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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권의 문화톡톡] 그의 작품에서 발견한 데자뷔적 미메시스와 시뮐라시옹
[성일권의 문화톡톡] 그의 작품에서 발견한 데자뷔적 미메시스와 시뮐라시옹
  • 성일권 (문화평론가)
  • 승인 2020.04.0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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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에서 발견한 데자뷔적 미메시스와 시뮐라시옹

성일권/ 문화평론가

이제 나이를 먹은 탓일까? 바로 엊그제 보았던 영화의 제목과 줄거리가 헷갈리기 시작하고, 갤러리에서 감상했던 작품들이 뒤죽박죽 혼동된다. 그 뿐이랴. 처음으로 이성 친구의 손을 잡고서 거닐었던 공원의 장소가 가물가물하고,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그때의 이성친구마저 이름과 얼굴이 까마득하다는 사실이다. 세상 밖으로 나온 뒤의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가물가물할진대, 태어나기전의 기억들은 새하얀 백지상태로 남는 게 당연하다. 작가 이미경의 그림들은 우리가 태어나기전의 아련한 순간들에 대한 미메시스라 할 수 있다.

이 순간들은 우리가 잊고 있던 생명 탄생의 기쁨이나 꿈틀거리는 생명의 역동성을 담고 있다. 작가는 어머니 뱃속 태아 시절의 회상을 통해 세상과의 첫 만남을 갖기 전의 원형질이나 씨앗 단계를 화폭에 펼쳐보였지만, 태아가 곧 세상과 만날 기쁜 순간을 드러내는 그때 그 빛을 되살리지는 않았다. 의도적인 구성이라 미뤄 짐작된다. 회상에서 과거를 드러내는 것은 회상의 순간에 가거로 되비춘 빛이지 태아의 순간에 세상을 바로 비춘 그 빛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태아 회상은 이러한 역설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비가적인 음조를 띤다. 세상 밖으로 나갈 태아 단계의 순간이 어떤 경험이었는지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경 작가의 그림들은 우리의 태아적 경험을 데자뷔와 연관시킨다. 데자뷔란 처음 보는 것인데도 마치 예전부터 알아서 친숙한 것처럼 느끼고, 목전에 일어나는 일이면서도 마치 이미 지나간 것 같고, 처음 방문한 장소인데도 예전에 온 적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작가는 그림의 형상을 파라핀으로 켜켜이 쌓아 올려 대상들이 은근히 화폭에서 은닉되도록 하여 데자뷔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작가의 설명처럼, 파라핀은 형상들을 가리지만 이는 우리의 시선이 그것들을 한 켜풀씩 벗겨내어 보기를 요구하는 이율배반적 장치다. 작가의 의도를 숨기면서 드러내는 은폐, -은폐는 또 다른 생명읽기의 방식이자, 동시에 우리 내면에 각인된 태아기의 경험들을 소환해낸다. 마치 우리에게 낯선 이미지들이 오랜 시절의 익숙한 존재로 전환되듯이 말이다.

<드림>,2011

 

작가가 시도한 태아기에 대한 지각 방식은 인간 마음의 내부를 감성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우리에게 오랫동안 은닉되어온 원천적인 데자뷔적 경험으로서의 미메시스를 가장 잘 보여준다. 미메시스는 대상을 주체에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상과 유사해지도록 노력하는 태도를 말한다. 회화의 역사에서 보면 그림은 점점 더 추상화, 도구화되고 점점 더 비기호적인 것을 기호화한다. 작가의 작품에서는 (비인간적인 추세로) 더욱더 도구화하고, 기호화하는 회화의 흐름에서 아직 형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미메스적인 요소들이 담겨있다. 추상의 도구화에 적대하여, 또는 구상의 실사적인 재현에 반()하여, 이미경 작가가 택한 생명성 가득한 반() 추상 작품들은 단순 구상에 가까운 게르 하르트리히터의 반추상이나, 아우라를 잊은 대량생산적인 웬디 워홀의 반추상과는 다르며, 단순성의 효과를 극대화한 장 뒤퓌에, 피카소, 알렉스 카츠, 장욱진의 반추상과도 차이가 있다. 이미경 작가의 반 추상적 작품들은 대상을 고정되고 기성사실화한 완성태보다, 꿈틀거리는 만물의 생명성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 속 대상은 견고한 결정체가 아닌, 다양한 변신을 거듭하는 생명체의 잠재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예술적 퍼포먼스라면, 이 작가의 작품은 있음과 없음, 시작과 완성, 채움과 비움, 흡입과 배출처럼 뫼비우스적 시퀀스처럼 이어지며, 마치 호흡하는 생명체 같은 존재성을 갖는다. 태초의 생명력이 투사된 작가의 작품에선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우리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소유적 인간을 벗어나, 자신의 존재성을 찾는 존재적 인간으로의 회복이 담겨있다. 프롬에 따르면 존재적 실존양식에서의 기억행위는 일찍이 보았거나 들었던 것을 소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는 그림을 통해 누구나 이전에 보았던 사람이나 풍경의 장면을 기억 속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이런 종류의 생산적 기억을 수행할 수 있다. 사람의 얼굴이든 풍경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의 정신적 눈앞에 즉각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재창조되어 소생되어야 한다.”

바람따라, 2002
<바람따라>, 2002

 

그러나 재창조의 작업이 원형의 아우라를 보존하면서 이뤄지기란 쉽지 않다. 현대의 첨단적인 기기인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경우, 우리가 간직하고자 하는 대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외된 기억이 된다. 현대 첨단기기의 반인간적 소외에 적잖은 두려움을 가진 일군의 화가들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골라 그리지만, 그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소외된 기억행위라는 지적을 받는다. 원형을 실사적 기법으로 그대로 복원했으나, 실제로는 원형의 아이덴터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경 작가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낯익거나, 우리가 경험한 풍경, 얼굴, 기억을 담아내기 보다는 원형의 질감을 찾아 꿈틀거리는 잠재태의 생명성을 추구했으나, 현대인의 일상적인 삶에서 원형이 상실된 지 오래다. 현대인에게 삶이란 항상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행위다. 실제 이라크 전쟁이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 행위를 겪지 않고서도 영화나 TV뉴스에서 본 전쟁 장면과 발사장면을 보고 더 전쟁의 실감을 느끼고, 로멘틱한 사랑을 하지 않고서도 영화나 TV연속극을 보고서도 더 감동의 눈물을 짠다. 진짜 주먹다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으로 싸움을 하고, 진짜 오지 여행을 하지 않고서도 여행프로그램을 보면서 짜릿함을 느끼는 것이다.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시뮐라시옹이라는 개념을 갖고서, 이같은 현실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모든 것들은 본래적 사물들이 아니라 시뮐라시옹으로서 존재하는 세계, 즉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다소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지만, 현대 사회의 한 특징을 잘 짚어낸 사유라 할 수 있다.

이제 화가들의 작품은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사람과 풍경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재현기술에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 부인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근대에 들어,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등 화가들의 구상적 작품관이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구상이 아닌 비구상으로 방향을 튼 것은 그림의 세계란 단순히 카메라의 재현 기술이 아니라는 선언적 주장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화가의 눈에 비친 대상을 도구적으로 단순화하고 특징화하는 비구상적 작업이 대상을 억압, 규정, 제한, 고정, 딱딱함, 그리고 통제하려는 권력자의 시선에 가둘 수 있다는 것이 또다른 문제로 등장한다. 원형(본질)이 있는 사물이나 사람 같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구상적 작업이 본래적 사물에서 벗어난 시뮐라시옹을 생산했다면, 대상의 특질을 단순화시킨 비구상적 작업이 원형조차 부재한 유사원형을 재복재한 시뮐라크르를 만들고 있다는 우려다. 시뮐라크르의 세계는 실제 모습 그대로인 원형적인 대상, 또는 그 대상을 실재처럼 재현한 시뮐라시옹보다도 훨씬 세련되고 매끈한 외양을 갖는다. 성형외과가 즐비한 압구정동 거리에서 만나는 마스크여성들이 영화배우 김태희와 전지현의 이미지를 닮았지만, 두 배우보다도 더 아름다운(물론, 보는 이에 따라 주관적이겠지만)은 애초에 김태희와 전지현의 복제 사진(시뮐라시옹)보정한 이미지를 성형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미경 작가의 작품은 규범, 형식, 패턴을 따르지 않는 까닭에 뭇 비구상 화가들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인위적 세련미를 갖지 않는다. 불규칙적으로 꿈틀거리는 생명체의 잠재태로서, 관념화된 포말들이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구름 뭉게처럼 한때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찰나성과원시성을 보여준다. 유근오의 말처럼, ‘감춤으로써 드러냄형태없는 형태의 정체성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이 행태들은 단지 추상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유기체의 미완의 형상이자, 생명의 형태소, 즉 씨앗 구실을 한다.

작가의 작품들을 보자면, 언뜻 부유하는 구름처럼 보이는 포자, 태아, 꿈의 형태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느껴진다. 주체인 내가 그것들을 이미 소유하고 있으나, 내 것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 없고, 오래 동안 잊고 있던 나의 자아 같지만, 내 존재라고 말하기 힘든 그림 속 대상의 정체는 어쩌면 태아 이전에 경험했을 원형질의 데자뷔적 미메시스를 갖게 한다. 현대 미술에서 남발되는 시뮐라시옹이나 시뮐라크르의 경계 너머로 작가의 작품을 올려다본다.

 

· 성일권

국제비평가연맹 국제이사로서 영화평론 및 문화평론을 하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 발행인을 겸하고 있다. 저서로 평론집 <카페없는 소사이어티>(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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