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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 말씀’으로 바꿀 수 없는 ‘현몽’과 ‘삽질’ - <대통령의 7시간>, <삽질>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 말씀’으로 바꿀 수 없는 ‘현몽’과 ‘삽질’ - <대통령의 7시간>, <삽질>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9.11.2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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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감독의 <대통령의 7시간>과, 김병기 감독의 <삽질>에서는 인터뷰하려는 자와 인터뷰를 피하려는 자가 끊임없이 마주하는데, 이를 지켜보는 일은 마치 라디오에서 듣는 무협액션물과 같아서 보이는 것도 없는데 분노의 감정만 치밀어 오르는 이상한 경험을 전해준다. 게다가 이 영화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비인간적인 사태들의 나열이어서 마치 선악의 대립구조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한쪽은 늘 인간과 사회를 생각하지만 그 반대편은 평생 한 번도 이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더 그러는 것 같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인터뷰를 피하려는 자들이 비인간적인 사태를 깨닫는 일은 드물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 두 영화를 이해하려면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도대체 어떤 구조 속에서 ‘한 말씀 해주세요.’는 성립될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런데 이 물음들 중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전자다. 왜냐하면 한 말씀을 요청받는 입장에서는 그 질문을 요청 받을 만한 원인을 제공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번 극렬한 저항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거기에 상응하는 대답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난다. 밀어내기. 침묵하기. 얼굴 가리기. 욕하기. 협박하기.

 

 

좀 더 이 논의를 밀고 나가기 위해 조건 하나를 산정해보자. 모르긴 해도 이런 질문을 받기 시작하면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질문은 자기반성 유도에 가깝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라는 질문은 곧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해야 한다는 명령어 인 셈이니 말이다. 그러면 통상 이런 일이 벌어진다. 자신의 과오를, 욕심을, 욕망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한 말씀 해주세요.’가 형성하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이 질문을 회피하거나 강렬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은 좋게 말해서 자아 성찰이 일부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또 불거진다. 이미 이 질문이 궁극적으로 향해야하는 실질적 주인공들은 정작 이 질문을 받을 일이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질문에 답할 가치를 아예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러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해진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자기’를 아예 팔아치워 존재하지 않을꺼란 것.

이는 두 영화의 분명한 공통점이다. 세월호 침몰 당시, 4대강 사업을 기획할 당시 그들은 이를 판단할 실체적 ‘자기’ 반성이 아예 가동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다면 이 두 영화의 목적은 더 명확해진다. 두 사람이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성찰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에서 읽어내야 할 하나의 메시지인 셈이다.

거의 장애와 같은 이런 ‘위험한 무지’는 결핍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거의 기만적 결핍에 해당한다. 그들은 이 결핍조차 모두 채워져 있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례로 그들의 욕심, 즉 주변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마치 자신이 충만하게 채워져 있다고 믿도록 유도하는 이 역할은 대체로 주변인들에 의해 자행되곤 했다. 그렇게 두 당사자는 ‘자기의식’이 사라졌음을 자인하고 주변인들을 공동정범으로 만든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복잡한 일에 대해서 생각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니 갑자기 날아든 “한 말씀 해주세요”라는 질문은 고역이다. 자기반성이 들어찰 자리에 본능이 대신 들어있으니 낯부끄러운 분노를 거침없이 표출하는데 주저함은 없다.

이 두 영화를 하나로 엮을 수 있다면 “망상 때문에 일어난 절대 회복되지 않는 상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어쩌면 “한 말씀 해주세요.”는 자신이 완성되었다고 믿는 미숙한 인간들을 측정하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만큼은 그들의 수준은 낮다. 그래서 ‘현몽’을 ‘한 말씀’으로 바꿀 수 없고, ‘삽질’을 ‘한 말씀’으로 바꿀 수 없다.

그저 이렇게 결론 맺을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질문이 최소한의 진실에 접근해가려면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은 최소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해석’이라는 사유의 힘이자의무이다. 특히 그 질문이 누군가의 불행과 관련된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타인의 불행을 야기한 행동이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자기해석을 덧씌워 이를 지켜줄 때 아주 드물게 마련되는 법이니 말이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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