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에서 아픔을 공유한 친구로

[독자 에세이]  7월호 ‘저주받은 레드셔츠, 그래도 ‘사람’을 외친다’를 읽고

2010-11-05     박슬기/회사원

여행을 하며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를 경험하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커지게 된다. 내게는 타이가 그런 곳이다. 몇 번을 오가면서 아름다운 자연환경, 맛있는 음식, 전통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친절한 사람들에게 매료됐다. 그들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상냥함에 매번 고향을 방문할 때처럼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따스함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 내게 지난 3월부터 장장 9주에 걸쳐 일어난 ‘레드셔츠’(탁신 전 총리 지지 세력)의 반정부 시위는 충격적이었다. 국내총생산(GDP)의 20% 가까이를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나라로서, 그토록 오랜 시간 시위를 하면 국가경제에 위협이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민주주의와 의회 해산, 그리고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벌인 레드셔츠의 시위에 웨차치와 아피싯 총리의 타이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참혹한 유혈 진압을 자행했으며, 민간인 90명 이상이 죽고 2천여 명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정부는 집회 금지, 웹사이트 폐쇄, 언론 통제 및 검열 등 그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

‘조용한 미소의 나라’ 타이에서 그들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을까? 고향처럼 잘 안다고 여겼던 타이에 나만 모르는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월호를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과격한 시위대쯤으로 치부한 그들은 사실 지방에서 조직된 ‘풀뿌리 민주주의’로 탄생했으며, 탁신 전 총리가 2001년에 집권하면서 일으킨 변화로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빈민층이었다.

탁신은 하층민을 위한 정책(무상의료, 무담보 대출, 마을당 100만 밧 지원 등)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처음으로 그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감사하게 되었다. 이들이 탁신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레드셔츠, 즉 인구가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북부 ‘이산’ 지방의 주민들이다. 그러나 탁신이 싱가포르에 국영 통신기업을 팔고 엄청난 차익을 챙기면서 반(反)탁신 물결이 일어나게 되었다. 타이를 지배하는 왕족과 특권계층, 경찰 및 군부는 탁신의 인기가 왕보다 높아지는 것을 염려해 왕권모독죄로 그를 고발했고, 마침내 총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지난 9월에 찾은 카오산 여행자 거리는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자유로이 산책하던 골목은 매우 비좁고 물건을 파는 사람들로 붐벼 제대로 걸어다니기도 힘들었다. 더 이상 ‘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라는 자유로운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에 자본주의가 뿌리 깊이 정착해버린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타이 친구는 레드셔츠 시위 이후 이곳으로 더 많은 타이인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삶이 팍팍해진 그들은 이곳에서 뭐라도 더 팔아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밤이 되어 친구를 통해 우연히 레드셔츠에 가담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민주주의다. 당신들은 이미 가지고 있지 않나? 우리는 여전히 정부에 억압받고 자유로운 의사표현도 못하고, 미디어는 거짓말만 전한다.”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내 머리를 땡 하고 울렸다. 민주주의…, 재작년 여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수없이 외쳤던 촛불시위. 민주주의의 토대가 얼마나 약하고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분명히 목도했다. 정부의 사찰과 미디어 통제, 일반인에 대한 근거 없는 영장 남발, ‘미네르바’와 <PD수첩> 제작진 체포 등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과정을 떠올리며, 그렇게 따지면 정부가 총을 들지 않은 점을 제외하곤 우리나라가 타이에 비해 크게 나은 점도 없지 않은가.

내가 타이인의 고통을 몰랐듯이, 그들도 우리 고통을 몰랐다. 한류 덕분인지 그들에게 한국은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잘사는 멋지고 쿨한 나라로 비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빠른 성장 덕분에 개발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팽배해 자살률 1위, 출산율 최저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나라라고 설명하니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면 진실을 알지 못한다. 온화하고 행복하게만 보였던 나라, 거지가 있을지언정 처참한 빈민층은 없어 보였던 나라인데, 그것은 관광객의 눈으로 바라본 수박 겉 핥기 식의 감상이었다. 우리에 대한 그들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를 진지하게 알아가다 보면 닮은 점도 발견하게 된다. ‘옐로셔츠’(반탁신 세력)가 2008년 공항을 폭력으로 점거했을 때에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는데, 레드셔츠는 테러리스트로 몰려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모두 감옥에 갇혔다. 평화로운 촛불시위를 할 때는 촛불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 입건하고, 가스통을 들고 와 행패를 부리는 이들에게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 두 나라의 지배권력은 모두 이중 잣대를 들이댔다. 처벌 대상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지배권력에 대한 태도였다.

그들의 시위와 사는 얘기를 들으니 뿌리 깊은 정경유착을 겪은(혹은 겪고 있는) 우리나라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이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피 흘린 아픔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 나는 그들의 시위를 진심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레드셔츠는 단지 아피싯의 사퇴와 의회의 해산 요구에 머물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국익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타이에서는 내년에 열릴 총선을 앞두고 부채 탕감 등 각종 포퓰리즘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탁신 전 총리는 더 이상 정계에 복귀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망명 생활 중이며, 타이 민주주의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타이 민중의 움직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타이의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을까? 아직 요원해 보이지만, 좀더 많은 세계인이 그들의 일에 관심을 갖고 귀기울이고 알린다면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성장한다’는 명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흘려야 하는 피의 양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여행을 좋아한다. 그리고 다른 어느 곳보다 타이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제 여행자로서 여행 태도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단지 여행지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그곳에 사는 이들의 삶과, 그들과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할 것이다. 나는 다시 타이에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