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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텔레마쿠스와 조커 -영화<조커>-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텔레마쿠스와 조커 -영화<조커>-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9.10.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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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드』의 오디세우스를 영웅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의 아들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텔레마쿠스(Telemachos)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한을 가진 전사로 그려지다가, 17세기 즈음 기독교적 세계관과 정치적 교훈을 버무려 쓴 프랑수아 페넬롱의 소설 『텔레마쿠스의 여행』에 의해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 그의 영광(kleos)을 수행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인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페렐롱이 묘사한 텔레마쿠스는 요컨대 만나본 적 없는 아버지의 명성을 쫓다가, 국가와 자아 정체성을 동시에 이해하게 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마찬가지로 영화 <조커>에서 아서(호아킨 피닉스) 역시 만나본적 없던 아버지의 명성을 쫓다가, 사회와 정체성을 동시에 이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조커>에서 아서는 웃음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대신 그가 왜 웃음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 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부여했다던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운명 때문인지 아니면 폭행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병리적 증상인 그 웃음 때문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웃음’으로 인해 아서는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억제해야할 증상으로서의 ‘웃음’을 타인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반드시 유발시켜야하는 상품으로서의 ‘웃음’으로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 <조커>는 히스레저의 ‘조커’ 이후, 정신분석학적인 캐릭터가 되어야 함을 말해주는 또 다른 버전의 영화다. 그렇다고 해서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의미를 마치 ‘인용문구’처럼 그대로 갖다 붙이는 영화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해진다. ‘정체성(주체)’의 문제에는 반드시 ‘아버지’가 개입되어야 하는가? 실제로 이 영화는 아서의 아버지가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인 토마스 웨인일지 모른다는 정황을 보여주되, 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자 한다. 예컨대, 아버지와 아들의 맥락 하에서, 토마스 웨인을 아서가 죽이는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인용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상은 아버지일지 몰랐던 사람을 죽인다는 점에서 그 미묘한 차이점이 강조된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입양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보면 그 차이점은 더욱 확실해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아서의 어머니 역시 입양을 통해 맺어진 타인이었고, 토마스 웨인은 피로써 맺어진 줄 알았던 타인이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공통점. 그것은 그들 모두 ‘타인’이라는 것이다. 아서가 조커가 될 때, 그는 바로 이 관계의 진실과 마주한다. 그래서 조커는 어머니라는 타인을 죽이고 아버지라는 타인을 죽인다.

이는 텔레마쿠스가 집착했던 아버지와의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달라 보인다. 텔레마쿠스는 아버지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의심 없이 연결 짓는 과정에 놓인 인물이라면 조커는 아버지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절대 연결 지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인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이후 조커는 인간을 두 종류로만 구분한다. 부모의 존재와 부모가 아닌 존재. 그런데 이 구분은 극진히 보살펴야하는 대상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옮겨지다가 급기야 부모가 아닌 존재는 죽여도 좋다는 규칙이 된다. 그의 총알은 이런 규칙 속에서 자책 없는 순수한 감정을 지닌 채 ‘부모가 아닌 존재’에게 정확하게 발사된다.

 

이 영화에서 부모가 아닌 타인은 죽여도 된다는 조커의 이 규칙을 직시하기 시작하면,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이 또렷해진다. 타인을 죽이면 또 다른 규칙이 생길 수 있는가? 이 영화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리고 또 다른 규칙은 다름아닌 이것이다. ‘웃음만을 남기라.’ 고담시의 혼돈은 이 두 규칙이 서로 뒤섞여 발생한 ‘어떠한 죽음에도 웃음으로 대하라’는 메시지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결국 ‘분노와 허무, 자책의 우울을 제거’하여 웃음만 남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분노와 허무, 자책의 우울을 벗겨내어 그저 웃음만을 남기자는 이 메시지는 혼돈의 고담 시 속에서 만큼은 절대적인 ‘도덕율’을 상징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 <조커>는 ‘순수한 웃음’, 즉 다른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웃음에 더 욱 예민해진다. 만약 어떠한 감정이라도 개입할라치면 그것은 제거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서의 웃음 속에 ‘자신의 결여’가 강하게 침투한다. 그 순간이라는 것은 아서가 어머니의 편지를 몰래 훔쳐볼 때이고 그 결여는 다름 아닌 아버지의 결여이다. 본적 없는 아버지의 존재는 여기에서 부각된다. 그 결과 아서는 텔레마쿠스처럼 토마스 웨인을 찾아가 절규하다가 그를 죽이고 이윽고 또 다른 아버지의 이름,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 마저 공개 처형하듯 죽인다. 아서는 이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렇게 아서는 텔레마쿠스와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부모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즉 타인의 죽음에 자책하지 않는 존재가 된 이 후에, 비로소 ‘있는지도 몰랐던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되는 인물로 변모한다.

텔레마쿠스와 조커의 맥락은 여기에서 다시 연결된다. ‘아버지의 명성이 사라지자, 온전한 정체성을 만나게 되었고 그로써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차이라고는 아버지의 자리가 채워졌느냐(텔레마쿠스), 사라졌느냐(조커) 뿐이다. 그런데 이를 ‘차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채워지거나 사라지거나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편이 영화의 주제에 더 다가 선 것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아서와 텔레마쿠스와의 차이를 비교하려면 질문을 약간 바꾸기만 하면 된다. “아버지의 명성이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돌변하게 될 때 나는 어떤 자아를 갖는가?”로 말이다.

그런데 질문을 이렇게 바꾸고 나니, 그 속에는 우리의 분노와 허무, 자책의 우울이 두껍게 녹아있음을 알게 된다. 흙수저, 금수저 담론. 그렇다면 <조커>는 이 부분에서 흙수저에 해당하는 이들의 허무와 분노, 자책의 우울의 꺼풀을 벗겨내어 순수한 웃음을 회복시켜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오롯이 웃음만 남던가?, 진짜 순수한 웃음만 남게 되던가?

1940년대 배트맨에 처음 등장하는 조커의 치명적인 무기는 ‘웃음 가스’였다. 나는 영화 <조커>를 보고 난 후, 정말 웃음만 남던가? 라고 끊임없이 반문하다가 문득 이 가스를 왜 만들게 되었는지를 단편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웃음가스’는 무기가 아니라 웃음만을 남겨야하는 운명에 충실하기위한 조커의 선물이었다. 그렇다면 조커는 왜 강압적으로라도 웃게 만들려고 ‘웃음가스’마저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이유는 이렇다. 분노와 허무, 자책의 우울을 벗겨내었을 때 마주해야 하는 건 ‘순수한 웃음’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이를 외면하고자 웃음가스를 만든 것이라고. 결국 이 슬픈 무기, ‘웃음가스’의 의미는 ‘좌절의 상징’이었다. 조커의 좌절은 ‘웃음가스’가 되어 사회의 그 이율배반의 조건 속에서 의미 없이 폭발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조커의 정체성은 텔레마쿠스와 달리 허상의 아버지를 제거함으로써 완성된 듯 보였지만 그 완성은 애초부터 희극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지로 변장했던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기어이 알아본 텔레마쿠스와는 달리 영원히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던, 그래서 가상의 아버지마저 자신의 손으로 제거해야했던 아서는 결국 조커가 되어 아버지의 그 빈 공간을 영원히 남겨두어야 하는 저주를 받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영화 <조커>는 그런 저주를 통해서만 주인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이 이상한 세상을 겨냥한 영화인지 모른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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