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파 제임스 본드의 커밍아웃?

영국정보부 100년 다룬 두 권의 역사서 눈길
파업·반핵운동 감시… 이슬람 테러는 오판

2010-03-05     장클로드 세르장

각국 정보부는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국정보부 MI5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캔들이 불거지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MI5는 연구자에게 정보를 공개해 정보부의 기능과 역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할 수 있도록 도왔다. MI5가 보여준 투명성은 프랑스 정보부가 취하고 있는 태도와 대조된다.

 영국의 국내 안보를 담당하며 MI5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영국정보부는 1980년대 말까지는 가상적으로만 존재했다. 그들은 그 이유를 활동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투명성이 요구되자 영국정보부는 지금까지 활동하던 음지를 벗어나야 할 처지에 놓였다. 한 예로 정보부 국장 조너선 에반스는 2월 12일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글을 기고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혹 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고문을 자행한 적도 없다. 제3자를 고용하거나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런 행위를 사주한 적도 없다.” <<원문 보기>>
그 기사가 나가기 이틀 전, 영국 고등법원 판사 3명은 에티오피아 출신의 영국 영주권자 빈얌 모하메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2002년 파키스탄에서 체포돼 아프가니스탄과 모로코에 억류돼 고문을 당했으며, 그 후 관타나모 수용소로 이감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그가 체포됐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MI5는 심문을 위해 자신의 요원을 급파했다. 그 요원이 심문 과정에서 어떤 방법이 사용됐는지를 몰랐을 리 없다.

 공식 역사서와 비공식 역사서

영국정보부는 이 사건을 모른 체하고 넘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영국정보부가 창설 100주년을 자축한 해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발생했다. 당시 100주년을 기념해 두 권의 책이 출간됐다.(1) 저명한 대학교수 크리스토퍼 앤드루가 쓴 첫 번째 책은 영국정보부의 공식적인 역사서로 소개됐다. 저자에게는 상당한 양의 문서를 열람할 권리가 제공됐고, 서문도 정보부 국장이 직접 썼다. 두 번째 책 <첩자들>(Spooks)은 젊은 역사학자 2명의 노력으로 빛을 보게 됐다. 대담한 기획으로 집필된 이 저서는 영국정보부에 대한 비공식적 역사서라 할 만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전의 자료만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
앤드루 교수는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발전해온 영국정보부의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한다. 1909년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대간첩 활동에 주력하던 영국정보부는 정부 전복 활동에 대한 감시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리고 다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간첩 활동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1945년부터 영국정보부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동구권 첩보원에 의한 자국 정치인들의 포섭 활동을 감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으며, 그 후에는 주요 노조 지도자들에게까지 감시 대상을 넓혔다. 대테러 활동의 경우, 처음에는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영국 영토 내에서의 급진주의 아일랜드공화국군(PIRA)의 활동 감시(2)에 주력하다가 나중에는 이슬람주의자 감시에 집중하게 된다.
영국정보부는 공식적으로 내무부 장관의 지휘를 받게 돼 있지만 사실상 지금까지 총리들의 요청으로 움직인 경우가 많았다. 첫 번째 예가 1945년 윈스턴 처칠의 뒤를 이은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였다. 당시는 노조 활동이 점점 거세지던 시기였다. 1996년 선원들의 파업이 있었고, 1984년에는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정보부 국장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국정보부는 1980년대 초반 국가 전복 활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핵무기 감축운동(CND) 회원을 감시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1952년 맥스웰 파이프 내무부 장관은 외부 세력과의 연계 여부를 떠나 국가 전복을 기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세력을 감시하도록 정보부에 지시했다. 영국정보부는 1978~79년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동안 전국을 마비시킨 노동자 운동을 국가 전복 활동으로 볼 수 없다는 태도였고, 파업 주도자들에 대한 사찰 활동 역시 이런 관점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정보부는 런던의 영국 공산당 당사에 도청기를 설치해 공산당 주요 간부와 노조 지도자 간의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그 지도자들 중에는 전국광산노동조합(NUM) 위원장 아서 스카길도 포함돼 있었다.

 정치권력의 정보부 배후 조종
앤드루 교수에 따르면, 내무부 장관의 승인 아래 진행된 이 도청 활동은 의회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이라고 여겨진 공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해서만 이뤄졌으며,(3) 그중에 스카길도 포함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앤드루 교수는 MI5가 파업 감시인들(파업 중 노조 쪽에서 파견한 감시인-역자)을 사찰했다는 설을 반박한다. 그는 국가 전복 활동 단체로 분류된 단체 활동가에 대한 사찰 임무를 띤 MI5가 정부에 광산노조의 전략을 사전보고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국정보부에 대한 이 공식적 역사서는 20세기 1·2차 세계대전 동안의 성공적 임무 수행을 치켜세울 뿐 실패한 임무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술을 회피하고 있다. 가령 MI5는 1930년대 케임브리지대 학생으로 구성된 ‘케임브리지 5인회’(Cambridge five)에 의한 정부 침투 공작을 미리 차단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그들은 국가보안위원회(KGB)에 2만 쪽에 달하는 기밀 문서를 전달했으며, 그들 중 가이 버제스와 도널드 매클린은 1951년 그들의 행적이 발각되기 직전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요원 채용, 연줄서 공채로
이 사건을 계기로 연줄에 의지하는 느슨한 요원 선발 과정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영국정보부는 상류사회 출신의 젊은이나 군인 출신을 선호했다. 영국정보부는 1997년이 되어서야 공개 채용을 시작해 채용 범위를 확대했다.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반비밀단체의 위상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앤드루 교수와 <첩자들>의 공동 저자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는 영국정보부가 이슬람주의자의 위협을 지나치게 늦게 간파했다는 사실이다. 좀더 일찍 서둘렀다면 2005년 7월 7일 런던에서 발생한 테러를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이 테러로 사망자 52명과 부상자 700여 명이 발생했다. 영국정보부는 2004년부터 영국 내에서 테러 음모가 진행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국정보부 국장은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기고한 글에서 또 하나의 윤리적 과오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영국정보부가 미국이 9·11 테러 혐의자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글•장클로드 세르장 Jean-Claude Sergeant
파리3대학에서 유럽 미디어 정책을 가르쳤고, 이 대학의 영미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또한 프랑스 외무부가 재정 지원하는 옥스퍼드대학 프랑스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다.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각주>
(1) Christopher Andrew, <The Defence of the Realm: The Authorized History of M15>, Allen Lane, London, 2009. Thomas Hennessey & Claire Thomas, <Spooks. The Unofficial History of M15>, Amberley Publishing, Stroud, 2009.
(2) <Spooks>는 이 활동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3) 소머스 밀른(Seumas Milne)은 그의 저서 <The Enemy Within: The Secret War against the Miners>(Verso·London·2004)에서 전국·지역 단위 공산당 지도자뿐 아니라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이 이뤄진 사실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