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들의 말뿐인 진보주의 거부해야

2013-11-08     슬라보예 지젝

▶ 지난 10월호에 이어 '지젝, 자본주의의 위선을 말하다'

모든 특정 그룹들이 미움의 대상인 독재자에 맞서 결집할 때, 저항의 열광적인 정점 단계에서 가상의 결집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결집, 상상 속 이데올로기적 환상에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모든 급진적 반란은 의미상 공산주의적 차원, 즉 정치라는 좁은 영역을 넘어 경제, 사생활, 문화 등에 이르는 결속 및 평등주의, 정의라는 꿈을 포함한다. 요약하자면, 사회 체계 전반으로 퍼지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여전히 지평선(horizon), 유일한 지평선이고, 이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오늘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판단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가늠하는 일종의 내재된 척도인 것이다.

혁명을 원하는 자는 누구인가
 
여기에서 제대로 변증법적 반전의 움직임이 작용하고 있다. 저항 초기에는 민중 전체를 아우르는 결집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이미 결집은 분리(여전히 독재자의 편에 있는 이들과 민중 간의 분리)와 동시에 일어난다. 독재자가 축출될 때만이 진정한 작업이 시작되는데, 급진적 사회 변화가 그것이다. 독재자가 몰락한 이후의 기간에 모든 사람들이 형식적으로는 혁명에 찬성하지만, ‘혁명 없는 혁명(로베스피에르)’을 원하는 이들은 “혁명이 끝났으며 일단 독재자가 물러나면 삶은 다시 정상 복귀될 수 있다”(오늘날 이집트 군대가 옹호하는 바이기도 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한다. 모든 이가 혁명에 찬성하는 시점에서, 진정으로 혁명을 원하는 자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자들을 엄격히 구분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헨리 루이스 테일러는 마틴 루터 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 심지어 어린 아이까지도 마틴 루터 킹을 알고 있으며 그의 가장 유명한 순간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문장 이상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루터 킹이 꿈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1963년 워싱턴 행진 당시 ‘우리나라의 도덕적 지도자’로 소개되었던 킹은 그를 환호했던 군중들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빈곤문제와 사회구조문제를 다뤘는데 그 이유는 ‘평등이 단순한 인종적 형제애가 아니라 실재하는 것, 사실상의 평등’이 되도록 하는 데에 이런 문제들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디우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킹은 인종분리 주제를 뛰어넘어 ‘평등의 공리(axiom of equality)’를 따랐고, 그런 작업을 추구하기 위한 준비를 갖췄기 때문에 그는 진정한 해방투사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혁명은 반복되어야 한다. 첫 열광적 결집이 해체된 이후에만 진정한 보편성, 더 이상 상상 속 환상으로는 지탱되지 않는 보편성이 형성된다. 민중의 열렬한 결집이 무너지고 나서야만 실제 작업, 즉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의 모든 결과를 떠안는 힘든 작업이 시작된다. 독재자를 축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독재자를 낳은 사회를 철저하게 바꿔놓아야 한다. 이런 힘든 작업에 참여할 준비가 된 이들만이 초기 열광적 결집의 근본 핵심에 계속 충실한 것이다. 이러한 충실함의 작업은 분리의 작업, 즉 기존 질서의 이념적 좌표 안에 남아있는 결속 및 결집으로부터 공산주의적 이데아를 분리하는 선을 긋는 작업이다. 이러한 끈기 있는 명확화의 작업이 올바른 혁명의 작업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이런 작업은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시도이고, 선의의 시위자들을 위험하고도 폭력적인 과격화로 꾀는 것이며, 시위자들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던 것에 책임을 지우는 일이다. 반면 제대로 된 혁명가에게 이 작업은 본래의 열정적 결집의 결과와 영향을 도출해내는 작업에 불과할 뿐이다. 당신은 진정한 정의와 결속을 원하는가? 여기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등…. 그런 진정한 혁명의 순간이 매우 드문 것은 당연하다. 그 어떤 목적론도 이를 보장하지 않으며, 이런 혁명은 (우연하고 예측할 수 없는) 전적으로 기회를 움켜잡을 수 있는 정치적 행위자가 있느냐에 달려있다.

대타자(Big Other)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완전히 익혀야 한다. 바디우는 간략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신과 종교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진리와 의미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에 있다. 신의 죽음은 진리와 의미가 같은 것이라고 가정한 생각의 종언이다. 그리고 나는 역사에 관한 한 공산주의의 죽음 또한 의미와 진리의 분리를 함축한다는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역사의 의미’는 두 가지 뜻을 갖는다. 한 가지는 ‘지향’으로서 역사가 어디론가 향해 간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역사가 의미를 갖는다는 것으로, 프롤레타리아를 통한 인간 해방의 역사를 말한다. 실제로, 공산주의 시대 전체는 정당한 정치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념이 존재했던 기간이었다. 그 순간에 우리는 역사의 의미에 의해 움직였다. (…)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죽음은 신의 두 번째 죽음, 그러나 역사의 영역 내에서의 죽음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유란?

따라서 우리는 진화의 선형적(linear)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편견, 역사가 이성의 간계의 일을 수행하며 땅 속 흙을 파는 유명한 두더지로 가장하여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편견을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선택권을 주는 열린 과정으로 인식해야 하는가? 이 논리를 따르면 역사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닌 우리가 직면한 대안, 선택의 조건을 결정하기만 한다. 매 순간,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다수의 가능성들이 존재하는데, 일단 이 중 하나가 자신을 현실화하면 다른 가능성들은 무효화된다. 이러한 역사적 시간의 행위자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최상의 가능한 세계를 창조한 라이프니츠의 신(Leibnizean God)이다. 창조에 앞서, 그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의 집합을 염두에 두었고, 그의 결정은 이 중에서 최상의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능성은 선택에 선행한다. 선택은 가능성들 중의 선택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린’ 역사의 개념조차 충분하지 않다. 역사의 선형적 진화라는 관점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여는 선택 또는 행위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의 출현이 과거를 바꾼다는 생각인데, 물론 여기서 과거는 실제 과거(우리는 공상과학소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가 아니라 과거의 가능성들, 좀 더 형식을 갖추어 표현하자면 과거에 대한 양상 명제(modal propositions)의 가치를 말한다. 장 피에르 뒤퓌(Jean-Pierre Dupuy)의 요지는 우리가 (사회적 혹은 환경적) 재앙의 위협에 적절히 맞서려면 이러한 일시성의 역사적 개념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새로운 시간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뒤퓌는 이 시간을 ‘기획의 시간(the time of a project)’, 과거와 미래 사이의 폐회로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미래는 우리의 과거 행위가 원인이 되어 생성되는 반면 우리의 행동 방식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예측 및 이러한 예측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의해 결정된다.

“재앙적 사건은 틀림없이 미래에 운명으로 새겨지지만, 또한 우연한 사건으로 새겨지기도 한다. 비록 그 사건이 전미래(futur anterieur)에서 필연적인 것처럼 나타나도,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 (…) 예를 들어 재앙과 같이 어떤 두드러진 사건이 발생한다면 이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하지 않았던 한에서 재앙은 필연적이지 않다. 따라서 사건의 필연성을 소급적으로 생성하는 것은 사건의 현실화, 즉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뒤퓌는 1995년 5월 프랑스 대선을 예로 제시한다. 주요 여론조사기관의 1월 예상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 5월 8일에 발라뒤르가 선출된다면, 대선이 치러지기도 전에 결과가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의 우연한 발생은 이를 필연적으로 보이게 하는 선행 연쇄를 생성한다. 이것은 어떻게 기저의 필연성이 우연적 출현 안에서, 그리고 그런 출현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부한 생각이 아니라, 요약하자면 우연과 필연에 관한 헤겔 변증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운명에 의해 결정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뒤퓌에 의하면 이것이 또한 우리가 생태학적 위기를 접근해야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파국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헤겔 철학의 의미로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발라뒤르 선출의 예처럼, 만약 파국이 일어날 것이라면 그 발생은 실제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운명과 (‘만약’의 상황을 막기 위한) 자유로운 행동은 손을 맞잡듯 같이 간다. 가장 근본적으로 자유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유이다.

 이것이 바로 뒤퓌가 제안하는 재난에 맞서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재난을 우리의 운명, 불가피한 것으로 인지한 다음, 우리 자신을 재난에 투영하고 그 관점으로 재난의 과거(미래의 과거)에 현재 우리 행동의 토대가 되는 반사실적 가능성들(“우리가 이런 저런 행동을 모두 취했었다면 현재 처해 있는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을 소급적으로 삽입해야 한다. 우리는 가능성의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가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고, 파국이 발생할 것이며 이는 우리의 운명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운명 자체를 바꿀 행동을 취하고, 그럼으로써 과거에 새로운 가능성을 삽입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재난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디우에게 사건에 충실한 시간은 전미래(futur anterieur)이다. 미래를 향해 자기자신을 추월하여 마치 바라던 미래가 현재 이미 여기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미래의 순환 전략은 우리가 파국(예로, 생태적 파국)의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을 때에도 유일하게 효율적인 전략이다. “미래는 여전히 열려 있고, 행동을 취해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 대신에, 재앙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한 뒤 이미 운명으로 ‘정해진’ 것을 소급적으로 무효화하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좌파주의자들의 애매모호함

이는 우리가 인간의 고통에 대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긴급함을 저버리는 관조적인 자세로 퇴보할 위험에 처해있음을 함축하는가? 폭력에 관한 자유주의 좌파의 인도주의적 담론에 만연해 있는 거짓 긴박감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담론에서 여성, 흑인, 노숙자, 동성애자 등에 가해지는 폭력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는 추상적 개념과 상세한 (거짓)구체성이 공존한다. ‘이 나라에서는 6초에 한번 꼴로 여성이 강간당한다’와 ‘당신이 이 단락을 읽는 동안 열 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을 것이다’는 단지 두 가지 예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도덕적 분노의 위선적 감정이 자리잡고 있다. 몇 년 전 스타벅스가 바로 이런 거짓 긴박감을 이용했는데, 매장 입구에는 스타벅스 체인 이익의 거의 절반이 자신들의 커피 원산지인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서비스에 사용된다는 포스터가 손님들을 맞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어린이 한 명의 생명을 살린다는 암시인 것이다.

이러한 긴박한 경고에는 근본적으로 반이론적인 날카로움이 있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바로 지금’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거짓 긴박감을 통해 탈산업화 시대 부자들은 그들만의 동떨어진 가상세계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영역 밖의 냉혹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도 않을뿐더러 항상 적극적으로 이를 언급한다. 최근 빌 게이츠는 “수백만 명이 이질로 헛되게 죽어가는데 컴퓨터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현재의 글로벌 성좌(constellation)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그 어떤 명확한 해결책도,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한 현실적인 충고도 제공하지 않으며, 터널 끝의 불빛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불빛이 우리를 향해 돌진하는 기차의 불빛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은 보통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냥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으라는 건가?” 그러면 용기를 내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즉각 행동하려는 충동을 이기고 끈기 있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기다리고 보는’ 것이 진정으로 유일하게 ‘현실적인’ 상황들이 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자본주의가 무한정 계속될 것이라는 불안한 기대, 무언가를 해야 하고 자본주의에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는 가짜다. 혁명적 변화의 의지는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다”는 강한 충동으로 나타나거나, 또는 무가치하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정말로 급진적 변화를 원하는가? 1937년 조지 오웰은 계급 차이에 대해 당시 좌파가 갖고 있던 태도의 모호함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우리 모두 계급 구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진심으로 이를 폐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모든 혁명적 의견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할 수 없다는 비밀스러운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 단순히 노동자의 운명을 개선하는 문제에 한에서는 제대로 된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한다. (…) 한편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계급 구분이 폐지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단순히 계급 구분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으로는 그 이상의 진전을 볼 수 없다. (…) 여기서 직면해야 하는 사실은 계급 구분의 폐지는 곧 당신 자신의 일부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여기 전형적인 중간 계급의 구성원인 내가 있다. 계급 구분을 철폐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구분의 산물이다. 모든 나의 개념, 예를 들어 선과 악, 즐거움과 불쾌함, 재미와 진지함의 이 모든 개념이 본질적으로 ‘중간 계급’의 개념이다. 책, 음식, 옷에 대한 나의 기호, 나의 명예심, 나의 식탁 예절, 나의 말투, 나의 억양, 심지어 내 몸의 특징적 움직임까지 이 모두가 특별한 종류의 양육 및 사회 계층의 중간 정도에 자리잡은 특별한 지위에서 나온 산물이다. (…) 계급 구분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내 속물근성뿐만 아니라 그 밖의 나의 취향과 편견 대부분을 억제해야 한다. 나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 결국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노동 계급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도, 더 어리석은 형태의 속물근성을 피하는 것도 아닌, 상위 계급과 중간 계급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내가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할지는 나에게 요구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나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 결국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는 것’이 재탄생에 견줄 수 있는 근본적인 자기 변형이 아닐까? 오웰의 요지는, 급진주의자들이 그 반대의 경우를 달성할 목적으로, 즉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기를 막아주는 일종의 미신적 증표로서 혁명적 변화의 필요를 언급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문화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강단좌파는 사실 자신의 학문 분야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있다. 대규모 국제 예술 비엔날레를 생각해보자. 이것이야말로 자본 순환의 순간이 된 예술 행사에 대한 경고, 반 유럽중심주의, 현대성 비판(“우리는 칸트 이후의 세상에 살고 있다”)이 혼합된 형태의 “반 자본주의” 이념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자본주의 벤처(venture)이다. 이에 대해 오래된 마르크스 형제들의 재담 버전으로 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오늘날의 예술계가 자본주의 기계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말로 자본주의 기계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이념에 관한 우리의 컨퍼런스 또한 결국은 공산주의 비엔날레와 같은 거짓 행사로 판가름 날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사회 변화의 실질 동력으로 발전될 잠재력을 지닌 무언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행동할 수 없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황의 언급뿐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무엇이 더 강해질 수 있는지 주장하고 행동에 나서기를 촉구하는 그 모든 요구는 단순히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알랭 바디우의 도발적인 테제(thesis)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제국(Empire)이 인정한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 형식적 방법을 고안해 내기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낫다.” 즉, 시스템을 더 매끄럽게 운영하려는 궁극적 목적으로 국한된 행위(대다수의 새로운 주체들을 위해 공간을 제공하는 행위 등)를 하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는 말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종종 침묵보다는 ‘비판적’ 참여, 대화를 선호하는데, 우리를 ‘대화’에 참여시킴으로써, 우리의 불길한 수동성이 무너졌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

진보의 수동성은 위기인가 기회인가?

이는 ‘거짓 행동(false activity)’의 개념을 생각해보게 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행동하지만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서’도 행동할 수 있다. 여기에는 강박신경증자의 전형적인 전략이 존재하는데, 그는 실재적인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광적으로 행동한다. 예를 들어, 폭발 직전의 긴장상태에 있는 집단에서 강박신경증자는 쉴새 없이 이야기하고 농담을 던지는 등의 행동을 해서 어색한 침묵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침묵 상태가 참석자들이 드러내놓고 잠재된 긴장에 맞서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박신경증자는 정신분석 치료 중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분석가에게 갖가지 에피소드와, 꿈, 통찰들을 쏟아낸다. 이런 쉴새 없는 행동의 저변에는 두려움, 즉 자신이 말을 멈추면 분석가가 정말 문제가 되는 질문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 분석가를 꼼짝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진보 정치에서도 위험한 것은 수동성이 아닌 가짜 행위, 즉 ‘활동’하고 ‘참여’하려는 욕구이다. 사람들은 항상 개입하여 ‘무언가를 하고’, 학자들은 의미 없는 ‘논쟁’ 등에 참여한다. 진정으로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고, 그만 두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종종 침묵보다는 ‘비판적’ 참여, 대화를 선호하는데, 우리를 ‘대화’에 참여시킴으로써, 우리의 불길한 수동성이 무너졌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항상 활동 중에 있는 사회이념적 삶에 참여하는 이러한 상호수동적(interpassive) 방식에 맞선, 진정으로 중요한 첫 단계는 ‘수동성 안으로 물러나는 것’,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활동, 성좌의 좌표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행위의 토대를 닦는 필수적인 첫 단계이다. 또 언급해야 할 사항은 서구 강단좌파의 ‘상호수동적 사회주의(interpassive Socialism)’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이런 좌파들이 타자(Other)에게 옮기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수동적인 진실한 경험이다. 이들은 서양의 연봉 높은 학자로서의 경력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이상화된 타자(쿠바,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또는 티토 집권 시절의 유고슬라비아)를 자신들의 이념적 이상으로 이용한다. 그들은 타자를 통해 꿈꾸고, 만약 타자가 현실에 안주하는 자신들의 꿈을 방해하면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방법으로) 이에 맞서 폭발한다.

서구 강남좌파들의
상호수동적 사회주의

여기에서 에인 랜드(Ayn Rand)라는 (아마 놀라운) 우회로가 이 점을 명확히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에인 랜드의 훌륭한 소설, <파운틴 헤드 The Fountainhead>와 <아틀라스 :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 Atlas Shrugged>(이하 ‘아틀라스’)에서 진정한 갈등은 창조자와 이들의 생산적 천재성에 붙어사는 기생자 대중 간의 갈등이 아니다. 창조자와 그의 여성 섹스 파트너 간의 긴장도 주된 갈등의 단순한 부차적 줄거리에 불과하다. 진정한 갈등은 창조자 자신 내부에 있다. 즉, 순수한 욕망의 존재인 창조자와 그의 히스테릭한 파트너이자 치명적인 자기 파괴적 변증법에 사로잡힌 잠재적 창조자 간의 (성적인) 긴장에서 나타나는 갈등이다(파운틴 헤드에서 로크와 도미니크 간의 갈등, 아틀라스에서 존 골트와 대그니 간의 갈등). <아틀라스>에서 무조건적으로 그녀의 일을 추구하고 대륙횡단 철도회사를 운영하고 싶어하는 대그니에게 창조자 중 한 명이 창조자의 진정한 적은 기생자 대중이 아니라 대그니 그녀 자신이라고 말할 때,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그니 자신도 그 사실을 안다. 창조자가 공적 생산적 생활에서 사라지기 시작할 때, 그녀는 그들에게 철수하기를 강요하여 서서히 사회 생활 전체를 멈춰버리려는 ‘파괴자’의 어두운 음모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궁극적인 적으로 여기는 ‘파괴자’가 그녀의 진정한 구원자라는 점이다. 이 히스테릭한 주체가 마침내 노예 상태를 벗어나 ‘파괴자’가 그녀의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할 때 해결책이 나온다. 왜일까? 기생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론적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해결 방도는 그들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창조자가 그들을 위해 일하도록 강요하는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 사슬이 끊어질 때, 기생자의 힘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창조자와 왜곡된 기존 질서를 서로 연결시키는 이 사슬은 바로 그녀 자신의 생산적 천재성에 대한 집착이다. 창조자는 계속 만들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력, 즉 그가 공식적으로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행동에 기생하는 그 세력을 먹여 살리는 굴욕을 감내하면서까지 그 어떤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히스테릭한 경향의 창조자가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근본적인 존재적 무관심이다. 그녀는 더 이상 기생자의 협박(“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 우리는 당신이 일하고 창조적인 잠재력을 실현하도록 해주겠다”)에 볼모로 남아서는 안 되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의미하는 그녀 존재 자체의 핵심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하며 ‘세상의 끝’, 세상을 계속 돌아가게 만드는 에너지 흐름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그녀는 모든 것을 잃는 영점(zero-point)을 통과할 준비를 갖춰야 하는 것이다. 에인 랜드의 신화적인 ‘성취자’의 시위가 아닌, 이른바 ‘내재적인 범죄자’의 시위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시스템에 ‘저항’하고 법규를 위반함으로써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쿠바의 암시장 상인들이 활동을 멈춘다고 상상해보자. 시스템이 몇 주 만에 붕괴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일이 서구 국가에서는 ‘준법 투쟁’에서 일어난다. 세관 서비스나 병원처럼 민감한 기관에서 공무원들이 단지 규칙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에서 급진적 변화로 걸음을 옮기기 위해서 우리는 시스템을 존속시키기만 하는 저항을 자제하는 영점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런 이상한 해방에서 우리는 타인의 우려를 걱정하는 것을 멈추고 시스템의 자기 파괴적 순환운동을 소극적으로 참관하는 역할로 물러나야 한다. 예를 들면 유로화 및 다른 통화의 안정을 위협하는 계속되는 금융위기를 고려하여, 금융 붕괴를 막고 계속 견딜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도 그만 두어야 한다. 이런 태도를 취한 사례는 1차 세계 대전 중의 레닌이었다. 그는 위험에 처한 조국을 향한 모든 ‘애국적’ 걱정을 무시한 채 치명적인 제국주의 춤을 지켜보며 향후 혁명 과정을 위한 발판을 다졌다. 그의 걱정은 동포 대부분의 걱정과 달랐다. 에인 랜드가 분명히 했듯이, 우리가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걱정과 관심은 우리의 주요 적이다. 따라서 시스템의 무력함을 뛰어넘고 여기저기서 상황을 더 개선시키기 위해 벌이는 작은 싸움을 그만두고 큰 싸움의 터를 마련해야 한다. 절대(Aboslute)의 관점을 얻기는 간단하다. 영화 <라이온 킹>의 주제가 ‘인생의 순환(Circle of Life)’에서 볼 수 있듯이 (보통은 미화된) 총체성의 입장으로 물러서면 된다. “그것은 생명의 순환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를 움직이는 힘이다/ 절망과 희망도/ 믿음과 사랑도/ 순환의 고리를 벗어나/ 우리의 있을 곳을 찾을 때까지 /그것은 생명의 순환이다.”

물론 이 노래는 사자들이 부른다. 삶은 거대한 순환이고, 우리는 얼룩말을 먹고, 얼룩말은 풀을 먹는다. 그러나 그 후 우리가 죽어서 먼지와 흙이 되면 우리 또한 풀에게 먹히고 순환은 종료된다. 이것은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들에게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메시지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지혜’에 부여하는 정치적 해석이다. 단순한 후퇴인지 아니면 급진적 행동의 토대로서 후퇴인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인생의 순환’과 유사한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 있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를 약간 바꿔서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나치는 아우슈비츠에서 우리를 죽이고 있지만, 아들아, 너는 이 모든 것이 더 큰 인생의 순환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 나치도 언젠가 죽고 풀을 위한 거름으로 바뀌어 소들의 먹이가 될 거다. 우리는 이 소들을 잡아 파이 속 고기를 먹게 되고…” 그렇다. 다시 말해 인생은 항상 하나의 순환을 형성하지만 (가끔은) 그 순환의 계층을 단순히 오르내리는 것이 아닌 순환 자체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절대의 관점을 포기하고 투쟁을 벌이는 유한한 주체라는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채택한, 절대(신) 자체의 역설을 보여주는 예수를 사실상 따라야 한다. 이 입장은 매우 헤겔적인데, 헤겔의 주 테제가 바로 자신을 ‘유한화’하고 유한한 주체로 행동할 만큼 강한 절대에 관한 테제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절대의 관점으로의 반사적인 후퇴는 비활동으로의 후퇴가 아니라 유일하고 진정한 급진적 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주는 의미다. 요지는 운명과 싸우는 (그래서 오이디푸스의 부모나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도주한 하인과 같이 운명의 실현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운명 자체, 그 기본 좌표를 바꾸는 것이다. 상황을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기존 시스템 내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장 뤽 고다르는 “무엇인가가 바뀌어야만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다”는 말을 뒤바꾸어 “아무것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Ne change rien pour que tout soit différent)는 모토를 제안했다. 끊임없는 자기 혁명화만이 시스템을 유지시킬 수 있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같은 일부 정치적 성좌에서는, 어떤 것도 바꾸기를 거부하는 이들이야말로 사실상 진정한 변화의 주체이다. 이들은 변화의 원리 자체를 변화시킨다.

단순한 진보주의 거부해야 

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유래했지만, 오늘날 유럽이 점차 선도적 역할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세계적 현상이다. 우리는 반영되지 않은 반 유럽중심주의에 특히 주의해야 하는데 이는 유럽의 유산에서 싸울 가치가 있는 대의를 거부하기 위한 이념적 표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정확히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일부 인도의 문화 이론가들은 영어 사용을 강요받은 사실이 자신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없애는 문화 식민주의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강요된 외국어를 사용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로써 근본적으로 소외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까지도 우리를 식민지로 만든 이들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어(외국어)의 도입은 그로 인해 ‘억압받는’ X 그 자체를 창조했다. 다시 말해, 억압받는 대상은 실제 식민지화 이전의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보편주의적 민주주의 인도에 대한 진정한 꿈인 것이다.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하 계급인 달리트(불가촉천민) 중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영어의 역할을 분명히 인지했다. 다수의 달리트들은 영어 사용을 반겼고 심지어 식민지배조차 환영했다. 암베드카르(달리트의 대표 정치인)와 그의 수증자(증여를 받는 사람)들에게 인도의 영국식민지화는 적어도 부지불식간에 그리고 우연하게 소위 법치와 형식적 평등이라는 기회를 모든 인도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식민지화 이전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만이 존재했고 달리트들은 거의 어떠한 권리와 의무도 갖지 못했다.

말콤 엑스(Malcom X)가 자신의 성을 X로 채택한 것이 같은 맥락이 아닌가? X라는 성을 선택하고 그럼으로써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을 고향에서 데리고 온 노예 상인이 이들에게서 가족과 인종적 뿌리, 문화적 삶과 세계 전체를 빼앗아 버렸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은 흑인들을 동원하여 본래의 아프리카 뿌리로의 귀환을 위해 투쟁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뿌리를 영원히 잃게 만든 노예제라는 과정 자체에 의해 생성된,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정체성(의 결여)인 X가 제공하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흑인들에게서 이들만의 특별한 전통을 빼앗은 X가 흑인 자신들을 재정립(재창조)하고, 백인들이 공언하는 보편성보다도 훨씬 더 보편적인 새로운 정체성을 자유롭게 생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 노동자들, 빠른 현대화에 저항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있다. 나는 탈역사적 사회로 빠르게 접어드는 데에 대한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저항을 생각해본다. 내가 판단하기에 이 저항은 단순히 더 나은 임금과 노동 환경을 위한 노동자 투쟁이 아니라, 전반적 삶의 방식을 위한 투쟁, 한국의 빠른 현대화로 위협받는 ‘세계’의 저항이다. 여기서 ‘세계’는 의미의 특정 지평을 상징하는데, 전체 문명 또는 탈역사적 상업화로 인해 위험에 처한 일상적 절차와 방식에 관련한 ‘문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저항이 보수적인가? 오늘날 자신들을 정치적, 문화적 보수주의자라고 일컫는 주류는 실제로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자기 혁명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사회적 삶을 위해 그것의 파괴적인 결과를 막고 사회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전통적 제도들(종교 등)로 보충하여 이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싶어할 뿐이다. 오늘날 진정한 보수주의자란 글로벌 자본주의의 대립과 교착상태를 인정하는 사람, 단순한 진보주의를 거부하고 진보의 어두운 이면을 주목하는 사람이다.


글·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세계적인 철학자인 그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학자로 꼽힌다. 1949년 옛 유고연방이었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줄곧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현실정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1990년 슬로베니아 첫 다당제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과학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다. 지난 7월 경희대 석좌교수로 임용된 지젝이 9월 24일~10월 2일까지 열린 ‘멈춰라, 생각하라-공산주의의 이념 2013 서울’ 컨퍼런스에서 한국 자본주의와 북한 공산주의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지젝의 글을 10월호와 11월호, 2차례에 나눠 게재한다.

번역·오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http://brecht.german.or.kr/jungbo.net/Hwizard/contents/jahrbuecher/21/1-1%EA%B9%80%EA%B8%B8%EC%9B%85.pdf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