또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노동소득과 모두가 향유하는 기본소득이 증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은 정규직 노동자와 프레카리아트의 연대 가능성을 크게 증진시킬 것이다. 

기본소득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최대한 지속 가능한 기본소득 수준이 경제적으로 최대한 지속 가능한 수준을 밑돌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기본소득이 실현된 직후의 삶은 지금의 고통을 천천히 완화하는 수준에 머물 수 있다. 물론 무상급식처럼 낮은 수준의 부분 기본소득이라도 예상보다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가난한 학생들이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친환경 무상급식으로 농촌의 소득이 안정되고, 학생들은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충분한 기본소득조차, 충분한 기본소득을 열망하는 능력과 더 많은 평등에 대한 열망을 배가할 것이다.

무상급식은 부분적 기본소득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한 기본소득이 점차적인 기본소득보다 오히려 더 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것은 세계사적 정황과 각 사회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어쨌든 충분한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우리 삶은 지금과는 판이해질 것이다. 양성의 경제적 평등이 앞당겨지고, 가난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병원비나 생활비가 부족해 치료를 못 받는 사람도 없어지고,  장애인은 적어지고 경제적·육체적 고통에서 획기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노인은 손자뿐 아니라 자식과 이웃에게도 맛있는 식사 한번 대접하는 인심을 쓸 수 있다. 대학생은 먹고살기 위해 공부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공부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는 좀더 원하는 노동을 하며, 더욱 짧은 시간만 노동할 것이다. 예체능 인구와 사회운동가들이 폭증할 것이다. 노숙자와 거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들이 싸우는 일도 줄어들며, 자살률도 급감할 것이다. 사회는 활기차고 다채로워지며,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자유로운 연합을 만들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 이후의 이런 삶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기본소득은 그만큼 우리의 미래 사회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그 간결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변혁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이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글•곽노완 
한국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이며, 2006년 이후 기본소득에 관한 논문을 10편 발표하는 등 한국의 기본소득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각주>
(1)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프레카리(precari)와 ‘노동자 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이다. 시간강사처럼 고학력자인 경우 등을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통틀어 프레카리아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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