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하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HOME 지구촌/한반도 한반도/동아시아
‘철도 민영화’의 역주행 혹은 탈선
  • 박흥수
  • 승인 2012.02.13 17:57

Corée

해 질 녘이었다. 정차역이 가까워져 엔진 출력을 줄이며 브레이크 레버에 손을 올렸다. 열차가 막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건널목에 승용차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브레이크 레버를 비상정지 위치로 당겼다. 계기판의 제동 압력을 알리는 지침이 급격하게 움직이고 열차는 레일과의 마찰로 커다란 쇳소리를 내며 선로 위를 미끄러졌다. 열차가 건널목 위의 승용차에 가까워지는 시간 동안 심장박동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꽝 소리와 함께 차량의 보닛이 하늘로 치솟는 걸 보았고, 열차는 한참을 더 지나가 섰다. 역에 사고 사실을 알리는 무전을 보내고 운전석에서 내려 자갈밭을 뛰었다. 갑자기 정차한 열차가 이상했는지 승객들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열차가 지나온 100여m를 거슬러 올라가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사람이 다치지 않았기를. 오만 가지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철도 사고의 특성상 사람이 열차에 치일 경우 어떻게 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 <비둘기호>, 1998-이진홍

철도 사고는 무시무시하다

사고가 난 건널목에는 처참하게 부서진 차량이 선로 옆으로 밀려나 있었고, 주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사고 현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만다행히도 운전자는 차를 버리고 몸을 피해 인명 피해는 없었다. 사고 현장을 관계자들에게 인계하고 다시 열차를 운전하면서 종착역에 닿을 때까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몇 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해야 했다. 그때서야 사고를 겪은 내 동료들이 체감해야 했던 고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입사 동기 중 한 친구는 사고 이후 정신적 상처에 괴로워하다 결국 사표를 내기도 했다.

선로에 누군가 들어올 경우 회피할 수 없는 철도 사고의 특성상 사고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목격할 수밖에 없는 기관사들은 어떤 정신적 치유도 받지 못하고 다시 승무를 해야 한다. 몇 년 전에야 파업까지 각오한 노동조합의 요구로 사고를 겪을 경우 3일 휴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월드컵 4강으로 ‘국격’을 한창 드높이던 시절에도 한국철도의 기관사들은 제대로 된 휴일을 보장받지 못했고, 단체협상의 요구사항으로 주 1회 휴일 보장을 내걸었다. 시민들은 어떤 직장이 한 달에 단 하루도 제대로 된 휴일을 보장하지 않느냐며 의아해했다.

이때 지금은 국토해양부로 이름을 바꾼 건설교통부에서는 부실 방만 기업인 철도에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천억 원의 적자를 양산하는 철도청이 인건비 비중만 높고 비효율적이라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게 건교부의 입장이었다. 한국 노동자 평균노동시간의 1.5배를 넘는 장시간 노동으로 지쳐 있는 철도 노동자들에게 ‘부실한 비도덕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철도 노동자들은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한 술 더 떠 보수언론은 왜곡 보도로 건교부의 주장을 지원했다. 철도 노동자의 안전과 충분한 휴식이 철도 안전의 가장 중요한 밑바탕임에도 효율화 논란 속에 묻혀버렸다. 그런데 이런 일이 10여 년 만에 똑같은 내용과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나랏돈 14조 들여 재벌에 운영권?

2012년 새해가 열리자마자 국토부는 또다시 칼을 빼들었다. 경기도 수서~평택 간에 건설되는 신설 노선을 빌미로 KTX를 민영화해서 경쟁체제를 도입해 철도산업을 효율화하겠다는 것이다. 국가가 14조 원을 투입해 만든 기반시설을 민간 재벌에 넘겨 고속철도 운영사업을 시키겠다는 것으로, 부실 방만한 한국철도공사에 운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국토부는 ‘단순 노동 매표원이 6천만 원 가까운 고액 연봉을 받는’ 철도공사 정규직의 비효율을 소리 높여서 말했다. 국토부는 민영화가 되면 고속버스 매표원 수준인 연봉 2천만 원대로 효율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철도공사가 그동안의 구조조정으로 신규 인력이 충원되지 않아 평균근속연수가 19년이나 되고 매표 직원 상당수가 계약직으로 채워져 실제 고액(?) 연봉을 받는 직원이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은 무시됐다.

철도공사는 국토부의 지적에 화답하듯, 상반기 내에 매표 창구에서 정규직원을 모두 정리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국토부 관료는 마치 국정 성과처럼 연봉 2천만 원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세금과 4대 보험을 제하면 월150만 원. 이 정도의 일자리만 만들어줘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2012년 4인 가족 최저생계비가 149만4900원이다. 4인 가족이 150만 원 정도로 생활한다는 게 현실에서 어떤 의미인지 관료들은 관심 없을 것이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 정책 당국자의 입장이다.

게다가 이런 2천만 원짜리 연봉을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 민영회사는 근속연수 증가에 따른 임금 인상과 퇴직금 누적을 막기 위해 1년 단위로 사람을 바꾸게 된다. 민영회사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외주 방식으로 인력 운영을 계획하고 있다. 인천공항세관이 지난해 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문자로 대량해고 통지를 날린 일을 일상화하겠다는 의도다.

거대 장치산업인 철도산업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인력 집약적 성격을 갖고 있다. 열차 승무, 차량 정비, 시설 유지·보수, 역 관리 등 분야별로 많은 노동자가 역할을 분담해 철도를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민영화와 효율화의 망령은 이 노동자들을 현장에서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의 일자리들이 외주 위탁과 하청의 재하청을 거치면서 사라지고 있다. 정부가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라고 말하는 일자리 창출이란, 좋은 일자리를 없애 나쁜 일자리로 재탄생시키는 걸 일컫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시민들이다. 지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전에 노동조합과 일부 시민사회단체들은 2인 승무가 일반화돼 있던 지하철에 1인 승무 시스템을 도입한 대구지하철공사에 시민의 안전을 위해 2인 승무 제도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하철 적자를 줄여야 한다고 나선 대구지하철공사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지하철공사의 효율화가 세금 낭비를 줄인다며 1인 승무제를 문제 삼지 않았다. 아직도 많은 철도 전문가들은 화재사건 당시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메트로)처럼 기관사와 차장 2명의 승무원이 앞뒤로 탑승해 있었다면 인명을 훨씬 많이 구할 수 있었으리라고 지적한다. 사고를 접한 기관사가 관제실과의 정보 교환, 현장 상황 파악, 승객 대피에 관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참사를 겪고도 교훈을 얻기는커녕 1인 승무제를 점점 확산시키고 있다.

왜 역에서 직원을 볼 수 없게 됐나

서울 지하철 노선의 왕십리역은 도시철도공사와 서울메트로, 철도공사가 운영하는 노선이 겹치는 환승역이다. 가장 깊은 지하를 달리는 도시철도공사 5호선의 승강장에서 지상의 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중앙선 승강장까지의 환승 거리는 꽤 길다. 출퇴근 시간이면 승객 수백 명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이동한다. 승객들은 무심코 지나지만 자세히 보면 이동 중에 어디에서도 도시철도공사나 서울메트로, 철도공사의 직원은 볼 수 없다. 다른 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아르바이트하는 할아버지들이 지하철공사에서 제공한 조끼를 입고 안내를 맡긴 하지만 가까운 일본의 지하철에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일본의 지하철은 승강장에서 열차를 감시하고 승객을 안내하는 정규직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환승통로나 매표구 주변에서도 순회하거나 지정된 곳에서 근무하는 직원을 볼 수 있다.

지하 공간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현장에서 사태를 책임지고 판단해 수습할 수 있는 운영회사의 정규직원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다. 두 나라에서 똑같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직원이 없거나 아르바이트 할아버지가 있는 공간과, 비상시 매뉴얼에 대한 상시적 훈련으로 단련되고 전문적으로 역할 분담된 다수의 정규직원이 통제하는 공간에서 승객들의 안전도가 어떻게 다를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철도산업의 재정 적자를 줄이려는 노력은 일본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도쿄의 지하철운영사 중 하나인 도쿄메트로의 경우 건설 부문에서 다른 철도노선과 비교해 비용 부담이 높은 부문은 모두 삭감했지만, 유일하게 예외를 둔 분야가 있다. 바로 안전 부문이다. 안전과 관련된 비용은 삭감 없이, 필요한 모든 부분에 예산을 투입한다.

이윤과 안전은 대립되는 요소다. 이윤을 높이면서 안전도를 높이는 방법은 없다. 자동차를 살 때에도 에어백이나 브레이크 잠김 방지 장치 같은 것을 장착하려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미래에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에 대한 대비책인 것이다. 안전을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가 요구되고, 안전에 투자되는 비용이 높을수록 이례적 상황에서 시민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윤 프렌들리’의 기치를 높이는 정부 당국과 철도 관련 사업체의 경영진은 오늘의 이익을 위해 내일의 비극은 시민과 현장의 노동자들이 감수하라는 태도다.

이윤과 안전, 동시에 높일 수 없어

정부가 발표하는 민영화를 통한 효율화의 내용은 역 시설과 차량 정비 기지, 심지어 차량까지 리스로 조달해 운영회사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것이다. 민영화로 KTX 운영사업자가 되는 기업은 사실상 렌터카로 사업을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수익이 나고 있는 알짜배기 노선에 시설유지 인력도 차량정비 인력도 필요 없고, 역무원들조차 위탁업체 인력으로 대체하면서 얻는 효율이 공기업의 부실과 방만을 대체한 민간기업의 경영기법인가?

KTX 민영화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효과가 있다. 수익은 재벌에 의해 사유화되고, 손실은 이 사회가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탐욕의 폭발로 우리 사회는 곳곳이 무너지고 있다. 골목상권의 순대와 떡볶이조차 재벌 2·3세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대상이 되었고, 서민들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기업이 더 든든하게 사회적 안전망 구실을 하고 그 과실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게 해야 함에도 정부가 나서서 사회적 자산을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시민이 주인인 공공부문마저 1%에 속한 재벌에 축복의 선물로 주지 못해 안달 난 정부는 누구의 정부인가?

역이 사라지면 사람·지역도 사라져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이윤과 효율의 논리에 밀려 끊임없이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몇 해 전 서울 용산의 철거 현장에서 불길 속에 터져나왔던 “여기 사람 있다!”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만약 정부의 의도대로 재벌에 KTX가 넘어가면 호화로운 최고급 고속철도가 받는 찬사의 크기만큼 산간벽지의 철도 노선은 더 급격하게 사라질 것이다. 지방 중소도시의 철도 노선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적자만 양산하는 비효율적인 역과 노선들은 구조조정 대상이기 때문이다.

역이 사라지면 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발길을 끊게 될 것이다. 역이 사라진 마을과 주변 지역은 더 빨리 쇠락할 것이다. 사람들이 또 사라져갈 것이다. 멸종되는 것은 동물만이 아니다. 우리가 비효율이라고 낙인찍어버린 것들이 하나둘 죽어갈 때마다 사람들도 결국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선진화와 발전이란 게 사람들이 사라진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재벌과 정치권력이 하나가 되어 추진하는 ‘KTX 민영화’라는 탐욕의 질주를 이 사회가 막아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 땅은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글 / 박흥수  
운수노동정책연구소 철도정책연구원. 철도노조 정책연구팀장, 한국철도공사 서울기관차 승무사업소 기관사.

저작권자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흥수
박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