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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왕의 꿈에 함께 한 사람들 <천문>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왕의 꿈에 함께 한 사람들 <천문>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0.01.0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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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보러 극장에 갔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당혹스러운 영화가 있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 그렇다. <천문>은 사극이면 이렇게 스토리를 전개하겠지 라는 선입견에 균열을 일으키며, 기존 사극 전개 방식과 달리 캐릭터들의 다종다기한 감정과 생각들의 수많은 점들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역사책으로 서술할 수 없었던 감정들의 불꽃 튀는 향연과 극적인 분출이 깔끔한 스토리의 이해를 방해한다. 그러나 감정을 누구보다 잘 다루는 감독 허진호의 강점이 녹아있는 <천문>은 사극의 새로운 연출 방식으로 기억될 영화이다.

<천문>은 조선 왕조에서 518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과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장영실이 만들어낸 과학적 업적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가장 먼저 관객을 당혹스럽게 한다. 영화는 장영실이 아닌 세종을 중심에 놓고, 세종과 장영실의 인간관계의 발전 과정을, 시간을 넘나들며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식으로 전개하다. 이들의 관계는 당대 지배집단인 사대부와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 시대 계급 간의 위계질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세종과 장영실은 신분 격차를 뛰어넘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조선의 과학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천문의기들을 만든다. 그러다 1442년 세종이 탄 가마 바퀴가 부러지는 ‘안여사건’으로 대호군 장영실이 의금부로 끌려가 곤장 80대를 맞았다는 『세종실록』 기록을 마지막으로 장영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영화는 노비에서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천문의기를 만들던 장영실이 죽을 만큼 가혹한 형벌인 곤장 80대를 맞고 사라진 이유를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재구성한 '팩션 사극'이다.

 

1442년 임금이 타는 가마인 안여가 부서지는 장면
1442년 임금이 타는 가마인 안여가 부서지는 장면

사대주의를 탈피하고 자립을 이야기하다

2019년에 나온 세종대왕에 관한 두 편의 영화는 흥미롭게도 세종과 함께 일했던 사람에 주목한다. 세종대왕은 <나랏말싸미>에서는 억불정책을 쓴 조선 시대 승려 신미, <천문>에서는 신분 사회였던 조선 시대 노비 출신인 장영실과 '금지된 꿈'을 꾼다. 세종의 꿈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 꿈이 세종으로 하여금 한글을 창제하게 했고, 천문의기를 만들어 우리 손으로 계절과 시간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게 했다.

한글과 물시계에는 세종의 원대한 꿈이 담겨있다. 그러나 사대부는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고 권세를 누리며 살기 위해, 평범한 백성이 글을 익히면 신분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이유로 한글 창제를 반대한다. 쓰고 읽는 능력이 권력인 세상, 세종은 사대부의 지지 없이는 세종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다는 협박까지 당한다. 사대부의 뒤에는 명나라가 버티고 있다.

농본 국가였던 조선이 중국을 중심으로 만든 절기가 아닌, 한반도에 맞는 24절기를 찾아내는 일은 한글 창제만큼이나 조선 '백성을 이롭게 한다.' 그러나 천문의기를 만들어 중국의 절기가 아닌 우리의 절기를 찾고, 한글을 만들어 중국의 글자가 아닌 우리의 글자를 만들어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권력관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권력을 가진 '사대부는 변화를 싫어한다.'

권력이라는 단단한 외피를 두르고 자신의 고루하고 남루한 내면을 인정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대부의 반대에도 국가의 리더인 세종대왕과 최하층민인 노비와 승려는 백성의 삶에 이로움을 주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도구를 만든다. 이는 백성들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발현하는 일이며, 자기 주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며, 나아가 자기 스스로 존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의 신념이 가져온 결과물이다.

 

대한민국의 신분 사회와 다르지 않다

유교만이 세계의 질서로 여겨지던 조선 시대, 사대주의를 통해 권력을 잡은 기득권은 그 틀을 탈피함으로써 잃게 될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맹목적인 사대주의에 빠진다. '사대주의'는 강한 나라나 사람을 섬기고 복종하는 태도나 빌붙어서 자기의 존립을 유지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영화 도입부'에 세종은 명나라 사신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피눈물을 삼킨다. 사대부는 명나라를 등에 업고 '세종의 꿈'을 꺾으려 한다. 팩션 사극의 경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빈 공간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메우게 된다. 이때 간극을 메우는 영화적 상상력은 대개 지금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나 가치로 채워진다. 당대의 요구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영화 후반부'에 세종이 반역의 음모라는 치밀한 계획으로 명나라와 사대부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장영실이라는 천재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도 과학적 성취를 감동적으로 그려낸 성공 스토리로 흐르지 않은 이유, 역사 왜곡이라는 비난에도 신미 스님을 등장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팩션 사극 장르에서 미약한 역사적 근간 위에 영화적 상상력으로 메운 재료는 역사적 고증이나 왜곡을 말하기 이전에 어떤 시대적 소명으로 불려 나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절대 왕권을 가진 군주라도 리더 한 사람의 꿈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변화를 실현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변화가 절실한 사람들이 함께해야 한다. 그래서 <천문>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꿈을 가진 세종대왕과 실현 능력이 있는 장영실과의 만남, 신분 차이를 넘어 세종의 꿈을 믿고 지지하고 신뢰를 형성하는 과정, 상대가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기희생을 감내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당대 우리의 현실에서 ‘주체성 없는’ 사대주의는 삼전도의 굴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떠올리게 하는 일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천문>은 명분만 내세우는 사대주의자들의 견고한 신념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리더의 의지와 함께 할 결핍과 절박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수많은 사람의 결핍이 욕구를 낳고, 수많은 사람들의 절박함이 행동을 가져와야 견고한 기존 질서에 금을 내고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다.

조선에 맞는 조선의 글자, 조선에 맞는 조선의 과학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꿈은 혼자서 이룰 수 없다.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세종대왕의 위대한 꿈을 실현시켜줄 재주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재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 움직여야 실현 가능하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격언이 있다. 혼자 뛰어나서 이룰 수 있는 업적은 한계가 있다. ‘빨리빨리’하는 독단적인 의사 결정보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사람과 더불어 가야 한다.

덧붙이자면, 국가 간 사대주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도시 간 사대주의도 있다. 지방은 서울 사대주의를 벗어나 자기 정체성과 주체성을 세우고 자기 존립을 스스로 유지하려는 의지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 사진 출처: 네이버

 

글: 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장, 영남이공대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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