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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가 불행을 다루는 두 가지 방법 - <이스케이프 하우스> - (feat. 봉준호 만세)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가 불행을 다루는 두 가지 방법 - <이스케이프 하우스> - (feat. 봉준호 만세)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0.02.17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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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스케이프 하우스>(Beneath Us, 2019)도 계급을 말한다. 그런데 <이스케이프 하우스>가 계급을 말하는 방식은 너무 순진하다.

 

알레한드로(리고 산체스)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일용직 일을 해가며 아들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노동자이자 아버지다. 그에게 그동안 연락 없던 동생 메모(호세 아귀레)가 나타난다. 동생을 챙기려는 알레한드로는 자신이 하던 일용직 시장에 동생을 끌고 나간다. 그러다가 대저택 수리 일을 맡게 되고 몇몇 동료와 함께 그 집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된다. 이만하면 그들은 정상범주 안에 드는 근면 성실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나 저택 수리를 의뢰한 부부는 그들의 불법체류자 신분을 악용한다. 여기에서부터 그들의 악몽은 시작된다. 그리고 일련의 이 사태들은 최종 파국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돌진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법체류자라는 이슈는 사라지고 분노로 가득 찬 인간의 본능만이 강조된다. 사회적 부조리는 그저 부차적일 뿐, 그들의 고군분투의 명분은 ‘분노’로 수렴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그 분노는 죽어 마땅한 악당과 그들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인물과의 관계로 모든 이슈를 축소시켜 버린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분노로 인한 상황역전은 일종의 거부할 수 없는 쾌감을 마약처럼 전해주기 때문이다. 일종의 당한만큼 돌려준다는 보복의 미학이 지닌 폐단이랄까. 이 영화가 불법체류자를 동원해가면서까지 말하고자 한 것이 그저 한 인간의 ‘분노’라는 사실은 그래서 안타깝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이스케이프 하우스>는 불법체류자들과 연관있는 사회적 이슈를 인간의 ‘분노’로 가려버리는 의도치않은 우를 범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분노 유발의 단서들이 단선적이고 오로지 싸이코패스에 가까운 주인 부부들의 기행만으로 이 영화를 다스린 탓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여기에서 영화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나누어 볼 수 있게 된다. ‘표면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당한 사람들을 내세움으로써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가려 버리고 마는 경우’와 ‘표면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을 내세울 때 비로소 그 사태의 본질을 폭로하는 경우’로 말이다.

굳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간 이 영화, <이스케이프 하우스>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전자의 전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화 덕에 순기능과 역기능을 구분하고 보니 갑작스레 짤막한 결론 하나에 이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타인의 불행’을 통해 무엇을 오래도록 남겨 놓을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이자 관건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맞다. 불행을 묘사해야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영화라면, 그 불행을 통해 본질을 오래도록 드러내주어야 제대로 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드러나게 될 때 그 불행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가 대놓고 우리의 불행이기도한 ‘타인의 불행’을 다루고자 할 때는 오래 갈 무언가를 남겨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영화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걸 제대로 해낼 줄 아는 한 사람이 올해 오스카 상을 4개씩이나 거머쥐긴 했다.

#봉준호만세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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