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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태의 경제칼럼] 꽃향기 맡을 겨를 없는 재벌들
[차기태의 경제칼럼] 꽃향기 맡을 겨를 없는 재벌들
  • 차기태
  • 승인 2019.03.1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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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그 불길이 거세게 번지고 있다. 공무원연금 등 공적연금기관을 비롯해 다른 기관투자자들도 국민연금을 따라나섰다.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기로 한 기관투자가는 현재 70곳을 넘는다. 동참 의사를 표시한 곳까지 더하면 100곳을 넘어선다. 올해 새로 도입한 기관투자가만도 50여곳에 이른다고 한다. 
 
게다가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한 사모펀드들도 잇따라 깃발을 들고 있다. 새 봄을 맞아 한국의 재벌과 자본시장에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주행동주의 가장 앞줄에는 ‘강성부펀드’라고 불리는 KCGI가 있다. KCGI는 지난달 한진칼에게 주주제안을 보내는 등 한진그룹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왔다. 3월 들어서는 대한항공 임직원 명의로 된 한진칼 주식 224만주의 ‘정체’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임직원 2명과 대한항공 관련 단체 명의 주식 224만1629주(지분율 3.8%)가 ‘차명’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해당 지분의 평가액이 500억원을 넘지만, 자본시장법이나 공정거래법상 특수관계인 또는 동일인 관련자의 지분으로 신고되지 않았다고 KCGI는 지적했다. 
 
한진그룹은 이에 대해 차명주식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 문제에 대한 공방은 아직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아마도 오는 29일 열리는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의 연임을 둘러싸고 표대결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한진칼도 강성부펀드도 우호지분 결집에 힘을 모으고 있다. 한진그룹은 지금 ‘강성부펀드’의 파상공세 앞에 진땀을 흘리고 있다. 대한항공 조종사노조와 시민단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주총회 결과를 지금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조양호 회장 일가로서는 진정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조 회장 일가는 지난해 불거진 갑질사건으로 말미암아 경찰과 검찰, 관세청 등 여러 기관의 조사와 수사를 받았다. 이런 조사와 수사도 조 회장 일가의 경영권을 흔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올해 강성부펀드의 압박은 질적으로 다르다. 자칫하면 경영권 유지도 장담할 수 없다. 하필이면 올해는 한진그룹 주력업체인 대한항공의 창립 50주년이다. 50년동안 크고 작은 항공기 사고도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경영권이 위협받는 일은 없었다. 50년 역사를 널리 자랑하고 싶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다. 
 
현대차그룹도 표적이다. 미국의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또다시 현대차그룹을 겨냥해 준동하기 시작했다. 현대차는 지난해 지배구조 개편문제에서 엘리엇에게  일격을 당했다. 엘리엇은 올해 초에도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에 대규모 배당 등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서를 전달했다. 
 
현대차는 지난해부터 판매부진과 이익감소 등 큰 경영위기를 겪고 있다. 때문에 엘리엇의 거액배당 요구를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엘리엇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주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 세모으기를 시도하고 있다. 오는 22일 열리는 현대차 정기 주주총회에서 표대결을 벌일 태세다. 
 
지난해에는 엘리엇의 명분이 앞섰기에 국내 기관투자들도 동조했다. 그렇기에 현대차가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올해는 엘리엇의 세모으기가 수월하지 않다. 세계적인 의결권 자문사 글래스 루이스는 현대차 경영진을 지지하기로 했다. 어쨌든 엘리엇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현대차는 몹시 언짢을 것이다. 그렇지만 피해갈 방법은 없어 보인다. 
 
다른 재벌들도 마음 놓을 수 없다. 행동주의 펀드와 스튜어드십 코드를 채택하기로 한 기관투자가들로부터 언제 어떻게 표적이 될지 알 수 없다. 로마 시대의 희극작가 테렌티우스가 “인간적인 일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이 없다”고 읊었듯이, 한진과 현대차에 닥친 상황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해마다 봄이 오면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따스한 바람을 실어오고, 꽃의 여신 플로라는 인간세상을 꽃으로 장식해 준다. 그렇지만 올 봄 한국의 재벌들은 주주행동주의 등쌀에 꽃향기 맡을 겨를도 없다. 
  
주주행동주의는 이제 깃발을 들었을 뿐이다.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가 줄어듦에 따라 주주행동주의는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재벌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특히 후진적 지배구조에다 총수일가의 몰상식한 언행 등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재벌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경영권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차기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eramus414@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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