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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연재] 대중서사와 로맨스(1)- 로맨스, 취향에 맞춘 커밍아웃
[특집연재] 대중서사와 로맨스(1)- 로맨스, 취향에 맞춘 커밍아웃
  • 류수연 | 인하대 교수
  • 승인 2018.11.29 14: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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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옛적에…>, 1987 - 빅터 스티벨버그

왜 로맨스를 읽는가?

 
‘사랑’이라는 단어가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결은 상당히 다채롭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낭만적 사랑’일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가장 ‘사적(私的)’인 모든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따라서 다른 어떤 감정보다 특별하게 여겨진다. 인간의 삶이 근원적으로 고독한 것이라면, 사랑은 그 고독을 떨쳐낼 수 있는 ‘충만’을 선사하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로맨스’는 바로 이런 낭만적 사랑을 주제로 다루는 서사장르를 지칭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지칭하는 로맨스는 더 이상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아니, 낭만적일 수가 없다. 연애조차 ‘스펙’이 돼버렸다는 시대에, 호감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마음을 열기엔 각자의 일상이 녹록지 않다. 마음을 주고받은 만큼 감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역시 막연한 두려움의 요인이다. 취업난과 고스펙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에게 연애는 그야말로 사치가 돼버린 것이다. 따라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감정이나 조건을 가늠하며 상처받지 않을 만큼 여지를 두고 만나는 관계, 연애가 내준 로맨스의 달콤함을 차지해버린 것은 바로 ‘썸’이다. 
 
이게 로맨스, 그래 로맨스!
 
그런데 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점이다. 낭만적 사랑을 벗어내자, 수많은 장르가 로맨스라는 카테고리 안으로 침투했다. 로맨스를 생산하는 주류적 매체인 웹 플랫폼 내에서조차 각각의 웹툰이나 웹소설에 어떤 장르적 성격을 부여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오간다. 심지어 로맨스라면 마땅히 등장해야 할 두 주인공의 연애관계조차 모호한 경우도 많다. 드라마나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음을 내줄 듯 말 듯 경계에 걸쳐있는 관계들이 범람한다. 과거 로맨스 서사의 주된 스토리가 연애에서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했다면, 오늘의 로맨스는 썸에서 연애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한다. 즉, 최종적으로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기 전까지의 단계가 주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단계에서 로맨스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사의 핵심적 사건을 둘러싼 갈등과 해결이 연인으로 규정된, 혹은 예정된 두 사람의 공동과제로 수행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 해결은 반드시 두 사람의 사랑과 신뢰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돼야 한다. 이런 요소가 충족될 때, 어떤 장르적 속성이 부여됐느냐에 상관없이 로맨스라고 지칭하고 독자 역시 거기에 충분한 동의를 표한다. 이 때문에 로맨스는 하나의 장르이기도 하지만, 모든 장르에 적용할 수 있는 수식어이기도 하다. 학원로맨스, 오피스로맨스처럼 연애관계가 성립하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는 규정뿐만 아니라, 미스터리로맨스, 로맨스판타지, 로맨스사극처럼 다른 장르의 성격과 긴밀하게 연관된 로맨스 서사도 이제 익숙한 명칭이 돼버렸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웹 플랫폼이다. 
웹 플랫폼에서 성공을 거둔 로맨스 콘텐츠가 그대로 TV나 영화로 재탄생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구르미 그린 달빛>(KBS)이나 <김비서가 왜 그럴까>(tvN),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JTBC) 등은 모두 웹 기반 로맨스 서사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다. 무엇보다 이들 작품은 로맨스와 다른 장르가 긴밀하게 결합한 혼종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장르의 확장성이 로맨스 서사를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도록 혼란스럽고, 그래서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연애 말고 ‘썸’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최근 등장하는 로맨스 서사의 중요한 테마는 다름 아닌 ‘썸’이다. 스킨십조차 두 사람의 관계를 확정하는 요소가 아니다. 손을 잡고, 키스를 나누고, 심지어 몸을 나눈 사이라 해도 여전히 서로를 연인으로 확정하지 못한다. 연애라는 관계에 쉽게 진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로맨스 서사의 변화에는 보다 많은 사회적 맥락들이 걸쳐져 있다. 과거 로맨스가 보여준 사랑의 성취는 어떤 방식으로든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연인의 만남과 사랑의 최종 목적지는 직접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결혼이라는 일정한 지향점을 지녔다. 두 사람의 사랑이 잠정적으로 결혼에 이를 것이라는 가능성을 표방해야만 해피엔드의 세계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연애 안에서 대등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가 결혼이라는 관문을 거치면 자연스럽게 가부장적 위계질서 속에서 재편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앤서니 기든스가 말한 것처럼 ‘여성적 삶을 가정이라는 공간에 밀어 넣고 한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낭만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결혼이 로맨스의 완성이자 곧 종말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더 이상 결혼이 필수가 아닌 시대, 아니 그 자체로 사치가 돼버린 시대. 더 이상 결혼은 매혹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재생산’에 대한 가치가 한 사람의 생을 좌우하는 덕목으로 작동하지 않는 지금, 연애에서 결혼에 이르는 일련의 시스템 자체가 이제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방식의 관계와 거기에 따른 사유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로맨스 서사가 연애도 결혼도 아닌 ‘썸’에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취향의 커밍아웃, 그리고 과제들
 
오랜 시간 동안, 가장 여성적인 서사라 일컬어졌던 로맨스 안에서조차 여성들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자발적인 ‘노라’이기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오늘의 여성들은 이제 연애 아닌 커리어를, 아니 커리어와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연애와 로맨스를 바란다. 낭만적 사랑과 연애를 다룬다고 믿어졌던 로맨스 서사의 내용도 변화됐다. 보다 도전적인 목소리들이 담겨졌다. 따라서 그것은 더 이상 ‘남녀’ 사이에만 국한된 감정적 교류가 아니다. 애정의 문제만으로 점철된 세계는 더욱 아니다.
웹 플랫폼의 확장과 함께, 로맨스 서사는 OSMU(one source multi use)가 가장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장르로 명실상부한 대중서사 영역의 패자(霸者)가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은 구체적인 분석 텍스트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나마 영상매체로 만들어진 경우에는 논의의 대상으로 종종 언급되지만, 문자텍스트로 만들어진 로맨스 서사는 그저 ‘킬링타임용 읽을거리’라는 인식 속에서 외면됐다. 오롯한 제 몫의 비평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다. 추리소설이나 SF소설과 같은 다른 장르서사들이 학술적인 담론 장까지 그 영역을 넓힌 것을 고려한다면 뜻밖에 적막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로맨스 서사에 필요한 것은 그것이 오롯한 취향으로 수용되고, 더 나아가 그 가치와 가능성을 인정받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과 여성적 취향에 대한 뿌리 깊은 소외를 극복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따라서 로맨스 서사는 변화된 젠더의식 위에서 고려되고 비판돼야 한다. 또한 웹 플랫폼에서 제공되는 과금형 상품으로서 지닌 상업적 가치와, 문학텍스트로서 갖춰야 할 작품성이라는 자칫 모순되는 두 속성에 대한 균형감각 역시 요구된다.
현재 대중서사학회의 로맨스연구팀에는 로맨스 서사를 학술연구의 장에 세우고 그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도출하겠다는 공동의 과제 하에 여러 매체를 기반으로 하는 연구자들이 모였다. 그 시도가 로맨스 서사에 대한 새롭고도 건설적인 논쟁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글·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평론가. 대중서사학회의 연구이사 겸 로맨스연구팀의 팀장.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박태원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2013년 계간 <창작과 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네이버 연애·결혼판 <연애학개론>의 필진이며(현재는 휴재 중), <시사인천>에 시사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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